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안배 속에서
그것은 영화와 같은 장면이었다.
수많은 무인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하늘을 향해 무기를 겨누거나 손가락질들을 하고 있었다.
함성.
그것을 내지리고 있는 것은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것이 아닌 공포를 잊어내기 위해서임을 아셀은 하늘 위의 존재를 바라보며 눈치챌 수 있었다.
“마왕 조르게스타.....”
역병의 마왕, 시간의 마왕, 절망의 마왕, 죽음의 마왕.
수많은 이명들을 가지고 있던 그 기괴하고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존재가 하늘 위에서 광소를 내뱉으며 지상의 존재들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마왕은 대륙의 암적인 존재.]
머릿속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입구에서 대화를 나누었던 안배의 안내자의 음성은 또 아니었다.
[죽여도 죽여도 다시 태어나고 쓰러트리고 쓰러트려도 어느새 세상은 마왕의 색으로 물들지.]
조르게스타를 향해 수많은 검기들과 고대의 마법들 그리고 기운들이 쏘아졌다.
그것들을 모두가 근처에 도달하기도 전에 소멸하는 것도 잠시.
하늘에서 지옥의 불이 내려오기 시작하자 눈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마기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환상인데... 이 정도라. 아니 진짜에 100분의 1도 담지 못했네.’
다시금 부활하게 되는 마왕.
그리고 대륙의 모든 존재들이 놈과 싸워나갈 때.
아셀 또한 그때 조르게스타에 맞서 수차례 싸웠기에. 놈이 얼마나 사기적인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다.
“놈은...”
위험하다.
수천만의 유저들을 그저 희롱하고 영웅적인 npc들을 모두 도륙했으며 종국에는 대륙을 말 그대로 양분했던 모습들.
그 절망적인 모습들에 수천만의 유저들이 게임사를 상대로 소송까지 걸었던 것.
아셀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조르게스타의 위험함을 후인은 제대로 알고 있구나.]
수많은 존재들이 조르게스타의 마법 한 번에 사라졌다.
지상으로 내려온 녀석은 죽음의 땅으로 변한 대지 위에서 광소를 내뿜고 있는 상황.
분명 300년 전의 일이었건만, 아셀은 저 모습이 낯설지가 않았다.
‘게임에서도 똑같았어.’
수많은 유저들을 말 그대로 학살하고 광소를 내뿜는 녀석의 모습은 인터넷 속에서 많이 봤고 직접 봤었기 때문에.
[후인은 저것을 이길 수 있는가?]
머릿속에 또다시 음성이 들려오자. 아셀은 피식 웃어 보였다.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하지.”
[불가능?]
“지금 내가 어떻게 저걸 이기냐?”
지금 아셀은 온 힘을 다해봐야 군단장급 마족과 겨우 비빌 수 있는 정도.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셀의 장점이었기에.
그는 안배의 말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할 수 있었다.
“네가 비밀스러운 기술이나 무슨 전설급 아이템 수백 개를 쥐여준다면 모를까.”
[.... 그동안 봐왔던 어떤 그림자보다 탐욕스럽구나.]
“그럼 지금 맨몸으로 저거랑 맞서 싸우라고 말하는 너는 양심이 있니?”
진심으로 아셀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무리 선조라고 하지만, 양심이란 게 조금은 있어야지. 야 네가 생각해봐라. 저런 재앙 덩어리를 보여주면서 아무것도 안 쥐여주고 싸우라고 하는 게 사람 새끼가 할 말인지.”
[그런가?]
아셀의 분개함 가득한 말에 목소리는 낮게 웃으며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저것을 쓰러트릴 수 있을 거 같지?]
“우선 경지를 3단계 더 높여서 완성에 가까운 무인이 되고 아까 말한 것처럼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기술 수백 개랑 전설급 아이템 수백 개는 쥐여주면 가능할 수 있을 거 같기도 하고..”
[........]
한동안 긴 침묵이 이어졌다.
아셀의 머릿속에 말을 거는 존재는 갈란의 기억 속 파편.
그것은 사실 아셀에게 마왕의 위협을 보여주며 앞으로 저것에 대비해 그림자들을 규합하라는 대의적인 명분과 위로를 건네주기 위해 설계된 것이었다.
“그리고 보상도 너무 짜 생각해봐라 저런 거랑 싸우는데 그림자 재단 동기화 하나만 100%? 최소한 3개는 쥐여줘야지!”
[후인이여.. 그대는 저것과 싸우기 위해 그림자들을 다시금 부활시킬 수 있는가?]
“어쭈 이제는 말을 씹어? 나 그냥 그림자 하지 말고 여기서 그냥 나갈까?”
[..... 일단 진정해라.]
무시하며 말을 진행하기에는 아셀의 표정이 너무나도 험악했기에.
잠시 말을 멈춘 후 갈란의 의식은 주변의 풍경을 바꾸었다.
‘저건...’
이번에 나타난 것은 한 명의 무인과 하나의 마족.
무인이 어떤 존재인지는 몰라도 황금빛 갑옷을 입고 있으며 가슴에 골드 드래곤 흉장을 달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황금 기사단 소속의 단장이 분명했다.
“속삭임의 파랑스...”
그 옆에서 음흉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마족.
마계 군단장이자 그림자들을 대륙의 죄인으로 만들었으며 대륙의 내전과 갈등을 유발하고 드래곤들을 종국에 타락시키는 존재.
다른 마족들과 다르게 잘생긴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마족.
아셀은 놈과 황금 기사단의 모습이 함께 있는 풍경을 바라보며 바빌리나 4세의 말이 떠올랐다.
-황금 기사단 그것들은 그림자들이 억울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황금 기사단의 초대 단장 골든 코미어. 최초의 드래곤 나이트.]
“아....”
드래곤 나이트라는 말에 아셀은 어째서 코미어가 자신의 키보다 세배는 더 클 거 같은 랜스를 들고 있는지 이해가 되었다.
[골드 드래곤의 선택을 받은 남자가 드래곤 없이 마족과 있는 것이 어째서일 거 같나?]
“너를 잡으려고?”
아셀은 이미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존재가 누구인지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이러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존재는 갈란 한 명뿐일 테니까.
[정답이다. 오늘 일이 있은 후 골드 드래곤은 기사단을 떠나 자신의 레어로 돌아갔지.]
풍경은 다시 한번 바뀌었다.
셋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셋 다 모두 크고 작은 상처들이 가득한 상황.
싸움이 끝나가는 무렵 사방에서 들려오는 함성 소리에 갈란의 말이 이어졌다.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코미어와 갈란은 몰라도 그동안 싸워왔던 동료들을 죽이기는 싫었으니까.]
[그리고 도망치기 전에 해야 만 할 일이있었다.]
수많은 마법들과 정령들 그리고 검기와 검강이 갈란을 향해 쏘아졌다.
[파랑스 그것은 대륙을 위협할 존재. 나는 어떻게든 녀석을 죽이기 위해 놈의 위치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갑자기 풍경이 바뀌고 아셀은 낯선 방에 서 있은 것을 발견했다.
하늘에는 대륙의 지도가 있었으며 사방에는 거대한 석판들이 즐비해 있는 상황.
그리고 검은색 후드를 뒤집어쓰고 미라처럼 굳어있는 시체가 아셀의 눈앞에 있었다.
‘갈란...’
[파랑스 그것의 눈을 속이고 놈의 몸속에 위치를 추척할 마법을 걸어두었다. 어린 그림자여. 그대는 파랑스를 죽이고 그림자들을 그림자 속에서 꺼낼 수 있겠는가?]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그림자들의 원혼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속삭임의 파랑스를 죽이고 그림자들을 구하시오.]
[보상1: 그림자들의 부활.]
[보상2: 코어 강화심법(상)]
‘이건..!?’
거부할 수 없었다.
퀘스트의 내용은 극악일지라도 보상은 지금 아셀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들이었으니까.
‘게다가 파랑스를 죽일 수 있다고?’
극악이라고 불리웠던 7차 몬스터 웨이브.
마룡의 침공.
대륙의 모든 용들을 타락시키고 전 마탑주였던 쿠욘을 몬스터로까지 만들고 공격했던 파랑스.
녀석이 지금 죽는다면 7차 몬스터 웨이브는 물론이고 생각보다 빠르게 그림자들의 탄압이 사라질 게 분명했다.
“이득이 많아.”
미래에 살해당할 그림자들을 구해내는 것만으로도 앞으로 있을 마족들의 침공에 도움이 될 게 분명했으니까.
‘당장 바빌리나 4세도 그렇고.’
“그래서 어디에 있는데?”
아셀의 말에 천장에 있던 대륙의 지도에 무언가 붉은 점이 찍히는 것이 아셀의 눈에 들어왔다.
“어라.. 저긴?”
[그렇다 후인이여. 놈은 대륙의....]
붉은색 점이 찍힌 곳.
아셀은 저곳이 어디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아니 대륙의 모든 무인들이라면 저곳이 어디인지 다 알고 있을 테니까.
“이게 장난하나. 드래곤 벨리. 황금 기사단 요새잖아 저기는?”
대륙 제일 기사단이라 불리는 황금 기사단의 본부가 있는 곳.
떠나 버린 골드 드래곤이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고 알려진 협곡.
그곳에 세워진 웅장한 요새는 군단장급 마족 2명이 동시에 덤벼들어도 함락되지 않을 만큼 견고함을 자랑했다.
실제로 아셀이 게임을 하며 봤었기도 했었으니까.
[..... 지금은 그렇게 불리나? 그래도 걱정하지 말아라 후인이여 그대가 입구에서 보여주었던 근성과 패기라면 분명.]
“x랄..”
[해결 가능할 거다.]
아셀의 노골적인 욕설에도 갈란의 기억은 무시하며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심지어 웅장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은지 갑자기 주변에서 쓸데없이 웅장한 음악까지 터져 나오는 상황.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아셀은 허공을 노려보았다.
“너 이 새끼 이거 알고 있었지. 파랑스 그 잡것이 지금 황금 기사단 요새 안에 있는 거?”
[몰랐다. 세월이 흘렀으니...]
“그래.. 좋아 그러면 아까 말했던 전설급 아이템 수십 개랑 숨겨둔 기술 같은 거 있음 빨리 내놔 당장 죽이러 가줄 테니까.”
[언젠가.. 모든 그림자가 빛을 볼 날이 올 거다..]
“맺음말 하지 말고 당장 내놓으라고 이 무책임한 새끼야!”
아셀의 고함소리가 공간에 울려 퍼지는 것도 잠시.
무언가 부르르 떨리며 기둥 하나가 올라왔다.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동기화를 100%로 만들 그림자를 선택하세요.]
“아니....”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가 지금 안배에서 얻을 모든 것들이 끝이 났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전설급 아이템 내놓으라고.....”
갈란의 목소리는 다시금 들려오지 않았다.
오직 기둥에 적혀있는 것은 원래 아셀의 그림자 재단사의 기원에 관련된 정보들.
그곳에 있는 것은 검은색 가위와 바늘뿐이었다.
[최초의 그림자 재단사 마구엘의 수선 세트.]
[전설급 아이템]
[어떤 옷을 만들던 왕급 이상의 작품이 나타납니다.]
[그림자 재단으로 이용 시 모든 옷들에 동기화가 기본적으로 20%로 설정됩니다.]
“눈물 나게 도움이 되는 아이템이네...”
동기화를 빠르게 올리는 데 도움이 될 아이템은 분명했다.
앞으로 있을 저 x랄 맞은 퀘스트에 도움이 하나도 되지 않겠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셀은 보상이 이것만이 아닐 거란 것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애초에 마구엘의 수선 세트.
저것은 본래 그림자 재단사들이 얻을 안배.
아셀이 안내 받은 것은 갈란이 남긴 안배였기 때문에.
‘무언가 있다.’
한스와 바빌리나 4세의 경우 안배 속에서 계속해서 숨어있으라는 조언을 받은 상황.
그러나 아셀의 경우 파랑스를 죽여 그림자들의 억울함을 풀라는 조언을 받은 차이가 있었기에.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안배가 또 있을 거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냐.. 잠깐만 설마?!”
불현듯 아셀의 머릿속에 무언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처음부터 이곳에 있던 것.
그것은 분명 갈란이 남긴 안배가 분명했으니까.
“갈란.”
거대한 공간 가운데 미라로 변한 갈란의 시체.
그것에 가까이 다가가며 한스의 그림자를 불러들인 아셀의 심장이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아니면 그냥 여기 박살 내 버릴 거 같으니까..”
갈란의 시체.
그가 생전에 사용했던 물건들.
그것들을 감정안으로 확인한 아셀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저절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