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이변의 시작
땅이 부르르 떨리더니 이윽고 나타난 정령들의 숫자가 무려 10마리였다.
[동기화가 올랐습니다.]
10마리의 흙의 정령들이 소환됨으로 인해 그림자 재단의 유지 시간 또한 빠르게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와 동시에 아셀은 정령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코어가 무언가에 의해 꿈틀거린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뭔가 될 거 같은데..’
마치 좀 더 쥐어짜면 무언가 나타날 거 같다는 직감이 들었던 아셀은 코어를 좀 더 빠르게 움직여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에프릴이 조언해준 것처럼 정령들에게 떼를 쓰듯 부탁하기 시작했다.
“또 뭔가가..?”
10마리의 하급 흙의 정령을 소환한 것도 놀라운데 또 한 번 무언가 벌어질 거 같은 예감에 한 성기사가 중얼거린 것을 증명하듯.
에프릴의 눈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 이 괴물...”
지금 아셀이 무엇을 할 건지 잘 알았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 말고 4코어에서 다음 단계의 정령을 불러낼 존재가 세상에 또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커헉!”
무리한 코어의 운용에 입가에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런 무리함이 헛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듯 아셀이 서있는 대지에 자신의 허리까지 오는 흙으로 만들어진 하마가 나타난 것을 아셀은 발견할 수 있었다.
“주.중급 정령이라고?!”
“15살에 중급 정령을 소환했다는 말인가?!”
“여신이시여....”
말릭의 제자가 15살의 어린 나이에 중급 정령을 소환한 것.
모든 성기사들이 이 감격스러운 모습에 성호를 그으며 감탄하는 것도 잠시.
정작 소환한 아셀은 소환한 지 5초를 넘기지 못하고 자리에 풀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하급 정령 10마리와 중급정령 1마리의 소환.
그것은 아셀의 그림자 재단 유지 시간을 단숨에 사용하게 만드는 것이었으니까.
“아셀 괜찮아?!”
르안느가 다가와 걱정하는 눈길을 보냈지만 아셀은 그저 끄덕이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놀라운 발전이었다. 굳어버렸던 전의 몸과 다르게 지금은 고개라도 끄덕였으니까.
‘놀라운 발전이네 정말...’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지만, 아셀은 중급 정령을 소환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보통 레벨 100 이상의 유저들이 중급 정령을 소환했었기 때문에.
즉 5코어 이상의 존재들이나 그런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잘했어 아셀.”
에프릴이 다가와 아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아쉽네 아셀...”
그녀가 여명 수도원에서 받은 임무들은 대다수가 마쳐진 상황이었다.
어딘가에 소속 되지 않고 대륙을 자유롭게 다니는 그녀였기에.
이제 조금 있으면 떠나야 했으니까.
‘만약 말릭 경의 제자가 아니었다면...’
에프릴은 정령왕들의 도움을 여명 수도원의 모든 존재들과 전쟁이라도 벌여 아셀을 납치라도 하고 싶었다.
그 만큼 눈앞에 아셀은 가르치는 맛이 있었기 때문에.
‘정말 아쉽네.’
***
에프릴이 여명 수도원에 남아있는 동안 아셀은 그녀의 정령술에 대한 기술들을 더 배우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에프릴의 옆에 붙어있었다.
“그러니까. 정령들은 가끔 내 말을 무시할 때가 있단 말이지?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지 아니?”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한 1년에서 2년 소환 안 해주면 오히려 미안하다고 먼저 찾아올 거야. 그때가 가장 중요해. 아셀 먼저 숙이고 들어왔다고 좋아서 받아주면 금세 예전 버릇 찾으니까.”
[동기화가 올랐습니다.]
기술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심상. 즉 정령들을 그녀가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다루는지 알려주었기에.
아셀은 에프릴과의 동기화가 62%를 달성하게 되었다.
‘더 안 오르는군.’
한 번에 소환할 수 있는 하급 정령은 15마리까지 올랐으며 눈의 정령을 제외하고는 모든 정령들의 중급 정령을 소환할 수 있게 되었다.
‘에프릴과의 동기화는 정령들의 숫자겠네.’
동기화가 올라갈수록 소환할 수 있는 정령들의 숫자가 늘어났었다.
언젠가 다신 만난 에프릴과 동기화가 100%가 된다면 아셀은 그녀처럼 수천 마리의 정령들을 한 번에 소환 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때는 그의 코어도 늘어나 있을 테니까.
“에프릴님이 떠나셨어.”
며칠후 에프릴은 작별의 말도 없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자유로움 그것이 그녀의 성격이었기 때문에.
“치이..그래도 이번에는 인사라도 해주시고 가실 줄 알았는데..”
“그러게 말이다.”
르안느의 조금 투정 부리는 얼굴을 바라보며 아셀은 그저 어깨를 으쓱거렸다.
‘방안에 그걸 남겨두고 갈 줄은..’
르안느와 다르게 아셀은 자신의 방 안에 있는 에프릴의 작별 선물을 떠올리고는 속으로 씨익 웃어 보였다.
에프릴이 떠나기 전 아셀의 침대 밑에 정령계로 들어갈 수 있는 마법진을 새겨두었었기 때문에.
‘눈의 정령 때문인 게 분명하네. 에프릴도 그걸 알아차린 거야.’
상급 정령을 계약한 불, 번개, 흙은 당연 하위급 정령을 마음껏 소환하고 부릴 수 있었다.
그러나 눈의 정령.
아셀은 정령계에서 하급 정령밖에 계약하지 못했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정령계로 다시 한번 들어갈 필요가 있었다.
“아직은 안 돼. 최소 5성급 그 이상이다.”
에프릴이 남겨둔 마법진은 일회성이었기에.
아셀은 이제 5코어까지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코어에 씨익 웃어 보였다.
***
“믿음이 부족하다. 믿음이!”
“어라 아셀 벌써 지친 거야? 너 오늘 조금 이상하다?”
한달이 걸릴 거라고 하던 말릭은 에프릴이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도착했다.
-그때의 벌을 받아야겠구나.
오자마자 섬뜩하게 웃어 보인 말릭은 가르시아 수도원장에게 임무에 대한 보고도 생략한 채 아셀과 르안느를 수련시키기 시작했다.
“아셀! 그러고 나서 악을 베어내고 빛을 지켜낼 수 있겠느냐!”
아셀은 자신의 몸을 서서히 조이고 있는 구속구들을 바라보며 혀를찼다.
그가 처음 시작한 것이 구속구들을 달고 연병장을 뛰게 한 것이었으니까.
“움직여라 아셀 적은 기다려 주지 않으니까!”
말릭의 그림자를 가져올 때는 그나마 움직일만 했다.
하지만 아직 동기화가 작아 유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금세 본래의 아셀의 몸으로 돌아오면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동기화가 왜 이리 오르지 않는 거야?”
30분.
자리에 주저앉아 말릭의 잔소리와 르안느의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을 견뎌낸 것도 잠시.
아셀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한번 연병장을 뛰며 옆에서 같이 뛰기 시작한 말릭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아셀. 좀 더 믿음을 보여봐라! 믿음 그것이 성기사들의 힘의 근원이니까!”
말릭과 르안느 또한 구속구를 몸에 걸치고 있었다.
아니 그를 넘어 구속구에 무거운 갑옷까지 입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말릭의 모습을 따라 하고 있건만 아셀은 어째서인지 처음 달리기 시작한 이후로는 동기화가 전혀 오르지 않고 있었다.
‘던전 안에서도 그랬는데.’
이전의 다른 존재들은 행동을 따라 하고 그들의 기술을 곁눈질로 보고 행하는 것만으로도 동기화가 올랐건만.
어째서 말릭과의 동기화가 올라가지 않는지 아셀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냥 몸을 뛰는 것은 몸을 망가지게 할 뿐이다. 믿음으로 달려야 한다 아셀.”
말릭의 아리송한 말에 순간 욕설을 내뱉고 싶었던 것을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참아낼 수 있던 것도 잠시.
아셀은 르안느의 몸에서 점점 새하얀 신성력이 나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지 르안느!”
“스승님 저 잘했죠?!”
‘혹시..’
무언가 떠오른 아셀이 코어를 운용하자 그의 몸 안을 빠르게 신성력들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렇지 아셀 그것이 바로 믿음의 시작이다!”
[동기화가 올랐습니다.]
신성력을 운용해서 달렸더니 동기화가 올라간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일뿐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에 아셀이 미간을 찌푸린 것도 잠시.
그는 옆에서 말릭의 강조 되는 믿음이라는 소리에 속으로 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여신께서 도와주시니. 악을 벌하고...’
심심해서 읽어보았던 헤스티야 경전의 구절.
그것을 중얼거리며 정말로 헤스티야 여신이 실존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자 아셀의 눈앞에 놀라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동기화가 올랐습니다.]
[동기화가 올랐습니다.]
“미친...”
순식간에 올라가기 시작한 동기화에 아셀은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아셀은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인지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말릭의 모든 행동들은 여신에 대한 신앙에서 나오는 거니까.’
그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여신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었기에.
만약 아셀이 말릭의 겉모습만 따라 한다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었던 것이었다.
“오오 아셀 역시 대단하구나. 벌써 이렇게 좋아지다니!”
점점 구속구의 제약에서부터 자유로워지며 능숙하게 움직이는 아셀을 바라보며 말릭이 놀랍다는 듯 소리쳤다.
“그렇게 믿음으로 몸을 운용하고 믿음으로 행동해야 한다 아셀. 장하다!”
연병장을 40바퀴나 돌고 나서야 말릭은 그만하라고 말했다.
잠깐의 휴식 시간 그는 연병장을 돌기 전보다 달라진 아셀의 모습에 속으로 놀라워할 수밖에 없었다.
‘눈썰미만으로 이 정도를 해내다니. 역시 대단하구나..’
르안느와 자신을 바라보며 몸 안에 신성력을 운용하고 여신에 대한 마음가짐을 다르게 한 것.
외부에서 데려온 제자였기에 기초를 알려주기 위해 조금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한 말릭의 모든 예상을 뒤엎는 일이었다.
“흐흐.. 너 체력좀 길러야겠다. 아셀 나는 100바퀴 뛰어도 끄떡이 없는데 말이야.”
“그래. 대단하다 르안느..”
“뭐... 내가 한가한 건 아니지만 원한다면 체력 기르는 거 도와줄 수도 있고.”
“괜찮아 어차피 도움도 안 될 거 같으니까.”
“뭐. 뭐!? 야 내가 친히 도와주겠는데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둘이 조금 사이가 좋아진 거 같구나. 모름지기 사제들은 사이가 좋아야 한단다. 장하다 애들아.”
“무슨 소리세요. 스승님! 제가 이런 녀석 따위랑 어떻게 사이가 좋아 보인다는 건가요?!”
르안느와 말릭의 대화를 들으며 말릭은 훈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믿음.
종교가 없던 아셀이었지만, 강해진다는 생각과 동기화가 올라간다는 이유에 없던 믿음이 절로 생겨났다.
말릭이 알려주는 검술들을 따라 하며 속으로 여신에 대한 감사를 드리기도 했으며 그가 알려주는 신성력 운용들에서도 얼굴 모르는 여신에게 수없이 찬양하던 것도 잠시.
아셀은 말릭과의 동기화가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올라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뭐. 뭐야 너 원래 정화 잘못했잖아?”
며칠 만에 아셀이 르안느만큼 오염된 것을 정화하기 시작하자 그녀는 믿기지 못한다는 듯 눈을 껌뻑였다.
“스승님이. 잘 가르쳐주신 덕분이지.”
“하하하. 아셀 이 녀석 말도 참 예쁘게 하는구나.”
동기화 30%.
그것만으로 천재라는 소리를 듣던 르안느와 비슷해진 것이었기에.
아셀은 새삼 말릭의 재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럼 다음 정화 장소로 가보자꾸나 애들아.”
아셀의 빠른 발전에 기분이 좋아진 말릭이 찬송가까지 흥얼거리며 걸어가려는 것도 잠시.
갑자기 예전 투란에서 말릭과 르안느가 나타난 것처럼 새하얀 십자가가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스승님 저건?”
르안느의 당황스러운 목소리와 굳어진 말릭의 표정.
무언가 일이 생겨났음이 분명했다.
“말릭님 큰일 났습니다!”
그들의 짐작을 증명하듯 새하얀 십자가에서 나온 성기사의 온몸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