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바빌리나 4세
한동안 바빌리나 4세와 아셀은 긴 침묵 속에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흐음....”
이내 먼저 운을 뗀 것은 아셀. 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바빌리나 4세가 어째서 이런 질문을 했는지 큰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약점을 잡으려는 건...’
두 가지 이유로 아니었다.
우선 바빌리나 4세 본인이 그림자였으며 그가 그럴 성격이 전혀 아닌 것은 지난 며칠간 직접 보아 알고 있었으니까.
“재단사입니다.”
결국 아셀은 바빌리나 4세를 대하는데 거짓 없이 직선으로 다가가기로 결정했다.
“재단사라... 그래 그런 분이 계셨다는 이야기가 있긴 하지.”
“황제께서는?”
“법관.”
“예?”
법관이라는 말에 아셀이 눈을 껌뻑이자 바빌리나 4세는 자신의 손에 매달려있는 거대한 묵주를 흔들어 보였다.
“우리 바빌 황가는 예로부터 법관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었네.”
말로 하는 것보다 보여주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인지 바빌리나 4세가 기운을 불어넣자 그의 주변에 수십 개의 묵주들이 두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우리 그림자들은 저마다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일반적인 직업보다 그림자들의 직업이 훨씬 더 좋고 특이한 능력이 많았던 것은 아셀 본인이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선조들은 다른 그림자들이 길을 어긋나지 않게 잡아주는 역할을 했었다네.”
“그래서 법관입니까?”
아셀의 물음에 바빌리나 4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게 오명을 쓰고 대륙민 모두에게 탄압을 받았지만, 정작 정면에서 마족들과 손을 잡았다는 그림자는 없었으니까 말이야.”
순간 워메이지 켈린이 떠올랐지만, 그는 마족이 아닌 마탑주의 밑에 있던 부하였다.
“그렇게 길이 어긋나는 그림자들은 우리 황가에서 지난 300년간 도와주었네.”
“... 죽였다는 말씀인가요?”
“으..음? 내 말이 그렇게 들렸나?”
잠시 눈을 껌뻑이던 바빌리나 4세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나 원 참 신하들이 가끔 오해 살 만한 언동에 주의하라고 했는데 아직 어렵구만.”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바빌리나 4세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죽이지 않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대다수는 품에 안았네. 어떻게든 교화하고 바르게 인도해 선조들의 가르침을 받게 했지.”
‘그래서...’
바빌리나 4세가 숨겨준 수많은 그림자들.
아셀은 어째서 바빌 황가에 그런 수많은 그림자들이 있는지 드디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게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르지. 자네도 알겠지만, 파랑스 그 녀석을 죽이기 전까지는 우린 대륙의 공식적인 죄인이라네.”
“그렇지요.”
속삭임의 파랑스.
그가 대륙 곳곳에서 선동하고 암시를 걸었기에 그림자들은 처지가 이렇게 되었었다.
‘본래는 마룡의 침공 이후에 풀리는데.’
속삭임의 파랑스를 그때 죽이고 대륙에 걸린 암시가 풀린 순간.
그림자들에 대한 모든 오해가 풀렸던 것을 아셀은 잘 기억하고 있었다.
‘남은 그림자들은 얼마 없어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하지만 7차 몬스터 웨이브까지 가는 긴 시간 동안 바빌리나 4세를 포함한 수많은 그림자가 죽거나 실종된 것.
그랬기에 남은 그림자들은 마족과의 전투에서 그리 효과적인지 못했음을 아셀은 잘 기억하고 있었다.
“심지어 우리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데 이용하려는 녀석들도 있으니까 말이야.”
“그런 호로새끼.. 아니 그런 망할 녀석들이 있었습니까?”
바빌리나 4세는 고개를 끄덕이며 술을 한자 더 들이켰다.
“황금 기사단. 그들은 우리의 억울함을 잘 알고 있지. 당연한 일이네. 마탑 황금 기사단 그들과는 300년 전 마족들과 싸웠던 동료들이었으니까.”
“허...”
아셀은 진심으로 역겨울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 황금 기사단이 자유도시 로렌시에서 정화를 거행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에.
‘알고 있는데 그 난리를 피운 거였어?’
아셀의 미래 속. 본래도 황금 기사단에 대한 구제가 없었지만, 그는 이번에야말로 철저하게 그것을 지우기로 결정했다.
“흐음.. 이건 그림자가 아니라 황제로서 묻는 건데 바라는 것이 있나?”
“바라는 것이라면..?”
“포상을 하겠다는 소리네. 참사가 벌어질 뻔한 히어로즈 컵을 아셀 자네가 구해내지 않았던가.”
아셀은 순간 바빌 황제의 등 뒤에 제국의 보물들이 쌓여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니야.. 아니야. 어차피 보물들은.’
이미 폐허가 되어 있는 인어들의 세상에서 가져온 보물들에 의해 아셀은 대륙에서 손에 꼽을 부자임이 틀림없었다.
그랬기에 더 이상의 보물이나 재화는 필요 없는 상황.
아셀은 예전 게임을 했을 때 바빌에서 유저들에게 포상으로 내려주었던 보상들을 떠올려보았다.
‘맹약의 서판..? 아니지 굳이 상대에게 맹약을 강요하는 거추장스러운 일보다 이제는 힘으로 해결하는 게 편하니까. 아니면 제국의 사자를 달라고 할까?’
수많은 보상들이 아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셀은 흥미로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바빌리나 4세를 바라보았다.
“폐하의 그림자를 가져오는 것을 허락해주십시오.”
“자네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네.”
‘시험이었나.’
당연히 그렇게 말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던 것처럼 말하는 바빌리나 4세의 말에 아셀은 헛웃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만약 아셀이 그림자가 아닌 재화나 아이템 같은 것을 그에게 요구했다면, 그는 실망감을 가지고 내어주었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그림자를 얻을 기회는 날아가겠지.’
바빌리나 4세가 그림자들을 보호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들은 모두 길을 잃거나 혼자서 생환이 어려운 자들.
아셀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림자라 그것은 어떻게 가져가는 것인가?”
물음에 아셀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바빌리나 4세의 옷을 만들었다.
이번에는 그가 머리에 쓰고 있는 터번을!
“과연... 과인과 똑같은 터번을 쓰니 아셀 네게서 과인의 기운이 느껴진다.”
눈을 껌뻑이며 바빌리나 4세는 자신과 똑같은 터번을 쓰고 있던 아셀을 바라보았다.
“모든 그림자를.. 그림자들끼리 아는 것은 아니지.”
이윽고 납득을 하는 바빌리나 4세에게 아셀은 자신의 동기화를 올리는 방법까지 설명해주었다.
“... 우선 폐하의 행동을 따라 하면 점점 폐하의 재능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점점 늠름해지고 터질 것 같은 화산의 힘이 느껴지는 게 지금 나와 똑같이 근엄하게 말해서 그런가?”
“..... 아직 아무것도 시작 안 했는데 말입니다?”
바빌리나 4세의 말에 잠시 지끈거렸지만, 아셀은 인내심을 발휘하며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내면. 황제 폐하의 심상을 담아내면 완벽하게 동화가....”
“그러려면 당분간 나와 함께 있어야 하겠군.”
아셀의 말을 다 들은 바빌리나 4세는 묘하나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건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도대체 무엇을 걱정하라는 것인지 아셀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른 가주들에게는 내가 설명하지.”
자리에서 일어난 바빌리나 4세는 하늘 위에 떠 있는 별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림자는 아직 그림자들에 숨어있어야 하는 법.”
‘한스?’
한스 또한 바빌리나 4세와 똑같은 말을 했었던 것임을 아셀은 기억하고 있었다.
이어 바빌리나 4세 또한 아셀은 한스가 말한 그림자들의 안배에 다녀갔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직은 그렇지만, 자네라는 존재의 등장에 이제 우리들이 빛을 보게 될 날이 곧 다가올 것 같구만.”
말과 함께 아셀은 사방의 그림자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을 발견했다.
‘어느 틈에!’
아셀 본인마저 인지할 수 없었다.
만약 그림자가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유리가 깨지듯 사방이 깨지며 그곳에 모습을 보이는 500여 명의 사람들 아니 그림자들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아셀은 바빌리나 4세가 자신이 보호하던 그림자들을 모두 데려온 것을 평생 눈치채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언젠가... 짐의 군세 예니첼리가 그대와 함께하는 날이 오기를....”
그말을 끝으로 바빌리나 4세는 등을 돌려 사라졌다.
***
“좋은 생각이다.”
잠시 바빌에 남아 바빌리나 4세와 함께 행동하기로 한 아셀의 말에 스승 말릭은 대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빌리나 4세는 전사의 심장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내란다. 아셀 네가 그와 함께한다면 네 안에 있는 야수성을 깨울 수도 있겠구나.”
“... 조언인가요?”
야수성이라는 말에 아셀 탐탁지 않아 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말릭은 그저 헛기침을 내뱉을 뿐이었다.
“다들 좋아하는 표현이었는데. 그냥 적을 상대할 때 물러서지 않는 근성이라고 표현하는 게 좋겠구나.”
“차라리 야수성이 더 간단하고 좋은 표현인 거 같습니다. 스승님. 그편이 간단하기도 하고요.”
“......”
말릭은 잠시 눈을 껌뻑이다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아무튼 바빌리나 4세의 옆에서 성장할 제자의 모습을 보기 어려워 아쉽구나.”
전날 대륙의 유명인들의 회의 결과는 하나였다.
-마족의 움직임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용자들을 뽑아 마키 헬에 사절을 보내 경고하고 대륙의 마족을 토벌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그저 보여주기식이지.’
거창한 말이었지만, 그저 보여주기식임을 알 수 있었다.
대륙에 대놓고 행동하는 마족이 없는데 무슨 토벌이란 말인가.
아마 몬스터 몇 마리 잡고 생색을 내려는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용자로 뽑힌 사람이 말릭이란 말이지...’
대륙에서 멀리 떨어진 섬. 마키 헬.
그곳에 사절로 가게 된 말릭이었기에. 당분간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게 조금 아쉬웠다.
“그리 아쉬운 얼굴 하지 말거라. 아셀 믿음이 있는 한 우리는 언제나 연결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릭은 아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보다 교황 성하와 주교님이 이번 히어로즈 컵의 결과에 매우 만족을 하셨다는구나.”
안티오크 교황과 가르시아 주교가 만족했다는 소식에 아셀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무엇을 주려나?’
“우선 교황 성하께서 영광스럽게도 네게 이명을 내리셨다.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나이에 성하께서 이명을 받은 성기사는 네가 처음일 게다 아셀.”
“.........”
이명이라는 말에 아셀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는 것과 다르게 말릭과 주변 성기사들의 두 눈동자가 붉게 물든 것이 보였다.
“크흡... 그 어린 게 벌써..”
“눈에 먼지가 들어가는 거 같구만.”
“으하하하 아셀 우리는 네가 자랑스럽다!”
‘제발.. 모두 닥쳐.’
너무나 엄숙한 분위기였기에 속 안에 가득한 욕설을 아셀은 차마 입에 담지 못했다.
“신변(神變) 수많은 무기와 재능을 가진 네게 내려주신 성하의 이명이시니 이름에.. 크흡. 미안하구나 눈에 먼지가 끼어 눈물이 나와서...”
눈물까지 주르륵 흘리는 말릭을 보며 아셀은 안티오크 주교의 네이밍 센스가 다행히 가르시아 주교보다 나음에 감동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네게 이것을 하사하셨단다.”
“?!”
보자기에 싸여있는 무언가.
아셀은 그곳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신성력에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