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아버지와 아들
“...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동쪽 성벽에 올라오자 테일라스를 포함한 페루가의 기사들이 아셀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몇몇 기사들이 지난밤 아셀의 무위와 필드가의 가보 비파를 받은 것을 모두 지켜봤기 때문에.
특히나 테일라스는 가센의 몸에 마족이 붙어 있었다는 사소한 이유보다 아셀이 간밤에 보여준 무용담을 직접 듣기 원하고 있었다.
“사위 검이 허공을 가르더니 마족이 비명을 질렀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결국 참지 못하고 테일라스가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서 있는 아셀에게 묻자 그는 그저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어디 음유시인이라도 되시려는 겁니까?”
“말좀 해주게.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니까 말이네 사위 만약 말해준다면 내가 이 환약을 자네에게 모두 주겠네!”
페루가의 비약이라고 불리는 수상한 검은색 환약을 들이미는 테일라스를 바라보며 아셀의 표정이 딱딱해질 수밖에 없었다.
“호랑이 불x 그것 좀 치워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자네 이게 얼마나 귀한 건지 다시 한번 말해주면...”
“어.. 그런데 바다가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기사들의 외침에 아셀은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는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슬슬 시작되려는구나.’
지난 며칠간 미친 듯이 달려오던 타락한 인어들. 그것들이 드디어 제대로 공격을 해올 것이라는 신호가 분명했다.
미동도 하지 않고 고여있는 것 같던 바다가 일순간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수면 위로 올라오는 무언가의 시체들.
그것이 바닷속에 있던 물고기들 심지어 고래들이라는 사실이 보이자 아셀의 눈이 딱딱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설마 바닷속에 있던 마기에 짓눌러 죽은 것인가.”
테일라스의 중얼거림이 맞았다. 바닷속에 있는 거대한 마기들에 의해 모두 떼죽음을 맞이한 것.
그것들이 흘러내린 피는 바다를 붉게 물들였으며 순식간에 썩어나간 시체들에서 나오는 악취가 사방에 퍼지기 시작했다.
부르르.
떨리기 시작한 바닷속에서 거품이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수백 척의 유령선들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뭐.뭐야!”
“저것들 분위기가..”
유령선 위에 있는 것은 기사들처럼 완전히 무장한 타락한 인어들이었으며 녀석들이 들고 있는 삼지창 또한 이전에 들고 있던 것보다 더욱 정교해 보이는 상황.
심지어 놈들의 크기 또한 평범한 타락한 인어들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동안 잡병을 보낸 것인가....”
잡병을 보낸 것이 맞았다. 그동안 이곳을 공격했던 녀석들은 잡병이라고 불릴만한 녀석들.
저 거대한 유령선 위에 있는 녀석들이 바로 진짜 3차 몬스터 웨이브의 주역이라고 불리는 몬스터들이었으니까.
‘네임드 몬스터.’
하나같이 네임드 몬스터들. 무언가를 지시하기도 전에 그것들 모두가 고성 아메라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키아아아아아아아!!
어디선가 몸을 숨기고 녀석들에게 버프를 주고 있을 키에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자 경지가 낮은 무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휘청거리는 상황.
아셀은 비명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강해지는 타락한 인어들을 바라보며 투마리스의 그림자를 불러들였다.
‘유지 시간을 배분해야 해.’
지금부터는 이것들이 전멸하기 전에 바다로 돌아가지 않음을 아셀은 잘 기억하고 있었기에.
그는 이전처럼 샤인 에로우를 쏘아내는 것과는 다르게 평범한 화살들을 정확히 녀석들의 미간에 적중시켜나갔다.
“막아!”
“망할 것들아 페루가 사나이들이 몬스터들에게 밀리는 게 말이 되더냐!?”
순식간에 성벽을 타고 올라온 타락한 인어들. 이전처럼 여유는 더 이상 이공간에 존재하지 않았다.
사방에서 욕설과 고성이 터져 나왔다.
슝! 슝! 슝!
마치 동시에 쏘아내는 것 같은 수십 발의 화살들이 날아오던 타락한 인어들 수십 마리를 정확히 지상으로 추락하게 하는 것도 잠시.
거대한 한기가 일어나더니 페레의 두 눈이 흰자로 뒤덮이는 것을 아셀은 발견할 수 있었다.
“어..어?”
“아셀 도련님과 같이 온 여자가 이상한데?”
상황이 급격하게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페레가 본신의 힘을 제대로 발휘하려는 것이 분명한 모습.
블러드 퀴리에서 나오는 얼음 계열의 마법이 터져 나오자 순식간에 수백 마리의 타락한 인어들을 얼려버리는 모습이 나타났다.
“잘했어 페레.”
단 한 번의 마법에 지처 숨을 고르는 페레를 바라보며 씨익 웃어 보인 아셀이 움직임이 제약된 녀석들을 향해 샤인 에로우를 쏘아냈다.
쾅! 거대한 소리와 함께 코어 안으로 들어오는 수백 마리의 타락한 인어들의 마나들.
녀석들이 강해진 만큼 코어 안으로 들어오는 마나의 양도 많아졌기에. 아셀의 입가에는 어느새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들었다.
키에에에에에에에에!
키아아아아아아!
동족을 잃은 슬픔을 토해내듯 어느새 대다수의 타락한 인어들이 박살 난 얼음을 짓밟으며 아셀을 집중해서 달려오기 시작했다.
‘생각 이상으로 빠르다.’
녀석들이 다가오는 속도가 아셀의 예상보다 빨랐다.
화살에 맞아 죽은 수많은 타락한 인어들. 더 이상 활로 녀석들의 진격을 저지하지 못할 것을 직감한 아셀은 미련 없이 모든 유지 시간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모두 뒤로 물러나라.”
아셀의 말에 무슨 말이냐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주변의 기사들을 무시하며 어느새 수십 여발의 샤인 에로우가 황금활 기온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어!?”
“마법이야?!”
“무슨 기운을 저렇게 무식하게!”
페루가의 기사들의 두 눈이 튀어나올 만큼 아셀이 남은 그림자 재단 유지 시간을 투자한 기술은 그만큼 거대했다.
쾅!
수십 여발이 쏘아졌건만, 동시에 터져 나오는 소리. 마치 거대한 마법이 떨어진 것 같은 그것은 일순간 앞으로 달려오던 타락한 인어들 500여 마리를 순식간에 해치우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
“믿기십니까 가주님? 저게 아셀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다른 성벽에서 검을 휘두르던 유론마저 그 거대한 폭음과 거대한 기운에 아셀이 있는 쪽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역시.. 아셀 너는.’
그러면서 머릿속을 관통하던 의문이 확신으로 바뀌는 것. 유론의 눈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메이슨은 그것이 아셀에 대한 대견함에서 오는 것이라 착각했다.
‘어디서 그것들의 흔적을 발견했단 말이더냐.’
“사위 조금 쉬는 게...”
거대한 기술을 사용했기에. 이전처럼 지쳤을 아셀을 떠올리며 테일라스가 우려 섞인 목소리를 내었지만, 아셀은 그저 말릭의 그림자를 불러들일 뿐이었다.
‘비파!’
게임을 했을 적에도 새로 얻은 무기를 휘둘러보고 싶던 것처럼.
이번에서 빨리 필드가의 보검을 휘둘러보고 싶은 욕구가 아셀의 몸 안을 가득 채워나갔다.
“저건 비파!?”
“아셀 도련님이 정말로 유론님에게 비파를 받았구나!”
명검의 등장에 기사들의 눈동자가 번쩍 뜨였다.
그런 시선을 느끼며 타락한 인어들을 향해 비파를 휘두르는 아셀은 허공에 푸른빛 잔상을 남기는 비파의 모습에 눈을 가늘게 뜰 수밖에 없었다.
“이거 설마..”
거대한 검강을 비파에 불러들이던 아셀은 자신의 머릿속에 가득한 의구심이 확신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신성력을 담아내지 못해.”
말릭의 힘의 근원인 신성력.
아르테스가 그 어떤 기운을 붙드는 것과 다르게 비파는 신성력을 거부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증거로 단번에 수십을 베어내었어야 할 아셀의 검이 한두 마리에서 막히는 모습이 나타났기 때문에.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던 아셀은 비파의 안에 있던 필드가의 일원만 다룰 수 있다는 조건을 떠올렸다.
‘말릭의 재능으로는 이걸 제대로 사용할 수 없다.’
아마 필드가 특유의 아쿠아색 오러만이 이것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셀 본인의 재능으로는 안 돼.’
사출의 주머니에서 아르테스를 꺼낸 아셀은 순식간에 신성의 갑옷을 구현하며 타락한 인어들을 향해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허어... 설마 그러면 유론의 그림자를 사용해야 하는 건가?”
저 멀리서 푸른빛이 도는 필드가 특유의 오러로 수백 마리의 타락한 인어들을 도륙내고 있는 유론을 바라보며 아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건 너무나도 싫은 일인데.”
분풀이를 하듯 아셀이 건틀릿으로 되어 있는 주먹으로 타락한 인어들의 골통을 부셔버렸다.
아셀 본인의 있던 기억 속의 유론과 관련된 것은 좋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사위 화났나?”
테일라스의 말을 무시하며 아셀은 때로는 아르테스로 그리고 때로는 다른 무기를 손에 들고 타락한 인어들 사이를 휘젓기 시작했다.
“말릭경을 보는 듯 하는구만.”
“저 나이에 저런 무위를 보이시다니..”
다양한 무기들을 양손에 들고 타락한 인어들을 순식간에 도륙내는 아셀을 바라보며 기사들은 말릭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완전 무장 발키리에 있는 수많은 무기들로 싸우던 말릭의 모습과 지금의 아셀의 모습이 비슷했기 때문에.
‘그래도 비파를 안 쓰기도 그렇고.’
유론의 그림자를 사용하냐, 비파를 사용하지 않느냐.
그것들이 아셀의 내면에서 거대한 갈등으로 일어나는 것도 잠시.
그는 결국 긴한숨을 내쉬며 자신을 향해 삼지창을 찔러대는 타락한 인어들을 바라보았다.
“역시 그림자를 사용하는 게 좋겠지?”
비파를 사용할 때만이라도. 유론의 그림자를 사용하는 것이 분명 이득일 게 분명했다.
생각이 결정되는 순간. 아셀은 씨익 웃으며 예전에 만들어두었던 유론의 셔츠를 꺼내 들었다.
“기다려 옷 입는 동안.”
순식간에 타락한 인어들을 베어내며 아셀은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빠르게 유론의 셔츠를 입는 데 성공했다.
[파도의 기사 유론의 셔츠를 착용했습니다.]
[그림자 재단의 효과가 발동됩니다.]
[원단의 효과로 12% 동기화가 올라갑니다.]
[상급 검의 재능. 기민한 몸놀림. 카리스마. 부성애 특성이 구현됩니다.]
[동기화 64%.]
[스탯이 재분배됩니다.]
[유지 시간 14시간.]
[필드가의 검술 스킬이 해방되었습니다.]
[사용하면 그림자 재단의 유지 시간이 1시간씩 줄어듭니다.]
어째서인지 유론과의 동기화가 늘어나 있는 것을 아셀은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을 신경 쓰지 않으며 아셀은 사출의 주머니에 있던 비파를 손에 들어 올리는 것과 동시에 비파에서 놀라운 모습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가주님!”
“저걸 아셀 도련님이!?”
“어떻게 가주님만 가능하셨던 기술을!!!!”
필드가의 무인들은 눈앞에 몬스터조차 잊을 만큼 놀라워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아셀의 손에 쥐어진 비파가 보여주는 모습은 역대 가주들만이 가능하게 했던 모습.
심지어 필드가의 역사상 가주가 되지 않고 비파를 변형시켰던 인물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아셀..! 진정 그것들의 능력은 비파의 힘을 끌어낼 정도란 말인가! 하지만, 변절자들이라 불렸던 그것들이 어떻게!’
유론의 머릿속에서는 비파의 변형과 함께 그 순수한 힘을 그림자들의 힘으로 끌어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이거 왜 이래...?”
눈앞에서 점점 모습이 바뀌는 비파. 아셀의 중얼거림처럼 그가 의도하지 않았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