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다시금 집으로
“...이렇게 된 겁니다.”
빙하 위에서 아셀은 사로잡은 레드 스컬 용병에게서 필드가의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흐음...”
아셀이 기억하는 용사 가문들은 마족들에 의해 한꺼번에 멸족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대륙을 좌지우지하는 가문들이었기에 아셀의 기억 속에 제대로 남은 것.
‘유론은 지금 죽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아셀은 게임 속에서 필드가의 영지가 있는 장소에 존재하던 아메라의 비명 소리 던전이 떠올랐다,
거대한 살점으로 이루어져 죽지 않고 비명만 지르던 그 생명체가.
‘무언가 개입했군.’
더 물어보니 필드가와 페루가의 사이가 극심하게 나빠졌다는 몇 가지 이야기를 아셀은 들을 수가 있었다.
“저기 그럼...”
잠시 아셀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모습에 살수도 있다는 희망을 느낀 용병에게 아셀은 무심하게 녀석의 목에 검을 꽂아 넣을 뿐이었다.
“어째..서..”
허망한 듯 두 눈을 부릅뜨며 죽은 용병의 몸 위로 붉은색 해골 연기가 피어올랐다.
“사람을 많이 죽여본 적이 없어?”
페레가 아셀의 떨고 있는 손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 이 새끼가.’
페레의 말에 대답해주기 전에 아셀은 자신의 손을 떨게 한 본래의 아셀의 몸에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자신을 학대했다고 하지만, 아버지 유론이 죽어간다는 이야기에 녀석이 걱정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착해빠진 새끼.’
고개를 절레절레 털어내며 아셀은 상념을 지워냈다.
애초에 필드가야 망하든 말든 상관없는 일.
게다가 아셀은 용사 가문들이 마족들에 손에 멸망하는 게 더 이득일 거라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저기...”
“우선 마을에 가자.”
떨리는 손이 진정되지 않았다.
지금은 무려 말릭의 그림자를 불러들이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경지가 낮은 몬스터를 사냥할 때는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자신과 별로 격차가 나지 않는 녀석과 싸우던가 몬스터와 싸우면 큰 문제들이 될 게 분명했다.
‘짜식.. 운 좋은 줄 알아라. 미안하기도 하니까.’
아셀이 필드가로 향하기 위해 결심하자 손 떨림이 멈추었다.
본래의 몸이 안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상황. 아셀은 자신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페레의 시선을 무시하며 가까운 마을을 향해 걸어갔다.
‘딱히 필드가를 위해서가 아니야.’
이런 재능을 부여해 본래의 아셀의 몸을 힘들게 한 것.
그리고 손이 계속 떨려 앞으로의 불편함을 없애기 위한 것.
두가지가 아셀을 필드가로 향하게 만들었다.
“생각보다 화려하게 저질렀는데?”
투드란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인 [아이스 월]
아셀은 그곳에서 용병들이 전해준 것보다 최신의 정보들을 얻어낼 수 있었다.
‘필드가와 페루가의 전면전이라...’
마을에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이랬다.
페루가의 장남이 필드가의 어떤 일원에게 맞아 팔다리가 박살이 난 것에서부터 필드가와 페루가의 갈등이 시작된 것.
이것을 항의하러 페루가의 가주가 직접 필드가에 찾아갔지만, 모른척하는 모습에 결국 전면전을 결심했다는 이야기였다.
“우선 필드가에 가봐야겠네.”
잠시 긴 한숨을 내쉬며 아셀은 필드가로 가는 워프게이트로 향했다.
***
필드가가 있는 해안가에는 워프 게이트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아셀은 워프 게이트에서 내려 마차로 아메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뭐가?”
“긴장한 거 같아서.”
덜컹거리는 마차에서 페레의 걱정스러워 하는 시선을 바라보며 그는 그저 피식 웃어 보였다.
“내가 긴장한 거 아니야.”
“네가 긴장하는 게 아니면 누가 긴장한 건데.”
“또 다른 내가?”
농담식으로 말한 아셀을 바라보며 페레가 진심으로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아셀은 그저 헛기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쟤는 시종일관 무표정인데..’
어째서인지 아셀만은 페레의 무표정 속에서 다른 표정들을 읽어낼 수 있었다.
‘아마도 파티 효과의 결과인가?’
그것들 모두가 파티를 맺은 것에서 오는 것들이라 생각한 아셀이 잠시 창문으로 보이는 파도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잠시.
그는 드디어 필드가의 고성 아메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좋은 곳이네.”
고성 아메라와 넘실거리는 파도들.
페레가 진심으로 이곳을 좋다고 말했지만, 아셀은 그저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고성 아메라로 올라가는 길. 아셀을 발견한 몇몇 필드가의 사용인들과 기사들이 믿기지 않는 듯 두 눈을 크게 뜨는 모습들을 아셀은 발견할 수 있었다.
‘분위기가..’
칙칙했다. 분명 유론의 병세 때문에 이런 분위기가 형성된 것을 아셀은 알 수 있었다.
“다들 이상하게 쳐다보는데?”
“네가 너무 예뻐서 저렇게 쳐다보는 거야.”
“어..어?”
당연하게도 아무도 아셀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모두가 놀랍다는 시선으로 바라볼 뿐. 몇몇은 쟤가 어째서 여기에 온 거지 하는 표정까지 대놓고 지어 보이는 게 아셀의 시선에 들어왔다.
“아.아셀 도련님?!”
“맙소사. 이곳에서 나를 도련님이라 불러주는 사람이 또 있다니 놀랍구만.”
지난번 말릭과 함께 왔을 때 유론에게 안내해 주었던 노집사.
아셀의 비아냥거림에도 그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아셀을 바라보았다.
“여기 오시면 큰일 납니다. 어서 돌아가십시오.”
“큰일은 무슨. 여기서 나한테 해를 끼칠만한 녀석이...”
잠시 주변을 둘러보며 히죽 웃어 보인 아셀이 대놓고 자신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기사들과 시선을 마주쳤다.
“아무도 없는 거 같은데?”
“도련님.. 그게 아니라 아르센 도련님께서..”
속삭이듯 말하는 집사를 무시하며 아셀은 그저 앞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아버지 아니 유론님한테 갈 거야 안내해.”
“아....”
필드가의 집사장 호레인은 진심으로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머저리 필드가의 장남 아셀이 바뀐 것은 2년 전 발견한 상황. 그 일이 있은 이후 2년 이 지난 지금 갑자기 찾아와 아버지를 만나겠다는데 막을 명분이 없었기 때문에.
‘게다가 예전의 도련님이 아니다.’
필드가에 있을 적에는 아셀에게 절대로 도련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던 호레인이었다.
하지만 말릭의 제자가 된 지금 아셀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는 것도 이상한 상황.
필드가에 돌아온 아셀은 다른 기사들이 바라만 보는 것도 그가 머저리 아셀이 아닌 말릭의 제자 아셀로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뭐해?”
“... 가주님은 응접실에 계십니다.”
“생각보다 상태가 괜찮은가 봐?”
병상이 아닌 응접실에 있다는 말에 아셀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호레인은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직접 보시면 아실 겁니다.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페레에게 관심을 보이는 호레인을 무시하며 아셀은 고성 아메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게 나을 수도 있다. 지금 아르센 도련님이 부재중이 시니까.’
2년 전 아셀에게 굴욕을 당한 아르센이 독기를 품으며 수련하는 것은 필드가의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아셀 또한 아버지 유론의 상태만 확인하고 이곳을 떠날 것임이 분명했기에. 호레인은 별다른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크흡....도련님 우선 저를 따라오시지요.”
앞서가는 아셀 앞을 황급히 막아선 호레인이 근처 시종들 몇에게 무언가 지시를 하는 것도 잠시.
아셀은 고성 아메라의 분위기를 흥미로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전면전을 치른다고 하더니.’
페루가와의 일전을 준비하는 것이 헛소문이 아니라는 듯. 기사들은 평상복 위에 투구를 포함한 갑옷을 입고 있었으며 성 곳곳에는 농성을 위한 준비들이 되어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들어가시면 될 겁니다. 혹시 무언가 필요하신 게 있으신지요?”
거대한 응접실의 문을 열어주며 말하는 호레인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도 잠시.
활짝 열린 응접실의 문에서 아셀은 2년 전과 다르게 수척해진 유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허어.....’
수척해진 유론의 옆에는 필드가의 가주의 상징인 푸른빛의 검 [비파]가 세워져 있었다.
평상복이 아닌 갑옷을 입고 있는 유론. 페루가와의 항전을 위해 준비한 모습으로 보였지만, 아셀은 그것이 자신이 약해짐을 가리고 있음을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 분명 이곳에 다시 오지 않을 거라 말하지 않았더냐?”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던 중 침묵을 깨고 유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니면 혼인에 대한 승낙을 받으러 온 것이더냐?”
페루를 슬그머니 바라본 유론의 눈빛에 처음 보는 빛이 새어 나온 것을 아셀은 발견할 수 있었다.
“페레라고 합니다. 위대한 파도의 주인이시여.”
“음?”
한 치의 흔들림 없는 자연스러운 예법. 페레의 인사를 바라본 아셀과 유론은 잠시 침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200년 전에나 할 옛사람들의 인사였으니까.
“제 얼굴에 뭐가 묻었는지요?”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아셀과 유론의 시선에 무표정한 얼굴로 페레는 진심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그냥 저 아저씨가 원래 저래. 그나저나...”
가까이 유론에게 다가간 아셀은 그에게서 풍기는 죽음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말릭의 호적수라 불린 유론이 병으로 죽어가는 것이 확실했다.
‘진정해 아셀... 너를 학대했던 사람이다.’
아셀 본인의 몸이 유론의 상태를 확인하면 할수록 괴로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저씨라.. 이제는 아비라고도 부르지 않기로 했나 보구나.”
“원래 그런 사이 아니었습니까. 필드가의 가주님.”
“조금 강해졌다고.. 네놈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제대로 못 알아보는 게냐?”
“이상하군요. 저는 분명 필드가의 가주님이라고 말씀드린 거 같은데요?”
‘이건....’
가까이에서 바라본 유론의 상태는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것은 10성 무인의 강체와 용사의 후손으로서 축복받은 육체 덕분인 게 분명했다.
“우둔한 놈. 그래서 여긴 왜 온 것이더냐?”
아셀을 바라보는 유론의 눈빛에서 이번에도 무언가 스쳐지나갔다.
그것이 안도감. 대견함. 그리고 놀라움 세 가지가 합쳐진 것이라는 것을 아셀은 전혀 눈치채지도 짐작도 하지 못했다.
“이 몸이 죽어가는 것을 비웃을 거라면 지금 당장하고 가는 게 좋겠구나. 얼마 후면 네 동생들이 너를 죽이려고 이곳에 올 테니까 말이야.”
“성격이 정말로 꼬여있으시군요. 그럴 생각도 없었는데 말이죠. 그리고 사랑하는 제 동생이 과연 저를 죽일 수 있겠습니까?”
근처에 있는 자리에 앉으며 아셀이 피식 웃어 보이자 유론은 아무런 말도 없이 자신의 장남을 바라보았다.
‘불가능하겠군.’
지난 2년간 독기 어린 눈으로 수련에만 매진해온 아르센의 경지가 많이 올랐다고 하지만, 지금 눈앞의 아셀의 경지에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 무슨 수련을 했더나.”
무인으로서 아비로서 호기심에 물은 유론의 말에 아셀은 그저 어깨를 으쓱거렸다.
“잘 먹고 잘 쉬었습니다.”
“말해줄 생각이 없나 보구나.”
“굳이 말해드릴 일도 없죠.”
‘진정해 이 녀석아.’
시종일관 비딱하게 말하는 아셀과 다르게 본래의 아셀은 지금도 유론을 너무나 걱정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가거라. 네놈에게 흥미도 없었지만, 방금 생긴 작은 흥미도 사라졌으니까.”
“본래는 그러려고 했는데 말이죠..”
아메라의 눈물을 만지작거리며 아셀은 눈앞에 있는 유론을 바라보았다.
“잠깐 여기에 있어야 할 거 같군요.”
필드가에 남겠다는 아셀의 말에 유론은 진심으로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장남을 바라보았다.
“그냥 변덕이라 생각해주세요. 너무 신경도 쓰지 마시고요.”
‘내가 살려볼 테니까 진정해. 아셀.’
가까에서 바라본 유론의 상태. 아셀은 어째서 유론이 죽어가고 있는지 눈치를 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