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페루가
거구의 남자를 빤히 바라보는 아셀의 눈이 가늘어졌다.
회색빛의 머리와 등에 걸고 있는 거대한 배틀 엑스. 게다가 화려한 갑옷 가슴 부분에 있는 코끼리 문양까지.
단숨에 남자의 신분이 누군지 알아차릴 수 있었기 때문에.
‘7용사의 후손을 여기서 보내.’
회색빛 머리에 거대한 도끼 게다가 가슴에 코끼리 문양을 새겨넣는 가문은 7용사 가문 중 [페루]뿐이었다.
“다시 한번 묻겠소. 그대가 저것을 깨운 것이오?”
페루가의 장남 케토 페루는 아셀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게다가 한편으로는 자신보다 한참은 어려 보이는 아셀의 몸에서 은은하게 나오는 기운에 놀라워 할 수밖에 없었다.
“너는 거기서 뭐 하냐?”
“그.. 대협. 이분들이.”
페루가의 장남을 무시하며 아셀은 녀석의 손에 들려있는 토니를 바라보며 어처구니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기억에도 없는 놈이야.’
7용사 가문에서 아셀이 기억해야 할 녀석들은 7용사 가문이 멸족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살아남은 녀석들뿐.
그중 페루가의 자식은 후손은 없었기에. 기억할 필요도 기억에 있는 놈도 아니었다.
게다가 눈가에 질투심과 열등감을 은은하게 보이는 것을 바라보니 애초에 아셀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게 가득했다.
“허참.. 그대는 예의라는 게 없나 보군. 게다가 이렇게 미등록 아인족을 대놓고 데리고 다니고 말이야.”
“이런 우라질! 이봐 덩치 이 토니님은 망치와 용광로의 후손이지 네놈들이 만든 종이 쪼가리에 애완동물처럼 적힐 몸이 아니라 이 말이야!”
대놓고 토니를 무시하는 말에 녀석이 아등바등거렸지만, 페루가의 자식의 손을 벗어나기는 힘들었다.
“노예 하나 제대로 교육하지 못하고..”
“야 토니야. 가자 여기서 일은 마무리 했으니까.”
사방에서 조소가 터져 나오는 것이 아무래도 이곳에 먼저 도착한 무인들과 용병들은 페루가의 자식을 따르는 녀석인 것 같았다.
그들의 조소와 비웃음 속에서 아셀은 그저 머리를 긁적이며 페루가 녀석의 손에 들려있는 토니를 단숨에 낚아채자 케토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내 악력을 가볍게 무시해?!’
“저.저것이 도련님에게!”
“허참! 자네는 도련님 가슴에 새겨진 코끼리 문양이 보이지 않는겐가!?”
몇몇 무인들은 등에 걸려있는 거대한 배틀 엑스를 아셀에게 겨누었다.
눈치를 보던 용병들 또한 아셀을 향해 주춤거리며 무기를 뽑아드는 모습.
잠시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고 있던 케토가 쓴웃음을 지으며 아셀을 바라보았다.
“좋게 해결하려고 했건만, 자네가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가는 건 저것을 깨운 것이 자네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거겠지?”
“어. 그래 저거 내가 깨웠고 내가 잡았다.”
순순히 인정하는 아셀의 모습에 케토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렇다는 것은 자네의 행동으로 이 일대에 큰 피해를 입히고..”
“뭔 개소리를 하는 거야. 어떤 피해? 누가 죽기라도 했어?”
아셀이 진심으로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케토를 바라보며 말했다.
“... 누군가는 죽은 게 아니지만, 이곳 마을 주민들이 살아가는 터전인 숲이 많이 훼손이..”
“이상하다. 나는 네놈 귀가 뾰족하지 않은 거 같은데? 그렇게 숲을 사랑하시면 차라리 엘프들이라고 말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말장난이 과한 거 같네만?”
케토의 한쪽 눈썹이 치켜올려졌다.
그런 녀석의 모습에 아셀은 그저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그냥 부럽다고 말해 이 새끼야. 저거 잡아서 부럽다고.”
“뭐라고?”
“그리고 너희들도 봤지? 저거 잡으니까 터질 거 같은 마르코 화산이 멈춘 거? 내가 아니었어 봐 언젠가 저것이 깨어나고 화산이 터졌으면 이 일대가 남아나겠어?”
말은 과격하게 하고 있지만, 아셀의 말은 모두 정론에 가까웠다.
위협을 미리 막은 것 그것은 마르코 화산 주변에 수많은 화염을 일어나게 했어도 마땅히 칭찬받을 일이었기 때문에.
게다가 이곳에 있는 모두가 잠들어 있는 몬스터들은 언젠가 깨어나 큰 피해를 입힌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존재들이었다.
“그래도 자네가 끼친 피해는...”
“내가 오늘 저걸 막지 못했으면 네가 막을래? 그때 너 여기 근처에 사냐? 화산에 몬스터가 있다는걸 미리 알고 그렇게 말하는 거지? 그래서 여기서 매일 저걸 지켜보고 있다가 내가 먼저 잡아서 화가 난 거라면 내가 정중하게 사과할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자네가 이곳에 끼친 피해를...”
아셀의 말에 더 이상 반문하지 못하던 케토는 계속해서 똑같은 말을 반복적으로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건 뭐 앵무새도 아니고 똑같은 말만 계속하네? 아무튼 나는 간다.”
“아니 이 난리를 치고 그냥 가겠다고?”
그동안 무기를 뽑지 않고 있던 케토가 자신의 몸만 한 거대한 배틀 엑스를 아셀에게 겨누었다.
“도망치려고 하는 건가?”
“너는 진짜 돌대가리 새끼니?”
아셀은 진심으로 케토가 돌대가리가 아닐까 심각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막아서는 이유가 진심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 기다렸다가 자네에게 응당한 처분을 받기를 기다려야 하는 게 맞지 어디를 가겠는가?”
“처분은 무슨.”
“놈!! 이게 장난 같은가?! 이 페루가의 장남 케토가 무기를 뽑아든 게 장난 같다는 말일세!”
말이 통하지 않은 윽박이라도 지르려고 하는 것을 아셀은 눈치챌 수 있었다.
사방에서 풍겨오는 흉흉한 분위기 토니가 침을 삼키며 자신의 무기에 손을 올려두려는 것도 잠시. 아셀은 그저 히죽 웃으며 케토를 바라보았다.
“잡아둘 수는 있고?”
“뭐라고?”
아셀의 히죽거리는 모습과 자신을 무시하는듯한 말에 케토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누구인가 대륙을 구한 7명의 용사 가문 중 하나의 장남이었다.
대륙에 존재하는 왕국들의 왕족들도 케토의 앞에서 눈치를 살폈으며 그의 눈치를 보지 않는 것은 기껏해야 다른 용사 가문과 두 개의 황가의 일원 그리고 마탑과 황금 기사단 소속의 마법사와 무인들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보다 한참 어린 녀석이 자신을 무시하는듯한 발언에 케토가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이성의 끈이 뚝 하고 끊어져 버렸다.
“자네는 팔다리를 조금 잘라놔야 잡아둘 수 있겠군.”
케토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주변의 그를 따르는 무인들이 아셀을 향해 흉흉한 기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게임을 플레이 하다 보면 가끔 유저들에게 시비를 걸거나 이상한 트집을 잡고 공격하던 npc들이 수없이도 많았기 때문에.
“대협. 저건 저한테 주십시오!”
토니는 케토를 바라보며 어느새 뽑아 든 자신의 도끼를 겨누었다. 방금 전 노예 취급한 모욕 때문인 것 같았다.
“됐어. 너는 저기 잔챙이들 처리하고 있어.”
그런 토니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아셀은 아르테스의 망치 부분은 빙글빙글 돌리며 케토와 마주 섰다.
“지금이라도 사죄를 하고 자네가 몬스터를 깨우고 이일대에 피해를 끼친 것을 반성한다면 물러나 주겠네.”
“나도 말하겠네. 자네가 나한테 이상한 개소리를 해서 내 머리를 아프게 하고 이상한 트집을 잡아 아깝게 낭비한 내 시간을 보상한다면 그저 넘어가 주겠네.”
“이놈!!”
아셀의 빈정거림에 케토가 거대한 배틀 엑스에서 나오는 움직임이라고는 믿기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로 자신의 무기를 휘둘렀다.
마치 야생의 몬스터들이 형식 없이 달려드는 것 같은 묘한 기운들.
페루 가문 특유의 도끼술이 펼쳐지는 것이었다.
쾅! 쾅!
눈으로도 쫓기힘든 거대한 배틀 엑스의 공격들 그러나 놀랍게도 모두 검은색 마나를 뒤덮고 있는 아셀의 망치들에 막히는 모습이 나타났다.
“어찌.. 도련님의 대상난무(大象亂舞)를 저리 막을 수 있단 말인가?!”
“황금 기사단의 빙제님도 칭찬하신 공격을 어찌!”
대상난무라는 이름에 아셀은 하마터면 아르테스를 놓칠뻔한 것을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참아낼 수 있었다.
“...진짜냐?”
“흐음! 흐으으음!”
무표정한 얼굴로 케토의 대상난무를 막아내는 아셀과 다르게 녀석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으며 그의 손아귀에는 어느새 피가 줄줄 새어 나오는 것이 눈에 보였다.
케토는 가문의 비기를 사용하건만 그저 막아내는 눈앞의 아셀의 방어에 오히려 케토가 점점 궁지로 몰리고 있었기에.
“..진짜로. 푸흡.. 대.대상난무 같은 게 기술 이름은 아니지?”
“네놈! 감히 페루가를 무시하는 것이더냐!”
의역하면 코끼리 난무.
아셀은 진심으로 그것이 기술 이름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시종일관 히죽거리는 얼굴로 아르테스의 망치 부분을 휘둘렀다.
“푸하하. 설마 야 너네 집에 호랑이 난무, 쥐새끼 난,무 개새끼 난무 같은 건 없냐?”
비웃으며 망치를 휘두르던 아셀은 평정심을 잃고 번잡하게 휘두르던 케토의 빈틈에 정확히 자신의 공격을 적중시키는 데 성공했다.
“크헉!”
“도.도련님!”
“어디를 봐! 네놈들은 이 토니님의 상대라고!”
또각.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아셀이 망치가 케토의 몸을 적중할 때마다 그의 뼈들이 두 동강 나는 데서 오는 소리인 게 분명했다.
“으악!”
계속되는 망치질에 케토는 결국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와 함께 발악하듯 휘두르는 녀석의 거대한 배틀 엑스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왼팔 왼팔 왼팔!”
단 세 번. 케토가 휘두르는 배틀 엑스를 피하며 아셀이 정확히 녀석의 왼팔에 망치를 내려치는 데 성공했다.
“도련님!”
“도련님 왼팔이?!”
케토의 왼팔은 그저 달려있을 뿐이었다.
녀석의 뼈만 정확히 아셀이 박살냈기 때문에. 그럼에도 녀석은 이를 악물고 오른팔로만 아셀을 향해 도끼를 휘두르는 모습은 조금 칭찬할 만한 근성이었다.
“죽여버리겠다!! 네놈! 감히!”
“웃긴 녀석일세. 시비는 지가 걸고. 아참 그리고.”
케토의 분노하는 모습에 아셀은 무언가 떠오른 듯 히죽 웃으며 이번에는 녀석의 오른쪽 허벅지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나는 필드가의 사람이니까 무슨 원한이 있다면 우리 집에 찾아와 주라.”
“뭐?!”
“피.필드가의 사람이었단 말이야?!”
“어쩐지 아쿠아색 머리가..”
“잠깐만 이러면 일이 커진 거 아니야?”
고통 속에 결국 자리에 주저앉은 케토를 내려다 보며 아셀은 스산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가 처음으로 밖에서 필드가의 이름을 판 것. 그것은 아셀의 소소한 복수가 담겨있는 의도였다.
‘어차피 가문에 안 돌아갈 건데, 귀찮은 건 지들이 알아서 하겠지.’
페루가 같은 거대한 가문의 장남이 필드가의 일원에게 무참하게 패배한 것도 모자라 손발이 아작 난 것.
이것은 분명 그냥 지나갈 일이 아닐 게 분명했으니 필드가의 가주 유론은 조금 골치가 아파질 수도 있었다.
“피.필드가라고?”
“대협이.. 그 망할 용사 놈들의 후손이었단 말이야?”
허망하게 중얼거리는 케토와 토니를 무시하며 아셀은 녀석의 오른팔을 바라보며 망치를 들어 올렸다.
“알았지. 케토? 제발 우리 집에 와서 내가 때렸다고 꼭 말해라. 알았지? 꼭 말해야 해. 행여나 겁먹고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 알았지?”
“자. 잠깐만 필드가의 일원이라면 내가 잘못을...”
케토의 오른팔에 내려치기 시작한 아르테스의 망치 부분.
그것의 거대한 소리와 함께 케토의 비명소리가 마르코 화산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꼭 필드가에 찾아와. 알았지 케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