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거신상
“많기도 해라.”
얼음 마녀가 봉인된 곳을 향하면 향할수록 더 거센 눈보라들과 좀 더 강한 몬스터들이 튀어나왔다.
어느때는 바다사자 수백 마리가 동시에 튀어나오기도 했던 것.
그때마다 그림자들을 미친 듯이 활용하며 돌파한 아셀은 이제 봉인 장소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못.. 지나.. 간다.]
‘거신상!’
눈보라가 걷히고 아셀의 눈앞에는 얼음으로 만든 거대한 동상이 있었다.
바바리안의 모습을 본따 만들어졌는지 생김새가 바바리안들과 비슷했으며 어눌한 손에 쥐고 있는 도끼마저 얼음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못..지..나.. 간..다.]
똑같은 말만 반복하며 무언가를 지키는 듯한 거신상을 바라보며 아셀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저것이 여기 있다는 것은 드디어 뒤에 얼음 마녀의 봉인이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봉인을 더 하려고 왔다면 비켜줄래?”
[못.. 지나.. 간..다.]
‘용족들 작품인데 이성은 없는 거 같네.’
그저 봉인 장소에 그 어떤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설정되어 있는 게 분명했다.
용족들의 작품이 숨겨진 던전들에 이 같은 거신상들은 매번 등장했던 몬스터였다. 어떤 것은 이성을 가지고 유저들의 이야기를 듣고 싸움을 하지 않았던 경험이 있었을 정도였으니까.
‘대부분의 거신상들이 8성급 이상의 몬스터였지만.’
용족들이 직접 만들었던 거신상이었기에. 경지가 높은 몬스터인 것은 당연한 법. 그러나 아셀은 눈앞에 있는 거신상이 8성급이 안 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너무 녹슬거나 얼어있어.”
오랜 세월 빙하 대륙 투드란에 방치되듯 있었기에. 8성급 몬스터로서의 격이 없어진 상황.
놈을 바라보며 아셀은 쿠이가의 그림자를 불러들였다.
거대한 녀석을 몸 곳곳에 터트릴 마법은 수천 가지가 넘었기 때문에.
‘가장 좋은 게 있지.’
익면조의 심장을 달고 있는 요정목 지팡이 미네르바에서 거대한 마나들이 순식간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백색의 화염으로 바뀌는 것은 불과 2초.
거대한 열기가 투드란의 추위마저 잊게 만들자 거신상이 도끼를 들어 올렸다.
[못..지...]
녀석이 무언가 더 말하기 전에 아셀은 만들어둔 쿠이가의 장기 백색 태양을 녀석을 향해 쏘아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거대한 파공음이 지축을 울려 나가며 거신상의 중심을 무너트리는 것에 성공했음을 아셀은 확인할 수 있었다.
부웅.
백색의 태양과 얼음이 만나 일어난 수증기들 속에서 무언가 파공음을 내며 아셀을 향해 날아왔다.
그것이 거신상이 던진 도끼라는 것을 아셀은 겨우 피하며 확인할 수 있었다.
“한 번에 쓰러지지는 않나.”
약해졌기에. 생각보다 빠르게 처리할 줄 알았건만, 백색 태양을 맞는 와중에도 녀석이 공격에 성공한 것에 아셀은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못...]
수증기가 걷히고 나타난 녀석의 몸의 곳곳은 얼음이 녹아 흘러내는 것이 아셀의 눈에 들어왔다.
얼음 위에 백색의 태양의 잔불이 일어나는 이질적인 모습.
녀석이 덩치에 걸맞지 않게 민첩한 속도로 아셀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나.. 간..다!]
발악을 하듯 녀석이 주먹을 내려쳤지만, 부서지는 것은 모두 빙하의 바닥뿐,
아셀은 여유롭게 녀석의 공격을 피하는 와중에도 몇 차례 백색 태양을 녀석의 몸 곳곳에 적중시키는 데 성공했다.
“끈질기네..”
거대했던 거신상은 얼음이 녹았기 때문에. 이제는 아셀의 키와 비슷한 모습. 그럼에도 녀석은 아셀을 향해 계속해서 달려드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마법은 이제.’
백색 태양을 몇 차례 쉬지 않고 사용했기에. 쿠이가의 그림자를 유지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확인한 아셀은 말릭의 그림자를 불러들였다.
[지나...]
후웅하고 휘둘러진 녀석의 손을 어느새 완성된 신성의 갑옷을 이용해 어렵지 않게 막아낸 아셀이 밤의 발걸음의 고유능력을 발동시켰다.
‘그림자 잡기.’
300년 전 그림자들의 수장 갈란의 능력 중 하나.
그림자 잡기가 사용되자 아셀은 순식간에 거신사의 등 뒤로 이동했다.
[간....]
갑자기 자신과 힘겨루기를 하던 아셀이 눈앞에서 사라진 것에 당황한 거신상을 등 뒤에서 아셀이 미친 듯이 아르테스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래도 안 죽으려나?’
등 뒤에서 공격당했기에. 더 큰 피해들을 입은 거신상이 몇 차례 반격을 하려는 모습들이 아셀의 눈가에 들어오는 것도 잠시.
결국 움직임을 멈춘 녀석과 코어 안에 들어오는 거대한 마나들에 의해 아셀은 사냥에 성공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거신상이 좋은 건 이런 걸 주기 때문이지.”
움직임이 완전히 멈춘 녀석의 가슴 부분에 한스가 준 망치로 가격하자 어린아이 주먹만 한 보석이 하나 툭하고 떨어졌다.
“골렘의 핵. 무려 용족들이 만든 물건을 줬으니까 말이야.”
아셀은 이것을 마탑으로 가졌갔을 때 쿠이가가 지을 표정을 상상하니 기분이 저절로 좋아졌다.
‘지금은 사용 못 하지만.’
여기저기 망가진 흔적들. 대다수가 아셀의 공격들에 부서진 흔적들이 가득했지만, 마탑에서는 분명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을 게 분명했다.
‘현실에서는 1억짜리 아이템이었지.’
완벽하게 복구되어 만들어진 골렘들.
용족의 손길이 닿은 아이템들이나 아티펙트들이 사기적이라 평가받는 것을 증명하듯. 골렘들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아셀 본인이 직접 겪어 잘 알고 있었다.
“고요하네.”
거신상의 뒤편에는 인간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틈이 하나 있었다.
그곳을 비집고 들어가 본 아셀은 눈보라조차 불지 않고 아무런 추위도 느껴지지 않는 거대한 공간에 들어 올 수 있었다.
안에 들어온 얼음으로 만든 동굴들.
아셀은 투명한 얼음이 품고 있는 수많은 존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떤 벽면은 몬스터들이 가득히 얼어붙은 채 들어있으며 바바리안 심지어 엘프들과 드워프들마저 가득한 상황.
아셀이 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그 숫자들은 점점 더 많아졌다.
‘토벌군들.’
과거 얼음 마녀를 봉인하기 위해 이곳에 왔던 수많은 존재들.
봉인에 점점 다가갈수록 아셀은 무장이 잘된 옛 무인들의 시체들까지 발견할 수 있었다. 모두 얼어붙은 그상태 그대로.
“부숴볼까?”
몇 개의 옛 무인들의 시체들이 가지고 있는 아이템들은 아셀이 탐낼 만했기에. 잠시 얼음 벽면을 아르테스의 망치 부분으로 두드려보았던 아셀은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에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봉인과 연관된 건가?’
백룡들의 봉인과 관련되어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이런 사소한 지형들까지 봉인의 영향을 받은 것.
그림자 망치술까지 펼치며 벽면을 내리쳐 보았지만, 아셀은 잠시 부서진 곳이 눈 깜짝할 사이에 회복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었다.
“아쉽네..”
심지어 전설 등급의 아이템으로 보이는 것마저 바라만 봐야 하는 지금의 상황이었기에.
그는 순간이나마 얼음 마녀의 봉인이 풀리는 것을 내버려 둘까 하는 생각마저 일어났다.
‘미친 생각이지.’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없음을 다시 한번 떠올린 아셀이 피식 웃으며 기나긴 복도를 걸어가는 것도 잠시.
그는 드디어 얼음 마녀가 봉인된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셀의 눈앞에 수십 마리의 용들이 얼어붙은 채로 죽어있었다.
그것들 모두가 백색의 비닐을 가지고 있는 상황.
위대하고 고귀하다고 불리는 용들조차도 얼음 마녀의 마법 앞에 그대로 얼어붙은 것이었다.
‘용뿐만이 아니야.’
인간 드워프 바바리안 엘프들. 이전에 봤던 옛 무인들보다 높은 경지에 있는 게 분명한 녀석들의 시체들마저 가득한 곳.
아셀은 그것들을 지나치며 이중 가장 거대한 백룡의 시체가 마치 알을 감싸는듯한 모습으로 봉인된 얼음마녀를 드디어 발견할 수 있었다.
“어라?”
봉인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아셀은 믿기 힘들다는 듯 눈을 껌뻑일 수밖에 없었다.
마치 살아 움직일 것 같은 거대한 백룡의 품안에 있는 얼음 마녀의 봉인은 너무나도 완벽했기 때문에.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봉인은 완벽했다. 언젠가는 이것이 풀리겠지만, 아셀이 예상하기에는 향후 100년간은 이것의 봉인이 풀릴 일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랬기에 완벽. 어차피 100년 뒷면 아셀이 이 세상에 없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이상해.’
황급히 쿠이가의 그림자를 불러들이며 아셀은 요정목 지팡이 미네르바로 얼음 마녀의 봉인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지팡이로 봉인을 분석하는 것과 동시에 아셀의 머릿속에 수많은 수식들이 떠올랐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제대로 인식조차 할 수 없을 수식들.
쿠이가의 재능과 미네르바의 보조로 봉인 수식을 확인하던 아셀은 이것에 문제가 없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문제라고 해봐야 아셀의 예상대로 100년 뒤에나 풀려날 것 같은 형식뿐.
‘이건 역시나.’
백룡과 아셀 말고도 이 장소를 아는 존재.
그리고 멀쩡한 얼음 마녀를 깨워 대륙을 혼란에 빠트릴만한 녀석들은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이었다.
“마족..”
본래의 게임에서도 마족들이 이것의 봉인을 풀었을 게 분명한 상황. 아셀은 제 3차 몬스터 웨이브와 함께 엄음 마녀의 출현으로 순식간에 황폐해졌던 그때의 대륙의 상황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미친놈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아셀은 자신도 모르게 혐오감과 구역질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제 3차 몬스터 웨이브의 주역들은 얼음 마녀가 황폐하게 만든 세상에서 더욱 강한 힘을 냈었기 때문에.
막아야 한다.
그 생각이 아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워나갔다.
어차피 군단장급의 마족들은 정면에서 나타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것의 봉인을 풀어낸 존재들은 그보다 낮은 급의 마족들과 녀석들을 따르는 인간들일 게 분명했다.
“내 미래 계획을 망치게 할 수는 없지.”
아셀이 목적으로 하는 안락한 미래에 황폐화 된 토지는 없었기 때문에. 아셀은 이곳에 봉인을 풀러 오는 녀석들을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조금 기다려야 하나.’
그가 기억하는 얼음 마녀의 출현은 아직 시간이 남았기에.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기다리려는 계획을 세우는 중이었다.
“우리 돼지는 얼음 속에 있는 시체들도 먹으려고 하는 병신인가요?”
어디선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아셀은 황급히 투마리스의 그림자를 불러들이며 기척을 숨겼다.
“으어... 으어..”
“제발 그런 말투좀 그만할 수 없겠소?”
“어마나. 우리 제이든님의 마음속에 무언가 새로운 본능이 꿈틀거리시나 보네요?”
얼음 마녀의 봉인이 있는 장소에 마족 두 마리와 인간 마법사 한 명이 나타났다.
‘저건...’
모두 모르는 얼굴들.
아셀의 기억에 없는 것을 보니 전혀 계위가 높은 마족이나 경지가 높은 마법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남자의 손에 들려 있는 붉은 빛의 지팡이였다.
‘뱀파이어 로드의 스태프 블러드 퀴리.’
마족들의 군단장중 하나이자 뱀파이어 로드 퀴리의 지팡이 블러드 퀴리였으니까.
알고 있는 무기의 등장으로 남자의 신분을 알게 된 아셀이 황금활 기온으로 제이든이라 불린 남자의 심장에 겨누었다.
‘우선 마법사부터.’
“그런데 돼지님 그리고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시고 있는 우리 순수한 제이드님은 못느끼시나요?”
“또 무엇을 말이오..”
쾅!
아셀의 손에서 샤인 에로우가 쏘아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여기에 다른 돼지 새끼 한 마리가 또 있는걸 말이에요.”
“?!”
샤인 에로우를 막아선 마법. 그것을 발견한 아셀의 두 눈이 믿기 힘들 만큼 커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