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퀴리
순식간에 아셀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가 달라진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퀴리 저것이 아셀이 무언가 결심한 것을 눈치채고 막아서려고 하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무의미한 짓이다.]
대검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빠른 속도로 피의 대검이 내려치기 시작했다.
‘사각은 없다.’
자신의 손에 짓눌려 터져 죽을 아셀의 모습을 그리고 있던 퀴리가 피의 대검들이 내는 거대한 파공음이 들리기를 기다리는 것도 잠시.
그의 귀에 무언가 거대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새벽의 종?]
거대한 종이 하늘에 나타나 댕댕 울리며 피의 대검들의 공격을 모두 막아내는 것이 퀴리의 눈에 들어왔다.
[여명 수도원의 물건을 네가 어찌?]
그림자들인 녀석이 어떻게 여명 수도원의 물건을 가지고 있는지 퀴리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하기 전에 퀴리는 자신의 피의 대검들을 빠르게 회수해야 함을 먼저 깨달았다.
‘회수하면 그만이다.’
힘을 비트는 과정에서 제이든의 몸은 또 한 번 부서질 게 분명했지만, 어차피 이제는 남아 있는 신체의 부위도 얼마 없는 상황.
역으로 비틀어댄 기운들에 의해 두 개의 피의 대검은 온전한 상태로 회수하는 데 성공했다.
“흐읍.”
크게 숨을 들이쉬며 아셀은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신성의 갑옷은 그 어느 때보다 신성함을 풍기며 빛을 내는 상황.
스승 말릭이 그랬던 것처럼 여신에 대한 믿음을 계속해서 끌어올리며 마족과 싸우겠다는 의지를 제대로 투영시킨 결과였다.
[발악이다.]
후드득. 제이든의 얼굴이 점점 부서지는 것과 동시에 남아 있는 피의 대검들이 쏘아졌다.
‘새벽의 종은 단 한 번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긴 세월 동안 성기사들과 싸워왔던 퀴리가 새벽의 종의 능력을 알고 있는 것은 당연한 법.
더 이상 아셀이 자신의 대검을 방어할 수단이 없는 것을 알아차린 퀴리는 자신의 승리를 장담했다.
쾅! 대포가 수백 개 동시에 터진 것 같은 거대한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뭐라?]
거대한 소리가 나온 곳. 그것이 아셀이 빌딩만 한 검강으로 자신의 피의 대검을 받아낸 것에서 나온 소리임을 깨달은 퀴리가 믿기 힘들다는 눈으로 아셀의 돌진을 바라보았다.
[네놈 그걸 어떻게?]
불가능했다. 지금의 눈앞에 있는 아셀의 경지로는 퀴리의 대검을 받아내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
그럼에도 아셀은 이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바로 자신의 팔을 희생해서.
“네놈도 하는 거야.”
양팔의 뼈들이 박살 나고 인대가 늘어난 것이 느껴졌다. 이 거대한 대검을 막아내기 위해 자신의 팔을 희생한 것.
퀴리가 제이든의 신체를 폭발시키며 놀라운 위력을 내는 것에 성공하듯. 아셀 또한 자신의 팔에 느껴지는 고통을 무시하며 검을 휘둘렀기에.
단 한 번. 퀴리의 피의 대검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 봤자.’
자신에게 남은 피의 대검은 또 하나 있었기에. 두 팔을 축 늘어 트리며 달려오는 아셀을 바라보는 퀴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건 어쩔 수 없을 거다.]
다시 한번 거대한 파공음을 내며 퀴리의 피의 대검이 쏘아졌다.
진한 신성력들과 말라각의 국에서 나오는 하급 힐이 아셀의 팔을 빠른 속도로 회복시켜주고 있었지만, 팔은 제대로 들어 올리지도 못하는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셀은 씨익 웃으며 또 하나의 그림자를 불러들였다.
‘한스.’
대장장이 한스의 그림자가 나오는 것과 동시에 순식간에 아셀의 몸에 있던 신성의 갑옷이 사라졌다.
신성의 갑옷이 사라지며 사방에 흩날리는 신성력들. 그것은 일순간이지만 퀴리의 시야에서 아셀이 사라지게 만들기 충분했다.
[?!]
퀴리는 자신의 피의 대검이 허공을 갈랐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어떻게...]
문득. 퀴리는 자신의 등 뒤에서 거대한 한기들이 느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기를 따라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린 그곳에. 퀴리는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손을 들어 올리고 있는 아셀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도 네 능력이더냐?]
그림자 잡기를 사용하는 것으로 모든 그림자 재단의 능력이 끝이 났다.
지금 있는 것은 퀴리의 눈조차 마주칠 수 없는 겁쟁이 아셀 뿐. 그러나 그는 입술을 깨물며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자신의 몸을 지탱했다.
‘제발..제발....제발!’
간절함이 구현되듯. 아셀의 오른팔이 퀴리의 몸에 닿았다.
[뭐 하는?]
순간. 퀴리는 아셀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한기의 정체를 단숨에 눈치챌 수 있었다.
그의 오른손에 있는 문신에서 마치 그 옛날 수많은 마족들을 단숨에 얼어붙게 한 백룡들의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에.
[이 몸을 봉인하려는 건가?]
아무런 두려움도 걱정도 없는 느긋함으로 퀴리는 아셀을 내려다보았다.
오히려 표정에는 자신을 어떤 식으로 봉인할지에 대한 흥미로움 뿐.
[그 떨리는 손... 그래 이게 원래 그대의 모습이로군.]
“시..시..시끄러워.”
말을 해낸 것이 기적에 가까웠다.
‘발동되라!’
그 어떤 그림자를 불러들이지도 않고 무언가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아셀은 자신의 손에서 점점 빛나는 봉인식이 제대로 발동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천빙화우를 사용하시겠습니까?]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음에 아셀은 자신이 봉인을 제대로 성공시킨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사용한다.”
[누구에게 말하는..]
순간 퀴리는 자신의 몸에서부터 피어오르는 얼음 모양의 꽃들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정령?’
정령의 기운과 또 하나 마법의 기운이 합쳐져 있었다.
그 이질적인 기운들이 점점 자신의 몸에 퍼지는 것을 퀴리는 황홀하다는 듯 바라볼 뿐이었다.
[아름답도다..]
계속해서 피어나는 얼음의 꽃. 그것들이 점점 퀴리의 몸을 뒤덥는 것과 동시에 순식간에 수천 개의 얼음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성공했다!’
본래는 얼음 마녀에게 사용했을 봉인식. 아무리 퀴리라고 하지만, 당분간은 저 봉인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심지어 다른 마족들이 해제하러 온다고 해도 몇 년간은 해제 방법을 찾지 못할 것임을 아셀은 장담할 수 있었다.
-이건 나도 해제하는데 조금 걸릴 거 같네.
-쿠이가님도 말입니까?
-우리가 만든 봉인이지만, 이건 눈과 같네. 하늘에서 수많은 눈들이 내리지만 그것들 모두의 모양이 다르듯. 이 봉인 또한 계속해서 개변하거든.
쿠이가의 말대로였다. 퀴리의 몸을 뒤덮고 있는 수천 개의 얼음꽃들.
그것들 하나하나가 서로 다른 봉인들이었기에.
저것을 풀려면 무려 수천 개의 봉인을 동시에 풀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잠시 쉬는 것도 괜찮지. 훌륭하다.]
진심으로 아셀에게 칭찬하는 퀴리의 면전에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려 보인 아셀은 그 상태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블러드 퀴리?!’
그와 함께 아셀은 자신의 눈앞에 떨어진 핏빛과도 같은 지팡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잠시 그대에게 주지. 언젠가 내가 다시 찾아가....]
퀴리는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그의 얼굴까지 얼음의 꽃들이 피어올랐기 때문에.
얼음의 꽃들 속에 퀴리는 봉인되었다. 수천 개의 아름다운 꽃들 속에 무언가 살점들만 있는 기괴한 모습.
아셀은 긴장감이 풀린 나머지 기절할뻔한 자신을 억지로 부여잡으며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쓰러져서는 안 돼!’
퀴리라는 거물을 봉인시키는 데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아셀을 위협하는 존재들이 근처에 남아 있었다.
똑. 똑. 기어가듯 걸어가던 아셀의 이마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주변에 있던 얼음들이 녹아내리기 시작한 것, 얼음 마녀의 봉인이 완벽하게 풀려나고 있다는 증거였다.
‘얼음 마녀...’
봉인에서 풀려난 얼음 마녀가 아직 남아 있었다. 게다가 리쿠아와 코코라 또한 아직 죽지 않고 쓰러져 있는 상황.
아셀은 얼음 마녀만이라도 어떻게든 제거한 다음에 이곳을 나가 스킬 쿨타임을 기다려야만 했다.
‘분명 제대로 된 상태가 아닐 거다.’
오랜 세월 봉인되었기에. 제대로 된 상태가 아닐 게 분명했다.
아셀에게 제거 퀘스트가 나온 것과 경지가 낮은 리쿠아나 제이든을 이번 임무에 보낸 퀴리의 생각이 그것을 증명해주었으니까.
“흐읍.....”
분명 근처에 있건만, 아셀은 얼음 마녀와의 봉인과의 거리는 한참이라도 남은 것 같았다.
그럼에도 크게 숨을 들이쉬며 블러드 퀴리에 몸을 의지하며 힘겹게 걸어 나가던 아셀은 드디어 얼음 마녀가 봉인되어 있던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찌르기만 하면 돼.’
지팡이 주제에 끝부분이 그 어떤 창들보다 날카로운 블러드 퀴리였다.
이것을 이용해 얼음 마녀의 심장을 찌르기만 하면 앞으로 대륙에 닥칠 거대한 위협 중 하나를 막아낼 수 있는 상황.
아셀은 두 동강 난 거대한 얼음 덩어리와 마치 제단과도 같은 곳에 누워있는 얼음 마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제단 위에 놓여있는 얼음 마녀는 아셀이 기억하는 성인의 모습이 아닌 10대 소녀라고 불릴만한 모습이었다
창백한 피부는 그 어떤 엘프들과 뱀파이어들보다 백색이었으며 백금발의 머리는 이런 그녀의 분위기를 더욱 신비롭게 만들어주었다.
‘마무리를.’
떨리는 손으로 블러드 퀴리를 들어 올린 아셀이 눈앞에 얼음 마녀의 심장에 내려치려는 것도 잠시.
갑자기 제단에 누워있던 얼음 마녀의 두 눈이 번쩍하며 떠졌다.
“..루카스?”
“허업!”
겁쟁이라는 재능이 이때만큼 원망스러운 적은 없었다.
아셀의 마음가 다르게 얼음 마녀의 중얼거림을 듣자마자 본래의 아셀은 겁을 먹어 버리고 뒤로 나자빠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루카스 네가... 아니야. 너는 누구?”
어느새 재단에서 일어난 얼음 마녀의 주변으로 수많은 기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뭐야. 너?”
신기하다는 듯 얼음 마녀는 아셀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볼을 만져 보기도 그리고 심지어는 아셀의 냄새마저 맡는 것. 한참을 그런 모습을 보이던 얼음 마녀는 아셀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게서 루카스의 기운이 느껴져.”
‘루카스 그건 또 누구지?’
겁먹은 몸과 다르게 아셀은 지금 상황을 빠르게 분석하기 시작했다.
페이크 월드에서 NPC들의 말 하나하나가 앞으로의 단서가 될 수 있는 상황.
난생처음 보는 얼음마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서 옛 지인과 익숙함이 느껴진다는 이야기.
빠르게 머리를 굴려보던 아셀은 단 하나의 가능성이 떠올랐다.
‘만년설이꽃. 그래 녀석이 루카스였구나.’
글라스트 마운틴에서 찾은 만년설이꽃. 그리고 그것을 들고 있던 얼어붙어 있던 남자의 시체.
아셀은 그것이 얼음 마녀가 말하는 루카스라는 사람이라는 것을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잘하면..’
자신을 바라보며 흥미로움을 느끼는 얼음 마녀를 바라보며 아셀은 이 기회를 살려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임을 알아차렸다.
“뭐지? 너는 어째서 루카스의 기운이.. 그리고 나는 어째서 여기에..”
“구.궁금해?”
살고자 하는 의지가 아셀의 입을 얼음 마녀 앞에서 열리도록 만들었다.
‘얼음 마녀도 기억이 온전하지 않다.’
퀴리가 리쿠아 같은 경지가 낮은 자식을 이곳에 보낸 것이 아셀은 단숨에 이해가 되었다.
‘분명 퀴리의 자식들이 가지는 수많은 이능 중에 리쿠아는 기억과 관련된 능력이 있는 게 분명해. 게다가 코코라 그 말도 안 되는 재생능력은 얼음 마녀의 힘을 되찾게 한 거고.’
기억이 온전하지 않은 얼음 마녀의 기억을 되찾게 만들고 예전과 같은 거대한 기운을 다시금 부여해주는 것.
그것이 리쿠아와 코코라가 이곳으로 보내진 이유임을 아셀은 단숨에 눈치챌 수 있었다.
“궁금해. 알려주면 안 될까?”
얼음마녀의 떨리는 눈빛을 바라보며 아셀이 속으로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잘하면 퀘스트를 둘 다 이룰 수 있겠어.’
얼음 마녀를 발견하고 나타난 퀘스트들. 아셀은 그것들 두 개를 어쩌면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