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화. 팽 카이저
[눈의 정령왕 팽 카이저다. 그대는 나와 함께 한다면 그대의 모든 적들은 흘러가는 시간조차 얼어붙을 것이며..]
“안 하고 싶다니까.”
[그 어떤 위대한 존재조차 그대의 앞에서 얼어붙을 것이다!]
“아. 내 말이 안 들리는 건가? 그러면 이거 그냥 부수고 나가면 될 거 같기도 한데.”
처음 정령과 계약했던 아스트랄계가 아닌 다른 공간.
아셀은 직감적으로 이 공간을 자신의 무기로 박살 낼 수 있음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어디 보자 이걸 이렇게 하면..”
[저기..]
“아니지 그냥 용왕신기로 박살 내고 나가면 되려나?”
[이봐 계약자!!! 왜 여길 부순다는 건가? 어째서 나랑 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거냐!?]
거대한 왕관을 쓰고 있으며 그에 걸맞은 거대한 몸짓과 거대한 기운들.
분명 왕급 정령왕의 그것이 맞으나 이전에 아셀이 만났던 다른 왕급 정령왕들에게서 봤던 위엄이라고는 전혀 없는 모습들이었다.
‘또 저런 녀석을 데리고 다닐 수는 없지.’
어째서인지 자신에게 집착하는 페레.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혁명을 외치는 누네스.
심지어 매번 머리가 지끈거리는 이명을 만들어내는 신성 기사단들까지.
아셀은 자신의 주위에 개성이 강한 녀석들을 더 이상 두고 싶지 않았다.
“아. 미안 조금 시끄러워서.”
[시.시끄럽다니 그게 무슨!!]
진심으로 상처 받았다는 듯 눈물을 글썽이는 팽 카이저가 아셀을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이 좋은 기회를 걷어차겠다는 것인가?]
“아니 좋은 기회는 맞는데..”
왕급 정령왕과 계약하는 것은 분명 좋은 기회인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미 다른 방법들과 앞으로 얻을 수많은 방법들로 강해질 방법을 알고 있는 아셀에게 있어 정서적인 안정보다 정령왕과의 계약은 우선순위가 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튼 내가 시끄러운 녀석들을 많이 알아서 미안하지만 어쩔 안 되겠다.”
[그러지 말거라!! 아니 그러면 안 된다!]
울먹거리는 팽 카이저의 눈에서 눈물처럼 얼음이 데굴데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째서지 분명 다른 정령왕들은 인간들이 어떻게든 계약하겠다고 난리를 쳤는데.’
그 희소성 때문에 인간들과 계약을 할 수 없던 팽 카이저가 인간과 계약하고 대륙에 나갔던 정령왕들을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드디어 찾아온 기회 그러나 어째서인지 눈앞의 인간은 자신과의 계약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는 모습이었다.
‘절대로 안 돼! 어떻게 찾아온 기회인데!’
이다음에 언제 자신을 찾아올 인간이 나올지 알 수 없는 상황.
심지어 아셀과 계약을 강요하고 싶은 팽 카이저였지만, 생각보다 강한 기운을 가지고 있는 아셀을 상대로 계약을 강제할 수조차 없었다.
[그.....]
“나 이제 간다. 다음에 좋은 계약자 구하길 바라.”
[조.조율을 하자.]
“조율?”
조율이라는 말에 아셀이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설마 정령과의 계약이 조율이 될 줄 알았다는 것은 처음 알았기 때문에.
[계약자가 시끄러운 게 싫다면 나는 충분히 말수를 줄일 수가 있다!]
“아니. 그거랑은 별개로....”
개성이 넘쳐서라고 말하려던 아셀은 팽 카이저의 진지한 표정에 흥미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딜을 하는 정령왕이라.’
인간과의 계약에서 딜을 하는 정령왕.
어떻게 호기심이 생기지 않겠는가.
[동기화가 올랐습니다.]
심지어 팽 카이저에 대한 호기심이 일어나자 동기화가 저절로 올라가는 것.
아셀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팽 카이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네가 원한다면 혼자 노래를 부르지도 않겠다!]
“잠깐. 노래를 부르려고 했다고?”
[혼자 부르는 것보다 계약자도 함께 듣는 게 좋지 않겠는가? 이건 내가 정말로 큰 결심을 한 거다..]
믿어달라는 듯 눈물을 글썽거리는 팽 카이저를 바라보며 아셀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캐릭터를 잘못 만들었어.’
캐릭터를 잘못 만들어도 한참을 잘못 만들었다.
무언가 끼었는지 실제로 게임을 플레이했을 적에는 엮이지 않았던 녀석들이 수도 없이 엮였으니까.
“.... 후 좋아 그러면 계속 말해봐.”
그 뒤로도 계약자의 허락 없이 멋대로 소환되어 눈앞에서 춤을 추지 않겠다는 것과 매달 공물로 연어 100마리를 바치라고 강요하겠다는 등의 별 희한한 조건들을 모두 없앤 후 녀석과의 계약 내용을 살펴본 아셀의 표정이 구겨질 수밖에 없었다.
[어떤가 이 정도면 충분히 많이 양보한 거 같은데..아니지 이거면 완전 내 손해 같군!]
“...이건 완전.”
[좋지? 좋지!? 이 몸은 배려심이 깊으니라. 그러니 어서 나와 계약을!]
“그냥 일반 정령왕하고 계약하는 거랑 똑같은 계약 내용이잖아?”
일반적인 정령왕들과 계약하는 내용들과 똑같은 것들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
정령왕들이 노래를 부르고 갑자기 나타나 춤을 춘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후우.. 그래 좋아 계약하자.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오오오오오! 좋아! 드디어 이 팽 카이저님이 대륙으로 향한다!!!]
방방 뛰며 좋아하는 팽 카이저를 바라보며 아셀은 잠시 머리가 지끈거릴 수밖에 없었다.
[눈의 정령왕 팽 카이저와 계약을 했습니다.]
[동기화가 올랐습니다.]
[동기화가 올랐습니다.]
[동기화가 올랐습니다.]
[동기화가 올랐습니다.]
....“?!”
무려 10%에 해당하는 에프릴과의 동기화가 한 번에 오르자 아셀의 눈이 반짝였다.
분명 정령왕과 계약한 것이 에프릴의 무언가를 닮은 것이 분명한 상황.
잠시 고민에 잠기며 신이나 방방 뛰는 팽 카이저를 바라보던 아셀은 이내 씨익 웃어 보였다.
“정령왕과의 계약이 흔한 건 아니지.”
대륙의 희소한 정령사들.
그중 왕급 정령왕과 계약한 존재들은 극소수.
그랬기에. 무려 세 마리의 정령왕과 계약한 에프릴처럼 왕급 정령왕과 계약한 아셀 또한 빠르게 동기화가 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한다 파트너! 그대의 적들은 이 몸이 모두 얼려버리겠다!]
“그래 잘 부탁한다.”
설렁설렁 답하는 것과 동시에 아셀의 코어 안에 무언가 묵직한 기운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
“아... 그래. 그렇게 갑질을 아니 계약을 조율할 수도 있는 거구나!”
[갑질이라니! 너무하구나!]
팽 카이저를 바라보는 에프릴의 눈에 무언가 반짝였다.
그와 함께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자신의 정령왕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는 것도 잠시.
아셀의 눈앞에 기분 좋은 메시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동기화가 올랐습니다.]
“아니.아니.. 내가 너희들과 계약을 파하겠다고 말했어? 너희들이 가끔 나한테 이상한 말 하고 갑자기 마나를 끌어가면 다른 정령왕 구한다고 했지?”
“.....”
아셀이 팽 카이저와 계약한 것을 보고 자신의 정령왕들과 계약을 조율하는 모습.
그럴 때마다 아셀은 에프릴과의 동기화가 올라갔기에. 그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정령왕이라니. 대단하구나 아셀.”
“정령왕과 계약한 성기사라니 이거 완전 대박인 거 아니겠습니까 단장.”
“그림자들 중에서도 정령왕과 계약한 분들은 희소하지..”
“필드가의 일원 중에는 아무도 없었거늘 장하다 아셀.”
팽 카이저의 모습에 모두가 두 눈을 반짝이며 감탄사를 내뱉자. 녀석은 무언가 마음에 드는지 우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흐흠.. 이 몸이 조금 대단하다. 뭐 그러니 이번에 첫 계약이기도 하고 말이지.]
“호오.. 아셀이 첫 번째 계약이라니.”
“그렇다면 눈의 정령왕의 역대 첫 계약자구만 우리 아셀이!”
“역시 대단해 아셀 대단해!”
계속되는 칭찬 속에서 아셀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모습을 드러내기만 하는 것으로 엄청난 마나를 갉아먹는 팽 카이저를 올려 봤다.
“이제 그만 들어가 봐 마나 딸린다.”
[자.잠깐 파트너 그렇게 많이 먹지도 않았는데...]
억울한 듯 말하는 것과 다르게 팽 카이저의 모습은 단숨에 사라진 것.
조율된 계약으로 무조건 갑의 위치에 있는 아셀 이기에 가능한 방법들이었다.
“아무튼 아셀 너는 항상 나를 놀라게 만드는구나.”
거대한 챙이 달린 모자를 만지작거리며 에프릴은 씨익 웃어 보였다.
“후후. 좋아 그러면 뇌린으로 가는 길에 정령왕의 사용법에 대해 알려줄게!”
바라던 기회였다.
에프릴에게 정령왕에 대한 사용법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그녀와의 동기화가 미친 듯이 올라갈 것은 분명했기 때문에.
‘좋아 그렇다면..’
뇌린으로 향하는 길에 말릭에게 완전 무장 발키리를 그리고 에프릴의 동기화를 100%까지 올리는 것.
모든 것을 완료하면 아셀은 분명 이전보다 크게 경지가 높아질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바로 시작하시죠.”
강해진다는 것.
그것만큼 아셀에게 있어 즐거운 것은 또 없었기에.
그는 씨익 웃으며 에프릴과 말릭을 바라보았다.
***
뇌린으로 향하는 1주일.
3일이면 도착할 거리였지만, 아셀의 수련 때문에 무려 1주일이나 걸리게 되었다.
“이제 어느 정도 구색은 갖추었구나.”
“그림자들은 사기야.. 내가 평생을 배워온 모든걸 이렇게 빨리 배울 줄은 몰랐다구!”
조금 늦어지기는 했지만, 그만큼 얻은 것 또한 많았던 것.
아셀은 완전 무장 발키리에서 나오는 무장 중에서 자신이 인지할 수 없고 어떤 것이 나올지 모를 정도로 성장했으며 에프릴과의 동기화는 무려 90%가 넘어간 상황이었다.
‘안배. 그것에서 얻은 것들이 도움이 되었다.’
안배에서 얻은 효과들.
그것이 에프릴과의 동기화를 빠르게 올려준 것이 분명했기에.
아셀은 뇌린에서 일을 처리하고 앞으로 얻을 그림자들에 대한 계획을 앞당겨도 되게 만들어주었다.
“많이들 모였구만.”
“전쟁이라도 일으키려고 모인 거 같습니다.”
소왕국 뇌린.
그 작은 왕국이 7용사 가문을 포함한 대륙의 모든 단체들을 수용할 정도의 거대한 수도를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기에.
뇌린의 수도 [모스코]에서 조금 떨어진 이곳까지 여러 가문들의 막사가 설치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던전 메이커.’
대륙 공의회의 장소가 던전 메이커의 속임수로 마경으로 변할 뇌린에서 개최된 것.
아셀은 이것이 우연이 아님을 이미 눈치채고 있는 상황이었다.
“네가 어떻게 나오든.”
저 멀리서 아셀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오는 쿠이가. 심지어 그의 주변에는 처음 보는 드래곤들까지 함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가리 깨질 준비하라고.”
던전 메이커가 이곳을 마경으로 바꾸고 모든 인물들을 위험에 빠트릴 것은 누가 봐도 뻔한 일.
아셀은 씨익 웃으며 그것에 대비해 세워두었던 모든 계획들을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쿠이가님에게 잠시 인사를 드리고 오겠.....”
“아셀님!! 부하 1호가 지금 갑니다!”
“네가 왜 부하 1호야? 1호는 나야?”
“무슨 소리하는 거야? 아셀님의 그림자에 먼저 들어가 있던 건 나였어!”
“허어.. 내가 먼저 무릎을 꿇었었는데 무슨 소리!”
“........”
저 멀리서 먼지 구름까지 만들며 빠르게 달려오는 두 명.
아셀은 마치 이름을 부른 강아지처럼 해맑게 웃으며 달려오는 둘을 바라보며 대놓고 표정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허어.. 아셀 하나 술라와 마리우스를 부하로 삼다니.”
“대단하구나 아셀. 그것이 바로 필드가의 리더쉽이다!”
‘시발..’
진심을 가득 담아 아셀은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