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변화된 모습
아셀이 아메라에 당분간 머문다는 소식에 필드가의 일원들은 모두 놀라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 머저리가 여기 있는다고?”
“허어... 필드가의 수치가?”
“다들 말조심해. 필드가의 머저리였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말릭 경의 제자라고.”
“내가 듣기로는 여명 수도원에서 빛의 기사라고 불린다는데?”
“그런 이명이 있다고?”
“조금 멋져 보이는 거 같기도 하고..”
대다수가 그저 민폐라는 반응들. 그러나 호레인처럼 아셀이 말릭의 제자였기에. 앞에서 대놓고는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호레인이 내어준 방은 손님용 방이었다. 원래 아셀이 있던 방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
그곳에서 짐을 풀어 넣고 있는 것도 잠시. 아셀은 유론의 상태를 다시 한번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그건 분명....’
페이크 월드에서 갑작스럽게 암살당하거나 급사하는 NPC들이 많았다.
일반적인 NPC들도 있지만, 대다수가 고위직의 NPC들.
갑자기 죽은 그들에 의해 사라진 퀘스트들이 수도 없이 많았기에. 어떤 경우에는 유저들이 퀘스트를 완료하기 위해 NPC의 목숨까지 챙기는 경우가 많았다.
“금향(禁香)이다.”
그중 높은 경지에 있는 무인급 NPC들을 천천히 죽이는 독이있었다.
모든 코어에 구멍을 막아 마나의 움직임을 막아 천천히 죽게하는 독 금향.
대부분이 마족들의 하수인들이 높은 경지에 있는 무인들을 암살하기 위해 사용하는 독이었다.
“중독되었다고만 눈치채면 간단히 없앨 수 있는 독이야.”
중독되었다는 사실만 눈치채기가 어렵지 눈치만 챈다면 마나를 주입하는 것으로 간단히 치료가 될 독이었다.
‘하지만...’
아셀은 유론과 자신의 사이. 그리고 아직 미래에 발견되지도 않은 독을 알고 있는 자신의 상황을 떠올렸다.
‘잘못하다가는 내가 의심받는다.’
동기도 충분했다. 아셀이 유론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이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쥐새끼를 먼저 잡아내야 해....’
유론을 치료하기 앞서. 아셀은 필드가에 숨어있는 마족의 하수인을 잡아야 할 필요성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녀석을 잡아 자신이 의심받을 상황을 만들지 않아야 했기 때문에.
“누구지...”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겨있던 아셀은 필드가의 모든 사용인들의 얼굴과 다른 형제들을 떠올렸지만, 모두 미래에 자신이 알고 있는 하수인들이 아니었다.
‘용사가문 안에 마족들의 하수인이라....’
다른 용사 가문에도 마족들의 하수인들이 오랜 세월 존재해있었다.
그중 대다수는 미래에 용사 가문의 생존자들에게 죽임을 당했던 것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어렵구만...”
넘실거리는 파도들을 바라보며 아셀은 턱을 쓰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
아셀이 필드가에 도착하고 다음 날.
페루가와의 협상을 위해 나가 있던 아르센이 협상도 내버려 두고 황급히 고성 아메라로 돌아왔다.
“이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호오 그런데 꼴에 여자는 데리고 왔네?”
2년.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형제는 아셀을 발견하자마자 욕설부터 지껄였다.
심지어 페레를 바라보며 대놓고 욕정을 드러내 보이는 표정까지.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던 아셀은 그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었다.
“머저리 아셀 이곳은 네가 있을 곳이...”
“그 머저리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던 너는 뭐지? 병신인가?”
아셀의 무미건조한 말에 아르센은 얼굴이 급격하게 붉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내가 어려서..”
“그럼 다시 덤비던가. 사내새끼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근처에 있던 목검을 녀석을 향해 던지자. 아르센은 기다렸다는 듯 씨익 웃어 보였다.
“이전과 똑같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걸음걸이에서부터 아르센이 2년 전보다 강해진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녀석의 자신감이 어디에서 나온지 조금 눈치챌 수도 있는 상황.
잠시 자존심이 하늘까지 오른 녀석을 어떻게 뭉개줄까 고민하고 있던 아셀은 씨익 웃으며 목검을 빙글빙글 돌려보았다.
‘이번에는 진짜로 오른팔을 부러뜨려야겠어.’
다시는 저런 식으로 덤비지 못하게. 예의를 주입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형님. 이런 곳에 힘을 쓰지 마십시오.”
아르센이 목검에 푸른 검기를 불어넣으며 아셀을 향해 달려오려는 것도 잠시.
셋째 가센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하지만.. 저것이 나를..”
“형님..”
가센의 가슴밖에 오지 않는 키. 장신이 특징인 필드가 치고는 작은 키의 가센이 넌지시 말하자 아르센이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아셀의 눈에 들어왔다.
‘이건 조금 흥미로운데?’
자존심 강하고 독선적인 아르센이 셋째의 말을 듣는 것. 분명 2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것임을 아셀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 너 운 좋은 줄 알아라.”
바닥에 목검을 버려두고 뒤돌아 사라지는 아르센의 모습에 아셀은 그저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오랜만입니다. 말릭경은 잘 지내시는지요.”
가센 또한 아셀을 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오직 관심은 말릭뿐. 그런 녀석을 무시하며 아셀은 다시 검을 휘두르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째서 다시 돌아오신지는 모르겠지만, 설마 장남의 신분으로 가주 자리를 노리시러 온 거라면 정말 실망할 겁니다.”
“너도 혹시 병신이니?”
아셀은 진심을 담아 가센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니었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너도 대단하다. 내가 다 망해가는 가문 얻어서 뭐 하겠다고.”
“필드가는 망해가고 있지 않습니다.”
“이상하네. 너도 그렇고 방금 있던 아르센도 그렇고 뭐 하나 말아먹기 좋아 보여서 그렇게 말한 건데 아닌가?”
시종일관 무표정을 유지하던 가센에게 아셀이 히죽 웃어 보이며 말하자 녀석은 잠시 얼굴을 찡그리는 것이 아셀의 눈에 들어왔다.
“흐음.. 맞는 거 같으니까. 이제 꺼져 줄래?”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가센을 무시하며 아셀이 다시금 검을 휘두르기 시작하자. 녀석은 잠시동안 아셀이 검을 휘두르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사라졌다.
그 뒤로. 아르센이 돌아온 것을 기다렸다는 듯 필드가의 기사들이 아셀에게 찾아오기 시작했다.
“말릭 경께 어떤 것을 배웠는지 한번 보고 싶습니다.”
“한수 가르침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와 검을 나눠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모두가 아셀을 때려눕혀 차기 가주로 가능성이 높은 아르센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것들.
아셀은 그런 기사들이 올 때마다 씨익 웃어 보였다.
“이거이거 이 몸이 인기가 많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군.”
모든 기사들이 아셀과 아르센의 2년 전 결투를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덤비는 것은 2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성장에 한계치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
자신들이 아셀보다 강함을 이미 알고 있기에 덤벼든 그들에게 아셀은 한스의 그림자를 불러들이며 자비라는 것을 보이지 않았다.
“어.. 어! 자.잠시만요. 도련님!”
“누가 도련님이래?”
캉! 결투라고 보기에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자신들의 애병이 아셀의 망치에 모두 두 동강 난 것과 동시에 사정없이 망치로 기사들의 머리를 내려치는 모습은 누가 보아도 농락 그 자체였기 때문에.
‘생각보다 강한 거 같은데..’
‘우리 수준이 절대로 아니야.’
‘그런데 사람 머리에서 저런 소리가 나나?’
‘아니, 것보다 어째서 저렇게 맞는데도 기절 한번 안 하는 거냐고!’
아셀에게 덤벼들었던 일반 기사들 모두가 사정없이 머리에 망치질을 당했다.
놀랍게도 그들 중 죽은 사람도 기절한 사람들도 없이 아셀만 바라보면 저절로 뒷걸음질 치게 만드는 거대한 고통을 주는 것.
사정이 이렇다 보니 평기사들 말고도 조장급의 기사들까지 아셀에게 대련을 신청하는 일이 벌어졌다.
“가주님 말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집사 호레인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유론을 바라보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그의 오랜 주인은 수척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2m 정도군.”
“예?”
창밖에서 시선을 뗀 유론의 입가에 어느새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져 있었다.
“아셀이 방금 날려버린 2번대 조장 파쿠라가 날아간 거리 말일세.”
“가주님.”
“세상일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오늘 하루에만 벌써 조장급 기사 3명을 날려버린 아셀을 발견한 유론은 병세가 잊혀질 지경이었다.
“바다의 품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으니. 모든 걱정들을 바다가 해결해주려고 하는구만.”
“제가 어떻게든 방도를 찾아볼 겁니다.”
“되었네. 주교급 신관들도 고치지 못하는 병이니 불치라고 불릴만하네.”
아셀을 바라보는 기사들의 시선이 어느새 변해 있음을 유론은 발견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때 너를 다른 곳에 보내려고 했던 것이 정답이었구나...’
둘째 아르센이 아셀을 노예로 팔아버리려고 했던 사건을 유론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내버려 둔 것은 노예로 팔려간 아셀을 다른 왕국의 귀족 양자로 보낼 계획을 세워두었기 때문.
어려서부터 필드가의 이름에 알맞지 않은 아이였기에 평범한 인생을 살기 바란 유론의 바람이었다.
‘이제야 정말로 안심을 할 수 있게 되었소. 부인.’
문득 죽은 부인의 얼굴이 유론의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무의 재능이 없던 아셀의 미래를 같이 걱정하고 매일 눈물을 흘렸던 본처 로즈가.
“가주님. 일단 두 가지 알려드릴 게 있습니다.”
“말하게”
이번에는 대장급 기사가 나서는 모습을 보고 있던 유론은 더 이상 아셀의 모습을 지켜보지 못함에 아쉬운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페루가에서 최후통첩을 보내왔습니다.”
“웃긴 녀석들이군. 뒷배가 있는 것인가?”
자신의 장남을 반병신으로 만든 필드가의 일원을 내놓으라는 페루가 가주의 억지 주장이 다시 한번 떠오르자 유론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아무리 조사를 해봐도. 페루가가 최근에 동맹을 맺었다는 가문이 없습니다.”
“흐음... 그런가.이제는 놈들의 억지가 진짜라고 느껴질 지경이군.”
턱을 쓰다듬으며 유론은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내가 죽어간다고 하지만.’
균형.
대륙을 좌지우지하는 거대한 가문들끼리 균형이 무너지는 것은 다른 용사 가문에서도 원하지 않는 법.
만약 필드가에서 페루가의 공격에 멸문할 위기가 찾아온다면 다른 용사가문에서 중재가 들어올 것이 분명했다.
“또 다른 것은 무엇인가.”
“오늘 아침 메이든 단장이 보내온 서신입니다.”
필드가의 기사단장이자 오랜 세월 유론의 심복이었던 메이든.
그가 보내온 보고서를 바라보던 유론의 눈빛이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이거.. 무언가 불길한 느낌이 드는군. 처음 보는 몬스터라니.”
아메라 근처에 몬스터는 전혀 없었다.
대륙의 거대한 가문에 터를 잡고 사는 몬스터는 없었기 때문에.
가끔 길을 잃고 바다에서 흘러들어오는 몬스터는 있을지는 몰라도.
그랬기에. 갑자기 처음 보는 몬스터들이 나타났다는 보고는 유론의 직감을 무언가 건드리기 충분했다.
“아니지. 성 앞에 던전도 있으니 이건 놀라운 일이 아닌가. 그나저나.. 이건 대체 무슨..”
보고서에 담겨 있는 내용.
새로 발견된 몬스터는 검은 비닐을 가진 인어와 같은 모습이었다고 했기에.
유론은 눈을 껌뻑이며 보고서를 다시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인어들을 닮은 몬스터라도 나온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