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이변
박살 나기 시작한 얼음들. 그리고 아셀은 그안에 있는 어린 소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소녀?’
기억에 있던 모습이 아니었다.
아셀이 직접 상대했었고 경험해본 얼음 마녀는 분명 성인 여성이었기 때문에.
“까하하하하 이거 어떻게 해요? 마녀님이 깨어난 거 같은데?!”
프린 펭의 봉인 생각보다 빠르게 풀려났는지 뒤에서 리쿠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금 봉인을..”
뒤돌아보지 않고 리쿠아가 있는 곳에 정령들로 공격을 퍼부었던 아셀은 자신의 손목에 있는 문신을 바라보았다.
다시금 봉인하기에 늦지 않은 상황.
그가 쿠이가와 함께 만든 봉인에 마나를 불어넣으려고 할 때였다.
[얼음 마녀의 친구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봉인이 풀려난 얼음 마녀와의 친분을 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보상: 얼음 마녀의 신뢰.]
[얼음 마녀 토벌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봉인에서 풀린 얼음 마녀를 토벌해 대륙을 구해낼 수 있습니다.]
[보상1: 얼음 마녀가 쌓아 올린 마나 10%]
[보상2: 대륙에서 용사 칭호 획득.]
“?!”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에 아셀의 눈이 껌뻑일 수밖에 없었다.
‘퀘스트가..’
두 가지가 나타났다.
그것도 얼음 마녀를 제거할지 아니면 친구가 될지라는 이상한 퀘스트가.
“허 참..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게임을 플레이 했을 적에도 이런식의 퀘스트는 종종 발생했었다.
플레이어의 선택지가 대륙의 운명의 크게 바꿀 때 나타나는 퀘스트들에서 종종 이런 식으로 선택을 강요했기 때문에.
“뒤에 있는 게 좋은 거 아닌가?”
보상을 보면 무조건 뒤에 나타난 퀘스트가 이득이었다.
얼음 마녀가 평생 모아온 마나들은 말릭의 마나들 보다 많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게다가 용사 칭호라면..’
아셀이 게임을 했을 적에 용사 칭호를 가지고 있는 유저는 없어도 NPC는 몇 명 있었다.
녀석들이 가지고 있던 칭호의 효과로 대륙의 어디를 가든 영웅의 대접을 받았으며 마족과의 전투에서도 용사라는 칭호는 크게 도움이 되었던 것을 아셀은 잘 기억하고 있었다.
“무조건 뒤네.”
‘그럼 우선 재봉인을 해놓고 다시 여기에 와야 하나?’
온전한 상태의 얼음 마녀가 봉인에서 풀려나면 아셀은 이길 가능성이 0에 가까웠기에.
그가 재봉인을 하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재미있는 마법을 가지고 있구나.]
“?!”
뒤에서 들려오는 미형의 목소리에 아셀의 눈이 번쩍 떠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셀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그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며 신검 아르테스를 뽑아 들었다.
‘퀴리?!’
들려온 미형의 목소리.
그것은 뱀파이어 로드 이자 마계 군단장 중 하나인 퀴리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놈이 어떻게 이곳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직 군단장급의 마족들은 대륙에서 제대로 힘을 펼치지 못했기에. 모습을 드러냈던 존재들은 아무도 없는 상황.
심지어 속삭임의 파랑스는 군단장임에도 신분과 모습을 숨기고 대륙에서 활동하는 중이었다.
[아주 흥미로워.. 그림자 용사의 후손이라.]
“너어....”
목소리가 들린 곳은 제이든의 시체였다.
불타고 가슴에 얼음 결정들이 박혀있던 그것이 기괴한 움직임으로 점점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이 아셀의 눈에 들어왔다.
[세상에는 참으로 즐거운 게 많은데 말이지. 안 그런가?]
제이든의 눈이 번적 떠지며 그 안에서 진한 붉은 빛이 터져 나왔다.
‘정신만 이동한 건가?’
단번에 아셀은 지금 제이든의 몸에 퀴리가 빙의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흐음... 내 수백 명의 딸들 중 하나이지만, 이런 식으로 망가뜨린 건 조금 불쾌한데 말이지.]
바닥에서 신음하고 있는 리쿠아를 한번 바라본 퀴리가 피식 웃으며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지팡이 블러드 퀴리를 들어 올렸다.
[이렇게 죽으라고 여기에 보낸 게 아닌데 말이야.]
“무정한 새끼네.”
[자네도 자식이 수백 명이나 되면 내 마음을 이해할걸세.]
퀴리가 씨익 웃으며 아셀을 바라보았다.
애초에 불에 타고 녹아내렸던 얼굴이었기에. 녀석의 기괴한 웃음은 보는 이로 하여금 소름 끼치게 만들기 충분했다.
[자네에게 제안을 하나 해주지.]
뱀파이어 로드이자 마계 군단장.
그것을 상대로 이길 가능성은 얼음 마녀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가능성보다 적은 경우였다.
하지만, 퀴리가 완벽에 가까운 힘을 되찾았을 때 그런 경우의 수가 나오는 것.
지금처럼 온전하지 못한 힘으로 정신만이 인간의 몸에 기생하고 있는 녀석과의 싸움은 해볼 만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봉인에서 비켜주겠는가? 그럼 목숨만은 살려줄 의향이 있는데 말이지.]
‘역시나.’
아셀은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놈의 말에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기억하기에 퀴리는 인간들을 상대로 절대로 자비를 베푸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종종 대화가 통했던 몇몇 마족 군단장들과 다르게 퀴리는 절대로 인간과 협상하는 법이 없었으니까.
‘놈도 나와의 싸움에서 이길 자신이 별로 없는 거야.’
남은 문제는 아셀의 그림자 재단의 유지 시간.
벌써 몇 차례 그림자들을 바꿔가며 행동했기에. 아셀 또한 완벽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심지어 말릭과 케락스의 버프마저 두르지 않고 있었으니까.
“봉인에서 비켜줘?”
[나는 저것을 깨우고 싶네. 저 봉인의 존재를 알아차리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자네가 알면 알아서 비켜줄 것을..]
녀석의 말이 끝나기 전에 하급 정령 수십 마리의 동시에 소환한 아셀이 녀석을 향해 공격을 명령했다.
[흐음... 이건?]
하급 정령들.
불꽃들과 눈보라가 순식간에 퀴리를 휘감았는데도 녀석은 그저 무덤덤한 표정을 지어낼 뿐이었다.
[거절인가?]
“보면 모르냐?”
불꽃과 눈보라에 휘감겨 시야가 차단된 녀석을 향해 아셀이 말릭의 그림자를 불러들이며 빠르게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캉!
분명 시야가 차단되어 보이지 않아야 했건만, 퀴리는 너무나도 손쉽게 자신의 지팡이를 들어 올리며 아셀의 검강을 막아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방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아셀이 녀석과 공방을 나누면 나눌수록 놈의 몸이 무너지며 사방에 피와 살점이 흩날렸기 때문에.
[재미있어. 자네 아버지 유론 필드 또한 자네 나이대에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는데 말이지.]
퀴리의 얼굴에서 순수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자신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아셀의 경지에 순수하게 감탄했기 때문에.
“흐읍!”
아셀이 놈을 밀어붙이기 위해 아르테스를 쥐고 있는 손에 더욱더 힘을 주자 그의 팔뚝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재구성된 신체가 상황에 맞게 효율적으로 근육과 체력을 안배해주는 모습.
순식간에 놈의 지팡이를 쳐내던 아셀이 놈의 가슴에 검을 찔러넣는 데 성공했다.
[역시나.. 대단해.]
정확히 심장에 검을 찔러냈는데, 놈은 너무나도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이걸로는 부족한가?’
신성력을 가득 머금고 있는 검강으로 내찔렀는데도 멀쩡한 모습. 아마 정신체만 빙의한 것도 있겠지만, 애초에 뱀파이어들의 질긴 생명력이 가능하게 해준 모습인 게 분명했다.
후웅. 무언가 아셀을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피로 만들어진 검인 것을 확인한 아셀이 황급히 뒤로 물러서는 것도 잠시.
그가 있던 자리에 거대한 구멍이 생겼다는 것을 아셀은 확인할 수 있었다.
“블러드 웨폰.”
어느새 퀴리를 중심으로 30개에 달하는 피의 검들이 만들어져 허공에 떠있는 모습이 아셀의 눈에 들어왔다.
‘본래의 녀석이라면..’
놈을 토벌하기 위해 직접 부딪쳐 본 아셀은 놈이 완벽에 가까운 몸을 유지하고 있을 때 순식간에 만들어낸 수천 개의 피의 검을 직접 마주한 적이 있었다.
‘20%.’
블러드 웨폰의 개수에서 지금 퀴리의 경지가 본래의 20%란 것을 확인한 아셀은 사방에서 자신을 향해 쏘아지기 시작한 피의 검을 향해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검 하나하나가 거대한 기운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하듯.
고함을 내지르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아셀이 피의 검을 받아칠수록 그의 손아귀가 터져 나갔다.
[뒤로 물러나라.]
마치 용들의 용언 같은 무게감이 실린 퀴리의 말을 구현하려는 듯. 아셀에 의해 파괴되고 땅에 떨어진 피의 검들이 다시금 만들어지며 아셀의 진격을 막아내기 시작했다
‘앞으로!’
도저히 정면에서 받아낼 수 없을 것 같은 피의 검은 아르테스로 흘려냈다. 거대한 기운을 머금은 공격들을 제대로 흘려낼 수 없었기에. 아셀의 몸 곳곳에 상처들이 쌓여가는 상황.
신성의 갑옷이 주는 치료 효과들로 인해 빠르게 치유되는 상처들보다 아셀의 전신에 쌓여가는 상처들이 더 많아지고 있었다.
[흐음?]
자신을 향해 계속해서 다가오는 아셀을 바라보며 퀴리의 눈이 조금 크게 떠질 수밖에 없었다.
분명 아셀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들과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본 코어의 개수로는 분명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그림자들은 그림자들인가?]
300년 전에도. 용사들을 도와 자신들과 싸웠던 그림자들 중에 마족들도 놀라워할 만한 능력을 지녔던 존재들이 수두룩했었다.
게다가 지금 자신을 죽이기 위해 피의 검을 뚫고 오고 있는 아셀은 증오스러운 7명의 용사들 중 하나의 후손.
혈통과 능력 그것들을 떠올리자, 퀴리는 지금 보여주는 모습이 전혀 놀라운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쩌면 지금 처리해야겠구나.]
퀴리가 자신의 기운을 더욱 거칠게 제이든의 몸 안에 불어넣자. 블러드 퀴리를 들고 있던 오른손이 순식간에 터져 나갔다.
애초에 인간의 몸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기운. 그것이 더욱 들어오자 신체가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 분명했다.
펑! 육신을 버려가며 토해내는 기운은 처음으로 아셀을 뒤로 주르륵 밀려내게 하기 충분했다.
“커헉!”
거대한 대검의 형태의 피의 검, 그것을 정면에서 받아낸 아셀은 온몸에서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상까지 입었는지 입가에 피를 주르륵 흘리는 상황.
그럼에도 무릎을 꿇지 않은 아셀의 모습에 퀴리는 진심으로 놀라워할 수밖에 없었다.
[허어... 이거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나?]
혈통과 능력. 자신이 예상했던 그것들을 뛰어넘은 아셀의 모습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퀴리는 입술을 핥으며 다시금 달려들기 시작한 아셀을 바라보았다.
‘놈도 온전하지 않다.’
퀴리가 아셀을 압도하는 모습들이 나오고 있지만, 그는 피의 검들이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서 점점 무너져 내려가는 놈의 육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시간 싸움.’
퀴리의 몸이 먼저 부서지는지 아니면 아셀이 먼저 피의 검에 찔려 죽는지의 싸움이 될 것이 분명한 상황.
그러나 냉정하게 자신의 몸과 퀴리의 몸을 바라본 아셀은 이 싸움에서 자신의 승산이 없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대단하다만.. 거기까지인 거 같구나.]
‘방법은 있지.’
성공만 한다면 무려 마계 군단장 중 하나를 잠시 동안 대륙에서 활동하지 못하게 만들 방법이 아셀의 손에 있었다.
[이제 그만 쓰러지거라.]
아셀을 완벽하게 쓰러트릴 생각으로 이번에도 거칠게 기운을 불어넣자. 제이든의 남은 사지들이 모두 순식간에 터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아셀을 둘러싸기 시작한 거대한 피의 대검들.
하나라도 맞으면 즉사는 물론이거니와 아셀 본인의 육신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을 게 분명한 것들이었다.
“기회는 단 한 번.”
아셀의 손아귀에 피와 식은땀이 섞여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