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달밤의 정원에서
카가가가가강! 망치와 거대한 식칼이 부딪치는 기묘한 소리가 고성 아메라의 정원 안에 울려 퍼졌다.
‘오...’
망치가 거대한 식칼과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점점 마모되고 어딘가 부서지는 것을 아셀은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과 함께 로나니의 손에 들려 있던 거대한 식칼들 또한 부서지는 것은 당연한 법.
하지만, 아셀은 그것들이 빠른 속도로 재생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본체는 거기냐?”
아셀의 중얼거림에 로나니는 경악하듯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본체가 이 두 자리의 검이라는 사실을 단숨에 알아맞힌 아셀의 눈썰미가 믿기지 않았기 때문에.
부서지기 일보 직전인 망치에 미련을 가지지 않고 아셀은 한스 특유의 검은색 마나를 가득 담아 로나니를 향해 던졌다.
‘부서진다.’
그림자 망치질. 심상을 투영하는 그 사기적인 스킬을 구현하기 위해 굳게 다져진 아셀의 마음을 그려내듯 아셀의 망치를 제대로 맞은 로나니는 바닥을 한참 구르는 모습이 나타났다.
“죽어!”
옆에서 아르센이 아셀의 허리를 향해 검을 찌르듯 들어왔다.
필드가 특유의 아쿠아색 마나에 마치 진흙물이 섞이듯 탁한 오러의 모습.
아셀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주먹으로 아르센의 검면을 때렸다.
캉!
검은 마나를 머금고 있던 주먹이 아르센의 탁한 오러와 마주치며 나오는 소리는 마치 성당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와 같았다.
그와 함께 일순간 기우뚱거리는 아르센의 명치를 향해 주먹을 내지르자 아무런 방비도 하지 못한 아르센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모습이 나타났다.
“일단 너는 맞을 게 조금 있지.”
공중에서 내려오기 무섭게.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는 녀석을 아셀이 가만히 내버려 둘리가 없었다.
품 안에서 또 하나의 망치를 꺼내든 아셀이 아르센이 검을 쥐고 있는 오른손을 향해 마치 검을 두들기듯 망치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이 새끼가!”
아르센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으며 그 안에서는 증오와 열등감이 가득 차 있었다.
아쿠아색 마나가 오염된 것처럼 몸 안 어딘가에 마기가 가득 침투되어 나오는 현상인 게 분명한 상황.
마기를 몰아내고 제정신을 차리게 할 방법을 알고 있지만, 아셀은 그러지 않고 무심한 눈으로 아르센의 오른손을 완전히 박살 낼 뿐이었다.
“원망은 하지 마. 네가 했던 일에 비해서 이건.”
캉! 캉! 캉!
마치 쇠를 때리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용사의 후손이라는 강체와 경지가 높은 무인의 신체. 게다가 아셀의 그림자 망치질에 의해 터져 나오는 소리들이 분명했다.
“아무것도 아니니까.”
“으어.....”
아무리 마기에 중독되었다고는 해도 일순간 오른손에 제구실을 못 하게 되면 움직임이 제약되는 법.
검조차 내려놓고 망가져 버린 자신의 오른손을 부여잡고 있는 아르센에게 더 이상 볼일이 없어진 아셀은 이 모든 것을 지켜보기만 하고 있는 가센과 눈을 마주쳤다.
“대단하십니다. 형님.”
“형님이라. 잘도 그런 말을 하네.”
아르테스의 망치 부분을 빙글빙글 돌리며 아셀은 가센을 바라보았다.
“나보다 나이도 많을 텐데 말이지.”
“.... 허어. 당신 도대체 정체가 뭐야?”
가센 아니 가센 안에 기생하고 있던 그것은 진심으로 아셀의 말투에 놀라워할 수밖에 없었다.
금향을 알아차린 것도 그리고 로나니의 본체가 검이라는 사실과 자신의 정체까지 단번에 알아맞힌 것.
신검 말릭이 이 자리에 있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필드가 안에 있는 던전도 눈치채고 설마 미래에서라도 왔나?”
농담식으로 말하는 가센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녀석이 서 있는 자리에 풀들은 모두 죽어가는 것이 아셀의 눈에 들어온 상황.
놈이 무의식적으로 풍기는 마기는 방금 전 허무하게 쓰러진 아르센의 비할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신기하네. 너 같은 건 정말로 처음 보는데 말이지.”
일순간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뽑아낸 가센의 검에서 마기로 물든 검기들이 쏘아졌다.
한 번의 발도술로 보였으나, 그것은 거짓. 순식간에 다섯 개나 되는 마기들이 일제히 아셀을 향해 날아들었다.
‘애초의 용사들 후손 중에 타락하거나 변절한 녀석은....’
없었다. 게임 속에서 유저들에게 갑질과 패악질을 일삼았던 용사 가문이었지만, 그 후손들은 그래도 마족과 연관이 없었으니까.
캉! 캉! 캉! 캉! 캉!
날아오는 검기를 아르테스의 망치 부분으로 단숨에 튕겨내는 아셀의 입가에 호선이 걸리기 시작했다.
‘이래서 이 게임은....’
아셀이 플레이 했을 적에 증명된 사실들이 거짓인 것이 있었고. 유저들이 해결했다고 하는 일들에 숨겨진 내막 같은 것이 수없이 존재하는 것.
‘재미있다니까.’
아르센의 검기 다발을 튕겨낸 아셀은 눈앞까지 달려든 로나니의 거대한 식칼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 즉시 순식간에 투마리스의 그림자를 불러들인 아셀이 불가능한 움직임으로 거대한 식칼을 피한 것과 동시에 녀석의 몸을 향해 몇 개의 단검을 던져 적중시키는 데 성공했다.
“마치 짐승과도 같군요. 그런 움직임을 보여주시는 건 말이죠. 대장장이에 사냥꾼의 기운이라. 피차 숨기는 게 많았나 봅니다.”
오랜 세월 인세에 있었던 존재였기에. 가센의 안에 있는 그것은 아셀의 힘의 근원이 무엇인지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너만 할까.”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있는 채로 아셀은 황금활 기온을 꺼내 들고는 수십 발의 샤인 에로우를 동시에 쏘아냈다.
쾅!
분명 10개의 화살을 쏘았건만, 거대한 소리는 하나밖에 나오지 않은 상황.
신기에 가까운 투마리스의 재능을 아셀이 얼마나 제대로 구현하는지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요란하게 싸웠으니... 필드가는 오늘이 마지막이겠습니다.”
날아오는 샤인 에로우의 거대한 기운을 가센은 그저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놈이 가진 능력과 로나니의 경지로는 절대로 막을 수 없는 기술들.
아셀의 의구심을 해결해주듯 갑자기 가센의 팔 한쪽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더니 거대한 살점들이 마치 방패처럼 만들어지는 것이 아셀의 눈에 들어왔다.
‘저건?!’
콰가가가가강!
거대한 소음은 또 한 번 지축을 흔들었으며, 가센의 손에 있던 거대한 살점들은 터져 나가는 모습이 아셀의 눈에 들어왔다.
그와 함께 바닥에 떨어져 있던 살점들과 피들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빠르게 원래의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하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아셀은 잘 알고 있기에 눈이 가늘게 떠질 수밖에 없었다.
“불가살의 던전. 그건 네가 만든 거였구나.”
아셀의 머릿속에 고통에 비명을 지르던 살덩어리가 떠올랐다.
그 어떤 유저들도 안식을 주지 못하고 계속해서 재생하던 그 거대한 살점이.
“역겨운 새끼.”
그것이 떠오르자 순식간에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뭐 인간의 관점에서는 다른 일이지요. 그나저나 놀랐습니다. 제 팔을 이렇게 순식간에 박살 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말이죠.”
가센은 자신의 오른팔이 재생하는 것이 생각보다 늦은 것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셀의 경지가 생각보다 높음을 증명하는 일이었기에.
‘조금 제압하는 게 시간이 걸리겠네.’
죽이는 것은 가장 마지막 수였다.
아셀이 어떻게 필드가에 숨겨진 던전을 알아차리고 금향의 존재를 알아냈으며 자신들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는지 모두 알아차리고 없애기로 결정했으니까.
“이만...”
점점 모양을 갖추기 시작한 오른팔로 어색하게 검을 들어 올리려던 가센도 잠시.
마치 파도와 같은 무언가의 기운이 막 재생한 가센의 오른팔을 말끔하게 잘라냈다.
“?!”
아무런 기척도 그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자신의 오른팔을 말끔하게 잘라낸 오러블레이드가 나왔건만, 아무런 전조 현상도 없던 것. 이것이 누구의 작품인지 잘 알고 있는 가센의 눈이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설마?”
어둠 속에서 유론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핼쑥했던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그의 몸 안에 가득했던 죽음의 기운들은 사라진 상황.
그가 들고 있는 필드가의 가보 [비파]에 새어 나오는 진한 아쿠아색 오러들이 그가 금향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증명해주는 상황이었다.
“가센 도련님이...”
“마족들에게 먹혔던 것인가!?”
“아니면 원래 마족이었을 수도..”
유론만이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필드가의 모든 기사들이 이 자리에 나타난 것. 아셀은 유론의 옆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페레를 바라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내 아들 가센은 어디에 있나 마물.”
“설마 이거 모두 준비한 겁니까?”
유론의 살길 어린 목소리를 무시한 가센이 아셀을 바라보았다.
이것들을 누가 준비했는지 뻔한 일이었기 때문에.
“내 존재를 모두에게 알리기 위해 이런 말도 안 되는 연극까지 하고 계셨단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게임 속에 마족들 끄나풀은 지능이 낮아.”
가센에게만 들릴 만큼 아셀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페레 유론님에게 가서 독을 해독해줘.
-그거면 돼?
-그러면 알아서 할 거야 아마도.
이곳에 오기 전 아셀은 페레에게 중얼거렸던 말을 떠올렸다.
유론의 독을 치료해주면 그가 아셀을 찾아올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되면 아셀을 노리고 있던 마족을 끄나풀들과 마주칠 가능성은 자연스럽게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하하... 머리 좀 쓰셨습니다. 아셀.”
자신이 당했다는 것을 가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던 녀석은 결국 무능했던 아셀의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신의 방심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림자들..그것이 우리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기억해냈어야 했는데..”
“늦었어 임마.”
어느새 말릭의 그림자를 불러들인 아셀의 온몸에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신성의 갑옷이 생겨났다.
그와 함께 들고 있던 아르테스는 밤을 밝힐 만큼 진한 신성력이 터져 나오는 상황.
가센의 몸 안에 있는 그것보다 경지가 낮은 로나니는 그 모습에 저절로 뒷걸음질 치는 것이 아셀의 눈에 들어왔다.
“얘가 태어난 순간 죽이거나 했어야지.”
“전원 가센을 제압한다.”
아셀의 말과 함께 유론의 명령이 필드가의 기사들에게 울려 퍼졌다.
그의 재능 카리스마를 중명하 듯 믿지 못하던 필드가의 기사들의 표정은 어느새 마족을 사냥할 때나 나오던 그것으로 변하는 상황.
그들의 몸에서 흉흉하게 터져 나오는 살기에 아셀은 눈살을 찌푸리며 유론을 바라보았다.
“끼어들지 마십시오.”
아셀의 말에 유론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이제 아셀은 2년 전 만났을 때와는 비교도 못할 정도로 강해졌을 뿐만 아니라 이번 사건들로 가문 내의 입지가 저절로 올라갔기 때문에.
“유론님과의 인연을 생각해 독을 치료해드린 것뿐입니다. 제 사냥감에 숟가락을 얹으시려는 건 선을 과하게 넘는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선을 넘는다라.. 저것은 아직 구할 수 있는.”
유론의 재능에 부성애. 그것이 일순간 아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구한다는 일에도 댁들은 필요 없을 거 같고.”
말하고 있던 아셀을 향해 거대한 살점으로 이루어진 무언가가 쏘아지기 시작했다.
“애초에 방해만 될 뿐이야.”
그것을 향해 미친 듯이 아르테스를 휘두르든 아셀의 눈이 어느새 차갑게 변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