◈ 169화. 아피엘가 (1)
“그림자들은 모두 그렇게 강한 건가요?”
“비슷하지.”
계속해서 앞으로 나가도 새로운 던전들이 아셀과 지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마다 몬스터들을 박살 내고 사방에 널브러진 민간인들의 시체를 발견했기에.
지안은 더 이상 아까 전 아셀이 했던 낯뜨거운 말을 떠올릴 겨를이 없는 것이었다.
‘리셋된다.’
던전 메이커의 마경.
그것이 다른 던전들보다 더욱 까다로운 것은 수만 개의 던전들이 계속해서 변화하고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살아있는 미궁.
그것과도 같은 거대한 던전들은 어쩔 때는 약한 던전을 잡아먹고 거대해지기도 했으며 어떨 때는 자기들 끼리 새로운 던전을 만들어내는 것까지 가능했던 것.
이 모든 것이 중심부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을 던전 메이커를 죽이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건 대륙의 제한을 받지 않지.”
마치 살점들로 만들어진 것 같은 벽을 매만지며 아셀은 이상을 찌푸렸다.
군단장급 이상의 마족들. 대륙에서 힘의 제한을 받던 녀석들이었지만, 이곳은 대륙과는 전혀 다른 이계였다.
던전이 리셋되면서 앞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참혹한 참상은 더더욱 눈에 들어왔다.
“우.우웩!”
변이에 변이를 마친 기괴하고 혐오스러운 몬스터들.
제각각 여러 몬스터의 신체들을 덕지덕지 붙어있는 것.
심지어 그것들은 앞서 나가 있던 민간인이나 전사했던 무인들의 시체를 먹고 있었다.
‘게임에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네.’
아셀이 게임을 했을 적 이 마경을 찾았을 때는 이미 마경이 만들어지고 한참 후의 일이었다.
그랬기에. 소왕국 뇌린 안에 있던 모든 존재들의 흔적이 저 몬스터들에 의해 사라지고 난 후.
지금처럼 이런 기괴한 모습은 적어도 아니었다.
그르르르릉..
시체를 파먹고 있던 녀석들이 이내 아셀과 지안을 바라보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겁을 상실한 것인지 아니면 경지가 낮아 눈앞의 존재와 격차를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 순식간에 달려드는 녀석들을 향해 아셀은 말없이 아르테스의 망치 부분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캉! 캉! 순식간에 터져 나가는 녀석들의 머리.
아셀이 그저 묵묵히 놈들의 머리를 순식간에 박살 내기 시작하자 지안은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다시 한번 지팡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뒤처지면 안 돼.’
-하... 어떻게 이런 녀석이 태어났단 말인가. 심지어 여자라니!
지안의 머릿속에서 자신의 아버지의 프레스코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내질러지는 지팡이가 점점 더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한 것.
그럼에도 지안은 쉬지 않고 지팡이를 계속해서 휘둘렀다.
“대륙 최강... 그건 내가 되어야 해.”
***
“아피엘 가주! 무사하셔서 다행이구려!”
“..로막스?”
운좋게 자신의 기사들과 함께 던전 안으로 떨어진 로막스가의 가주 함컨은 멍하니 서 있던 아피엘가의 가주 프레스코를 발견하고는 만연의 화색을 띠었다.
‘놈의 성격이 이상하기는 하지만, 분명 도움이 된다!’
7용사 가문중 유일하게 무에 재능이 아닌 상인의 재능으로 가문을 이루었던 로막스가였기에.
그런 그들이 대륙 최강을 논할 때 거론되는 프레스코를 발견하고 기뻐하는 것은 당연한 법.
이 난장판인 마경에서 프레스코같은 존재는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소.. 분명 나는 연회를 즐기고 있었거늘..”
“마족의 짓이오.”
“아..역시! 이런 천벌 받을 녀석들. 항상 그놈들이 문제군.”
툴툴거리던 함컨은 이내 손짓으로 기사들을 불러 프레스코의 시중을 자연스럽게 들게 만들었다.
“우선 장비부터 정검하는 게 좋지 않겠소?”
“........”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프레스크의 눈에 함컨은 잠시 흠 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이 자식 눈이 왜 이래?’
엘프들의 가호를 받고 자란다는 아피엘가.
그런 그들의 눈동자는 언제나 에메랄드처럼 반짝이는 초록빛이었건만, 지금 프레스코의 눈동자는 그 밝은 빛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저.. 가주? 피곤해서 그런가?”
“피곤해? 이 내가?!!”
“이.이보게 왜 소리는 치고 그러나?”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프레스코의 모습에 함컨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우리가 거슬리는 거 같으니 우리는 이만 가보겠네.”
상인의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가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그 감이.
“안 돼.. 자네들은 가면 안 돼.”
“자네 도대체 무엇이..”
슈웅. 무언가 번쩍이는 것 같더니 이내 프레스코는 자신의 양옆에 있는 기사들의 심장에 지팡이를 꽂아넣기 시작했다.
“프레스코! 자네 지금 무슨 짓을 벌이는지 알고 있나!?!”
“알지.. 알아.”
실이 끊긴 인형처럼 쓰러지는 기사들.
그것을 바라보며 프레스코는 활짝 웃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내가 너희 돼지들을 죽여도.”
“어...어..?”
함컨은 그저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기사가 죽어 나가는 것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이 자리에서 프레스코의 지팡이를 막아낼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밖에 있는 돼지들이 모르면 그만 아닌가!”
“그.그만! 살려줘.. 제발 살려줘!”
“미안하네 함컨...”
순식간에 모든 기사들을 해치운 프레스코가 씨익 웃으며 함컨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전부터 자네 심장이 어떻게 생겼을지 너무 궁금했어.”
“어..어,....”
천천히 함컨의 가슴을 꿰뚫기 시작한 프레스코의 지팡이 그는 자신의 무기를 바라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자네도 그렇지 않았나?”
***
[용과 신성기사단 그것들도 바로 타락시키는 게 좋지 않나?]
마경의 중심부.
던전 메이커와 리군 가카룬은 실시간으로 마경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바라보며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생각보다 저 셋이 던전을 돌파는 게 빠른데.]
[맞아 던전 메이커 저것들부터 타락시키자고!]
대륙의 수많은 존재에 대한 타락.
수백년간 이어진 그들의 공략은 이미 7용사 가문의 가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고 지금의 프레스코의 타락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그건 아껴두는 거다.]
[아껴둔다고?]
[뭐? 뭘 아끼는 건데?]
리군과 가카룬이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던전 메이커는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 셋은 분명 이곳까지 도달하겠지?]
말릭이 일으키는 거대한 검강은 던전을 말 그대로 박살 내고 있었으며 쿠이가와 용들이 벌이는 마법은 던전에 남아있는 몬스터들은 소멸시키고 수많은 인간들을 구해내고 있는 상황.
심지어 아셀은 홀로 여러몬스터들을 도륙하며 지금 저 시간에도 빠르게 성장하는 모습이 셋의 눈에 들어왔다.
[그렇겠지? 분명 저것들이 가장 먼저 이곳에 오겠지?]
말릭, 쿠이가, 아셀뿐만이 아니었다.
대륙 각지의 무인들이 집합해있는 상황.
바빌리나 4세와 그림자들 그리고 마리우스가 술라가 필드가 같은 무가들이 빠르게 저 셋보다는 늦지만 빠르게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으니까.
[희망을 가지게 된 녀석들이 절망으로 일그러질 때... 그때 녀석들이 어떤 표정을 짓겠는가?]
[아..]
[하하 역시 변태야 변태!]
이곳에서 군단장 셋만 잡아내면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
그 순간 갑작스럽게 가장 든든한 아군의 타락으로 이어진다면 인간들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절망으로 물들게 분명했다.
[더 큰 절망. 그리고 깊은 절망 그것이 어떻게 다가올 것 같은가 모두들?]
던전 메이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장난을 치는 아이처럼 말했다.
[신은 신앙심을 먹고 살찌고 우리는 절망을 먹고 살이 찌지.]
[크하하하 맞는 말이야. 절망으로 일그러지는 인간들의 표정은 보기만 해도 힘이 나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그들이 있는 중심부.
그 가운데에 거대한 원형 모양의 모래시계가 있었다.
검은색 모래가 가득 들어차 있는 모래시계.
놀라운 점은 모래가 하나도 없건만, 위에서 계속해서 검은색 입자 같은 무언가가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왕님과 동포들을 위해서...]
마기.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절망과 부정적인 감정들. 심지어 인간들의 정기와 혼들이 모두 저 모래시계에 마기로 변해 들어차 있는 것.
마왕자 벨의 말에 의하면 저것의 반만 채워져도 군단장급 마족 10마리를 깨울 수 있다고 했었다.
[크흐흐흐흣 이런 사건 10번만 더 일으킨다면..]
[마왕님을 부활시키는 건 일도 아니겠구만.]
[10번까지 갈 필요가 있나 친구들.]
대륙의 모든 전력이 이곳에 모였기에.
만약 이곳에서 모든 인간들을 학살한다면 마왕의 부활까지 기다리지 않고 대륙의 인간들을 절망으로 물들이기 충분했다.
[이번 한 번만으로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는데 말이지.]
***
“...네놈만.. 네놈만 아니었으면 나는 지금!!”
“라무스경 진정하시오! 이게 무슨 추태란 말입니까!?”
던전 수십 개를 돌파하고 점점 심부로 향하고 있던 아셀과 지안.
그들이 드디어 생존자들을 발견한 것도 잠시.
아셀은 광기에 물들어 검을 휘두르는 라무스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타락?’
지난번 히어로즈 컵에서 광기에 사로잡혀 자신에게 덤볐던 그때의 라무스와는 전혀 달랐다.
놈의 검에서는 미약하지만 마기가 섞여 뿜어져 나오고 있는 상황.
모두가 예전 타락했던 npc들의 초기 증세와 똑같은 모습들이었다.
“너 무슨 마족 하고 연관된 거 있냐?”
“죽어!! 죽어버려! 제발 죽어버려!!!”
아무리 마기를 받아들였다고 해도 녀석과 아셀이 격차를 메우기는 어려운 법.
놈의 검을 그저 아무렇지 않게 피하던 아셀은 대화가 통할 거 같지 않는 놈의 모습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뭐.. 기대는 하지 않았어.”
“죽...크.크아아아아아아아아!!!”
단숨에 아르테스를 휘둘러 놈을 오른팔을 잘라낸 아셀은 놈의 몸에서 검은색 피가 주르륵 흘러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아.아셀님 아무리 그래도 오른팔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라무스의 오른팔을 베어내 버린 것.
놈이 고통에 바닥을 구르는 모습에 지안의 표정이 사색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무인의 오른팔을 잘라냈다는 것은 무인으로서 생명을 끝장낸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자비를 베풀어준 거야.”
“예..? 자비라니요. 이걸로 발터가에서 항의한다면 아셀님은 큰 곤욕을 치를 겁니다!”
지안의 걱정스러워하는 모습에 아셀이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것도 잠시.
어디선가 짝짝거리는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훌륭하다. 아셀 필드. 그래. 무인이라면 응당 그래야지. 내 하나밖에 없는 자식 새끼도 자네를 조금은 닮아주었다면 얼마나 좋겠나.”
박수 소리가 들려오는 곳에서부터 미중년의 남자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초록빛 머리 지안과 똑같은 에메랄드빛 눈동자.
아피엘가의 가주 프레스코가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아버지?”
“.....”
“지안 이 머저리 같은 녀석. 어떻게.. 어떻게 내 기대에 단 한 번도 부합하지 못한 것이더냐?!”
“아버지 그것이..”
‘불안정한 심성.’
아셀은 지안의 그 부정적인 특성이 어디서 왔는지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프레스코의 광적인 자식에 대한 집착.
저것이 지안에게 저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었으니까.
“후우... 머저리 같은 녀석 훈육의 시간이다.”
“예?”
슈웅! 순간 프레스코가 쏘아낸 지팡이에서 나오는 검기가 지안의 머리를 향해 쏘아졌다.
그것과 함께 황급히 아르테스를 들어 녀석의 검기를 막아낸 아셀은 눈살을 찌푸린 것도 잠시.
그는 자신이 방금 아버지의 손에 죽을뻔했단 것을 깨닫고 자리에 주저앉은 지안을 바라보았다.
“...딸인데?”
“알고 있었나? 후우... 저 불량품은 자신의 성별까지 속이는데 실패했구만 그래.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아셀 필드?”
“어.어째서...”
지안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당장에 무너질 것 같은 그녀의 표정. 아셀은 잠시 프레스코를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딸이라니까. 이 새끼가 이상한 말이나 하고 있어. 무슨 말뜻인지 모르고 그따위로 대답한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