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비파
기괴한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거대한 살점들 그것들로 이루어진 가센의 팔을 향해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는 아셀의 모습이.
마치 살점들을 헤쳐나가며 가센에게 도달할 듯한 모습.
그것을 가센이 가만히 보고 있을 리 없었다.
슝! 슝!
아셀이 베어낸 살점들 속에 정확한 검기들이 날아들었다.
그와 함게 재생되는 건 당연한 법. 검기 다발들을 막거나 피해낸 아셀은 자신의 등 뒤를 노리고 거대한 식칼을 내려치는 로나니를 발견할 수 있었다.
캉!
로나니의 거대한 식칼은 아셀의 신성의 갑옷을 뚫어내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반사되는 충격에 뒤로 데굴데굴 굴러가는 모습. 황급히 일어나 아셀을 향해 달려들려고 했던 녀석은 바닥에 붙어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손을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어느새!’
몸이 얼어가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저항할 수 없는 한기가 본체인 거대한 식칼을 얼려가고 있는 것.
경악이 로나니의 표정에 물들었으며 힘겹게 고개를 돌려 자신을 얼린 존재를 발견하고는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설마.. 얼음...”
그뒤로 말을 잇지 못했다. 블러드 퀴리에서 나온 페레의 수백 가지 얼음 마법들에 의해 로나니는 단숨에 얼어붙었기 때문에.
“저런 존재를 어디서!”
가센의 표정에 점점 여유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설마 로나니를 저렇게 손쉽게 제압하고 자신의 몸을 이렇게 빠르게 베어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역시 이것들은..’
그림자들 가센은 그 옛날 그림자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던 특별한 능력들이 떠올랐다.
새하얀 빛을 터트리는 것과 다르게 흉흉한 기운을 풍기는 검강은 어느새 거대한 살점들을 모두 도려낸 것을 아셀은 발견할 수 있었다.
눈앞에 점점 보이기 시작한 가센의 얼굴.
그것을 향해 빠르게 찔러내자 처음으로 가센이 검을 뽑아 막아내는 모습이 아셀의 눈에 들어왔다.
캉!
마기에 둘러싸인 검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청아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곳에 온 지 200년.”
검을 휘두르는 가센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마치 파도들이 몰아치는 것처럼 달려드는 모습 그것을 발견한 유론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떠질 수밖에 없었다.
“마족 따위가 필드가의 검에서 깨달음을 얻었단 말인가..”
용사 가문의 검술을 마족이 구현하는 것이 믿기지 않는 것. 그 말에 가센은 그저 코웃음 치며 아셀을 집어 삼킬 기세를 풍길 뿐이었다.
“200년 동안 이런 조잡한 기술 하나 마스터 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까?”
200년.
필드가의 어린아이들의 몸에 기생했던 존재였기에. 그가 200년 동안 필드가의 검술들을 배워온 것은 당연한 법.
마기로 일렁이는 파도가 아셀을 향해 덮쳐오기 시작했다.
“위험합니다 도련님!”
“뒤로 물러..”
메이슨과 유론이 그 모습에 황급히 자리를 박차고 아셀에게 달려오려고 했다.
마기와 함께 이루어진 저것에 아셀이 사라질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사방에서 들려오는 우려 섞인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아셀은 그저 아르테스에 거대한 기운을 불어넣을 뿐이었다.
“흡!”
검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며 다가오는 마기들의 파도를 향해 아셀이 검을 내리쳤다,
‘터져라!’
아셀이 검을 내려치는 것과 동시에 마기의 파도가 갈라지며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십자가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힘으로 가센의 기술을 깨부순 것이 분명했다.
“무식한...”
생각 이상의 아셀의 기운에 자신의 기술이 깨졌기에. 뒷걸음질 치는 가센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두 눈을 경악하듯 뜰 수밖에 없었다.
“커헉!”
자신의 가슴을 바라보니 새하얀 도신이 보였다.
분명 자신의 눈앞에서 자신을 향해 검을 내려치고 있던 아셀이 어느새 등 뒤로 이동해 가슴에 검을 찔러넣은 것이었다.
“어.어떻게..”
마법을 사용하는 낌새도 없었기에. 도저히 믿지 못하는 가센을 바라보며 아셀이 비릿하게 웃어 보였다.
“네 말대로야. 그림자들은 특별한 게 많지.”
그림자 잡기. 가센이 아셀의 기술에 한눈이 팔린 사이 아셀은 그림자 잡기를 사용해 놈의 뒤를 잡은 것에 성공한 것이었다.
“하지만 네놈이 동생을 죽일 수 있을까?!”
가센의 가슴에서 붉은 피가 점점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인간을 초월한 재생능력은 오른팔에 한정된 게 분명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아셀이 관통한 가슴에 난 상처는 순식간에 치료됐었을 테니까.
“네놈은 그러지 못해.. 인간은 자신의 혈족을... 커..커헉!”
가센의 두 눈이 점점 믿기지 못하겠다는 듯 크게 떠졌다.
아셀의 아르테스가 점점 비틀어지며 마치 숨을 끊을 듯 움직였기 때문에.
“네. 네놈........!”
설마 진짜로 죽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센의 머릿속을 가득 채워나갔으며 죽음이라는 공포가 머릿속에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그만. 그만하거라 아셀!”
어느새 유론이 사색이 된 표정을 아셀의 손을 부여잡았다.
“지금이라면 신관에게 맡겨 살릴 수 있다. 그리고 몸에 붙은 마족도 떼어낼 수가..”
“차라리 죽여주는 게 낫습니다. 유론님.”
어차피 마족에게 인생을 송두리째 뺏긴 몸. 차라리 죽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은 길임을 진심으로 아셀이 중얼거리자 가센의 몸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주.죽을 순 없어!”
그와 함께 가센의 오른손에 있던 것에서 무언가 툭하고 떨어졌다.
“가센!”
툭 떨어진 무언가. 그리고 실이 끊어진 듯 풀어지는 가센의 몸. 아셀은 그것을 유론에게 넘긴 후 바닥에 떨어진 기괴한 살점을 바라보고는 헛웃음을 지어낼 수밖에 없었다.
“기껏해야 이거였나?”
[몸.. 몸이 필요해...]
기괴한 살점은 놀랍게도 눈과 입을 구현한 구멍들이 있었다.
그곳에서 새어 나오는 마기들. 이것이 그동안 필드가의 아이들의 몸에 기생하며 살아온 마족의 정체임을 아셀은 눈치챌 수 있었다.
[괴로워 괴로워!!]
놈의 비명소리가 사방에 가득 채워지자 기사들마저 움찔거렸다.
“던전메이커 녀석에게 내가 전해줄게.”
[?!]
필드가에 숨겨진 던전을 만들고 이런 녀석을 가문 안에 침투시킬 녀석. 그것은 여명 수도원에 페러사이드를 설치한 던전메이커가 분명했다.
[네가.. 네가 그분을 어떻게?]
씨익 웃으며 건틀릿 부분에 신성력 덩어리를 만들어낸 아셀을 바라보며 놈은 일순간 모든 고통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주인이 세상에 나타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존재를 알고 있는 인간이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으니까.
“네놈은 실패했다고. 그리고.”
쾅!
무언가 말하려고 하는 살점은 아셀의 주먹 한 방에 가루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잡것도 조만간 네 곁으로 보내줄게.”
가루가 되어 버린 놈의 잔해가 신성력의 가루에 휩싸여 사방으로 흩어지는 모습이 나타났다.
손에 먼지 묻은 것 같은 손을 털어낸 아셀을 유론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장남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사하다거나. 고맙다거나. 그런 말 하지 말아주세요.”
머리를 쓸어넘기는 아셀의 손이 미약하게 떨려있었다.
걱정스러움 때문에 떨리던 본신의 몸의 반응이 아니었다. 희열 그리고 고마움. 그것들을 표현하는 것이었기에. 아셀은 그저 피식 웃어 보였다.
“우리 사이에 그런 건 어울리지 않잖아요?”
유론의 등 뒤로 수많은 치료사들이 가센의 가슴에 나 있는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
“... 급소를 일부러 빗겨나가게 한 것이더냐?”
“그냥 우연히 빗겨나간 것뿐입니다.”
“처음부터 가센을 구할 생각이었구나.”
아셀과 같은 경지에 있는 무인이 우연히 급소를 피하며 공격할 리 없었다. 유론의 말에 그저 어깨를 으쓱거리는 아셀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는 것도 잠시.
그는 자신의 앞에 무언가 툭하고 떨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져라.”
“가.가주님!”
“비파... 비파를 그냥 주셔도 되는 겁니까?!”
비파.
필드가의 시조가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검.
아셀은 자신의 앞에 놓인 푸른빛이 감도는 신비로운 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가 감사는...”
“네 것이다. 그만 말하도록.”
더 이상 이야기를 듣기 싫다는 듯 유론은 가센과 아르센을 직접 짊어지며 등을 돌렸다.
발치에는 푸른빛이 도는 비파. 아셀은 비파를 들어 올리자. 거대한 크기에도 불구하고 무게감조차 없는 것 같은 검의 모습에 놀라워할 수밖에 없었다.
‘이걸 줬다 이 말이지...’
비파.
필드가 가주의 상징. 이것을 아셀에게 준 것은 감사의 의미도 있지만, 차기 가주로서 유론이 아셀을 지목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어쩔 수 없겠지.”
아르센은 오른팔이 박살나 무인으로써 삶이 끝이 났고 가센은 마족에게 이용당했었다.
막내가 있긴 했지만, 녀석은 이미 정략결혼을 위해 필드가를 떠나있는 상황.
소거법으로도 아셀 말고는 다른 아들이 가문을 잇는 것은 불가능한 법이었다.
‘귀찮은데.’
필드가의 가주 따위는 되기 싫었다. 애초에 망할 예정인 가문의 가주가 되어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하는 아셀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사들이 직접 사용한 무구는 그런 모든 것을 잊을 만큼 탐이 나는 물건이었다.
아셀이 몇 차례 용사들의 무구를 사용하는 유저들이나 npc들이 얼마나 사기적인지 직접 봤었기 때문에.
한스의 그림자를 불러들여. 눈앞에 비파를 감정안으로 확인해 본 아셀은 씨익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비파]
[전설 등급]
[내구도 143/143]
[공격력 1200/1200]
[오래전 필드가의 시조 에밀이 사용하던 검입니다.]
[바다에 넣어두면 저절로 내구도가 회복됩니다.]
[필드가의 기술을 사용할 시 30% 추가 공격력이 붙습니다.]
[필드가의 일원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현재 경지에 비해 높은 등급의 물건입니다. 사용시 모든 효과들이 반감됩니다.]
“역시.”
“뭐가 역시야?”
“이거 좋아 보이지 않아?”
“쓸만한 거 같네.”
비파를 슬쩍 페레에게 보여주고 아셀은 아무런 고민 없이 사출의 주머니에 그것을 넣어두었다.
‘경지에 맞지 않는 이라.’
게임을 플레이했을 적에도 몇 가지 장비들에 레벨 제한이 붙어 있던 것을 아셀은 기억하고 있었기에.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놀라운 것은 반감이 된 공격력으로 지금의 아르테스보다 높은 것.
내구도가 낮아 자주 사용할 수는 없겠지만, 사기적인 아이템인 것은 분명했다.
“이제 필드가는 아셀 도련님이 이끄는 건가?”
“메이슨 단장 왜 우십니까 근데?”
“눈에 먼지가 들어간 거 같아서 그러네.”
아셀이 떠나간 자리를 필드가의 기사들이 한참을 감동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그 누구도 유론의 결정의 토를 달지 못했다.
타락한 인어들 그리고 방금 기괴한 마족을 사냥했을 때 보여준 아셀의 모습은 차기 가주가 되기 충분했기 때문에. 그가 어떻게 생각하던!
“그런데 드디어 필드가에서도 히어로즈 컵 우승자가 나오는 거 아닙니까?”
히어로즈 컵이라는 말에 몇몇 기사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오랜 세월 용사 가문의 후손들끼리 무용을 겨루는 히어로즈 컵.
지난 300년간 필드가에서는 우승자를 단 한 번도 내지 못했기에. 필드가의 기사들이 아셀을 바라보는 기대감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설마 저러시고 여명 수도원으로 돌아가시는 거 아니시겠죠?”
한 기사가 분위기를 깨듯 중얼거림이 들려오자 메이슨을 포함한 모든 기사들이 노려보았다.
“설마 비파를 받으시고 그냥 가시겠는가!”
“생각이란 걸 하고 말하게 제발!”
“맞아 아메라의 눈물도 가지고 있으신데 설마 가시겠어?”
“그. 그렇겠죠? 하하... 그냥 불안해서 한번 해본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