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히어로즈 컵 (2)
갑작스러운 외침에 아셀은 방긋 웃으며 스승 말릭을 바라보았다.
“하하하. 스승님 역시 대단하십니다. 거리의 미친놈도 스승님을 보고 저렇게 환호성을...”
“음... 황태자시구나. 아셀.”
“....다시 들어보니 미친놈이 아니라 품격이 있었군요.”
이곳까지 오면서 스승 말릭과 성기사들이 자신에게 했던 빛의 기사 하늘이 내린 독수리(비둘기에서 독수리로 변한 것에 잠시 기뻐한 자신을 아셀은 진심으로 혐오했다.)라 불린 것에 갚아줄 겸 조롱조로 말하던 아셀은 황급히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신성기사단!! 베일라스! 빨리 왜 나를 말리는 것이더냐! 저기 영웅들이 있는데!”
“파리스 저하.. 제발..”
아직 10살이 되었을 거 같은 아이. 바빌 제국 민족 특유의 구릿빛 피부에 곱슬거리는 검정색 머리카락.
파리스라 불린 황태자의 모습에 아셀은 진심으로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저런 모습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지 주변의 백성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으며 주변의 기사들과 시종으로 보이는 남자만이 쩔쩔매고 있는 상황.
이윽고 아셀과 파리스가 눈이 마주치자 녀석은 경악하듯 두 눈을 크게 뜨기 시작했다.
“저.저 푸른 머리.. 저자는.. 저자는!”
“아.. 저하. 어차피 조금 있으면 모두 직접 뵈실 분 아닙니까!”
“빛의 기사 아셀 아닌가!”
“.......”
거대한 제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자신을 향해 빛의 기사라는 중2병스러운 이명을 대놓고 외친 파리스를 바라보며 아셀은 순간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저.. 싸가지 없는 꼬맹이 새끼가.’
“허허, 역시 대단하구나 아셀 황태자도 이름을 기억하니 말이다.”
“우리도 아직 이렇게 이름을 떨치지 못했는데..”
“이거 조금 분발해야겠는걸?”
“이봐 다들 빛의 건틀릿이라는 이명은 내가 선점했으니까 넘보지들 말라고!”
“나는 빛의 망치!”
“좋아 나는 그럼 하늘이 내린 철퇴라고 하겠어.”
‘여신님... 이 머저리들이 정말로 여신님의 기사라는 말입니까?’
청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서로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결심하는 기사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 짓는 말릭을 바라보며 아셀은 진심으로 할 말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가서 손이라도 잡아주고 오는 게 어떻겠더냐?”
히어로즈컵이 개최된다고 알려진 바빌 황가의 사냥터로 이동하는 내내 환호성을 지르며 따라오는 파리스를 발견한 말릭이 아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요?”
“아까부터 계속 아셀 네 이름과 업적을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니더구나.”
“... 스승님이 계시는데요?”
“어린아이들에게 나는 다가가기 힘든 존재가 아니더냐.”
말릭의 일리있는 말에 아셀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서 다녀오거라 아셀. 이것도 수련의 일환이란다.”
부끄러움을 감내하는 게 수련의 일환이냐고 묻고 싶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 아셀에게 말릭은 헛기침을 내뱉었다.
“사교도 기사로서의 수련의 일환이지. 가만 생각해보니까. 아셀 너는 남들과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는 거 같구나.”
“제가요?”
“비교해서 미안하지만, 르안느는 벌써 다른 왕국들의 기사들과 사냥에 나갈 정도로 친해졌단다. 하지만, 아셀 너는 다른 왕국 심지어 다른 교단의 성기사들과 이야기조차 나누지 않았지 않니.”
“....”
“그러니 가서 손 한 번은 잡아줘도 괜찮단다.”
‘내가 그랬나?’
아셀은 잠시 자신의 사교성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야 생각해보면....’
필요한 존재들만 친해진 것. 투마리스부터 한스 말릭 쿠이가 케락스.
인맥이라고 말할 존재들은 모두 아셀이 그림자가 필요해 의도적으로 접근한 존재들뿐이었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황족하나 알고 지내서 나쁠건 없다고 생각한 아셀은 말릭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무언가 떠들고 있는 파리스에게 다가갔다.
“... 자네들도 그 마르코 화산의 거인이야기는... 오오오오오오오 아셀경!”
“안녕하십니까 저하. 아셀 필드라고 합니다.”
자신이 생각해도 매끄럽다고 생각한 예법의 인사를 한 아셀이 방긋 웃으며 파리스를 바라보자 녀석은 덜덜 떨리는 손을 내밀며 아셀의 손을 부여잡았다.
“이. 이렇게 빛의 기사이자, 화산악귀. 인어들의 징벌자.. 아셀경을 내가 만나다니!”
“뒤질래?”
“으응? 뭐라고 했나 내가 잘 못 들어서 말이지.”
“.....”
눈을 껌뻑이는 파리스를 바라보며 아셀은 표정을 점점 굳힐 수밖에 없었다.
“하하.. 지금 표정을 보니 화산악귀라는 멋진 이명이 어디서 나온지 알 거 같구만 아셀경! 자네 지금 전장의 악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네!”
“저.저하!! 그만.. 그만 하십시오!”
기겁하며 달려오는 시종장을 바라보며 아셀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진정하기로 노력했다.
‘그래.. 애새끼가 뭘 알겠어.’
“화산악귀가 아니라 마르코 화산의 징벌자라고 알려드리지 않았습니까 저하!”
“이 시x놈아!”
시종의 다급한 외침에 아셀은 결국 참지 못하고 놈을 향해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
필드, 페루, 아피엘, 로막스, 발터, 술라, 마리우스.
속속히 모여드는 7개 용사 가문의 문양들.
아셀은 그곳의 깃발들과 기사들을 바라보며 턱을 쓰다듬고 있었다.
“... 이번 히어로즈 컵은 마탑에서 준비했다고요 해요 아셀형..”
그리고 자신의 옆에서 눈치를 보며 입을 여는 비빌의 황태자 파리스.
길거리에서 아셀이 시종에게 결국 참지 못하고 화를 내는 모습을 본 후 시종일관 눈치를 보며 말하고 있는 아이였다.
“마탑에서?”
“히극.. 네.”
“허어.. 파리스 그렇게 눈치를 볼거 없단다.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야. 나는.”
제국의 황태가 겁먹은 모습으로 아셀의 눈치를 보는 모습. 가뜩이나 대륙의 강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 좋을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몇몇 녀석들을 벌써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그. 그렇지만...”
“생각해보렴. 파리스야. 누가 네 별명인 오줌싸개. 건방진 애송이라는 말을 길거리에서 크게 외친다면 기분이 어떨 거 같니?”
“저는 오줌싸개랑 건방진 애송이가 아닌데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만약 그렇다면 기분이 별로 안 좋지 않겠지? 그러니까 그런 것만 조심하면 나도 착한 사람이 된단다.”
방긋 웃으며 아셀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파리스는 쭈뼛거리며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건 멋있는데.”
“후우... 좋아 원래는 안되지만, 오직 단둘이 있을 때만 그 지랄같은..아니 이명들 중 하나를 부르게 해줄게.”
“정말요?!”
말 한마디에 진심으로 기뻐하는 파리스를 바라보며 아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럼! 화산악귀요! 저는 그게 정말로 멋있다고 생각해요!”
“.....그래. 정말 좋은 이름을 선택했구나.”
한 대 쥐어박을까 고민하던 아셀은 참을성 있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파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헤헤헤. 저를 편하게 대해주시는 건 아셀형이 처음인 거 같아요. 다들 아버지 때문에 저한테 잘 다가오지 않거든요.”
“그랬니?”
솔직히 아셀 또한 파리스와 이렇게 말을 놓고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없었다.
스승 말릭의 조언에 그저 인사만 나누고 어디서 이 녀석과 내가 아는 사이다 말하려고 했을 뿐이니까.
“오오! 아셀형 저기 황금 기사단이에요!”
아직 용사 가문의 기사들만이 도착하고 중요한 용사들의 후손은 보이지 않자. 슬슬 신성 기사단의 야영지로 돌아가려고 했던 아셀은 파리스의 말에 두 눈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누가 보면 지들이 여기 주인공인 줄 알겠네.”
“황금 기사단들이 싫으세요?”
파리스의 말에 어깨를 으쓱거리며 아셀은 멀리서부터 환호성을 내지르는 바빌의 시민들에게 수많은 골드를 뿌리며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녀석들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혐오감 서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것들이 바빌을 무너트릴 때 가장 앞장선 녀석들이었는데.’
황제 바빌리나 4세가 그림자들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제국의 수도를 불태우고 그 안에 있던 모든 제국민들을 학살하는데 가장 앞장섰던 녀석들이 저 황금 기사단 녀석들이었다.
‘역겨울 정도로 위선적인 녀석들.’
슬쩍 아셀이 더 이상 보기 싫다고 야영지로 돌아가려는 그때.
황금 기사단 쪽에서 기사 한 명이 빠르게 뛰어나와 아셀을 붙잡았다.
“아셀경! 필드가의 아셀경! 잠시만!”
‘허어... 저 새끼는..’
아셀이 처음 본 상대에게 새끼라고 부르는 경우는 자신의 거창한 이명을 자랑스럽게 떠들거나 게임 속에서 좋은 기억이 없던 녀석들 뿐이었다.
“로.로즈경의 수제자 발터가의 셋째 라무스경 아닌가!”
“먼저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파리스 저하.”
“날 아는가?!”
용사 가문의 후예이면서 황금 기사단 소속에 들어가 단장인 로즈에게 직접 검을 배우고 있는 남자.
자신을 바라보며 시원시원한 미소를 짓고 있으며 한때는 모든 유저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존재.
아셀은 발터가 특유의 갈색 머리를 하고 있는 라무스와 눈을 마주치며 시큰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열등감 덩어리 새끼.’
스승 로즈는 그래도 대놓고 일을 벌이지 않았으나. 아셀은 녀석의 저 시원시원한 얼굴 속에 감춰진 열등감과 질투심을 잘 알고 있었다.
녀석의 열등감은 npc들끼리를 넘어 수많은 유저들에게도 향했으며 심지어 수만의 유저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혼자 도망갔던 비열한 놈이었으니까.
“제 손이 무안해지는 거 같군요.”
내밀어진 라무스의 손을 바라보며 아셀은 그저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손에 땀이 많이 나서.”
“어.. 어 아.아셀 혀. 아니 아셀경?”
아셀의 모습에 파리스는 진심으로 당황한 듯 쭈뼛거릴 수밖에 없었다.
대놓고 저렇게 무례를 저지를 정도로 눈앞에 있는 라무스는 사회적 위치가 결코 낮지 않았기 때문에.
“아 그러십니까? 배려 감사합니다. 아셀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씨익 웃으며 손을 내리는 라무스의 표정에서 시원시원한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얼마나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는 것에 능숙한지 보여주는 대목.
아셀은 녀석이 손을 거두며 잠시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매만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말은 저렇게 해도 속은 타들어 가는 것이 분명한 모습이었으니까.
“이번 히어로즈 컵 기대가 되지 않으십니까?”
“별로..”
“수많은 용사 가문의 후기지수들이 참가한다고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셀님과 저의 라이벌 구도겠지요.”
“아?”
“이런 말하면 부끄럽고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오면서 많은 시민들이 기대하는 게 바로 저와 아셀경의 대결이라고 하니.. 참 대륙인들의 순위 정하기에 희생되는 것 같습니다.”
“아아?”
계속되는 녀석의 말에 아셀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륙 제일이라고 평가되는 두 분의 제자들이 직접 부딪칠 일은 별로 없으니까.”
심지어 그 망할 로즈를 스승 말릭과 동격으로 올리는 모습.
아셀이 잠시 할 말을 잃었다는 듯 눈을 껌뻑이던 순간. 거대한 기운을 가진 중저음의 남자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말릭이 더 위다.”
“아버님!”
거대한 위엄과 기운 그리고 중저음의 목소리와 파리스가 아버지라고 소리치는 존재.
아셀은 점점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보며 흥미로운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바빌리나 4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