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길
아셀은 자신의 말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려고 하는 르안느를 바라보며 볼을 긁적였다.
‘원래라면...’
시비라도 더 걸면 두드려 패서 흑역사를 지워주고 싶었지만, 눈물까지 글썽이는 르안느를 바라보며 아셀은 긴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좀 더 빠른 거야.”
“뭐라고?”
“어떤 길을 걸을 때 빨리 걷는 사람이 있고 느리게 걷는 사람이 있잖아.”
“그게 뭐야..”
“그리고 두 발로 걷는 사람이 있고 기어서 가는 사람도 있고.”
아셀은 르안느를 바라보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너보다 잘 해내고 있지만 너도 이 정도는 금방 하지 않겠어? 그리고 내가 정령술은 잘하지만 너처럼 신성력 운용은 잘못하잖아.”
에프릴의 옆에서 정령을 부리는 것만으로 동기화가 올라가는 것과 다르게.
말릭과는 던전 이후로 만나지도 못했기에. 아셀의 신성력 운용 능력은 필드가에서처럼 정체 되어 있었다.
“아무튼. 괜한 이상한 생각하면서 주접 떨지 말고 너답게 행동해라.”
“주접이 아니라..”
잠시 무언가 고민하며 소리치려던 르안느는 피식 웃으며 지나가는 아셀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
“정화는 이런 식으로 하면 된다네.”
“흐음... 그래 그런 느낌으로 어라? 별로 안 했는데 벌써 지친 겐가?”
‘역시 동기화가 늘지 않아.’
틈틈이 오염된 농지들에 말릭이 했을 것 같던 것처럼 신성력을 불어넣어 주었지만, 아셀은 높아지지 않는 동기화에 인상을 찌푸렸다.
‘말릭이 와야...’
무한의 정령사 에프릴의 재능도 좋았지만 대륙 제일의 기사 말릭의 재능은 그 이상의 가치가 있었기에.
아셀은 서둘러 말릭이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믿음을 더 줘봐 믿음을! 계속 기운만 불어넣으려고 하니까 그런 거 아니야.”
“뭐야. 이제 멀쩡해진 거냐?”
“내가 이상해진 적이 있던 것처럼 말한다 너?!”
높아진 성기사들과의 호감도에 의해 그들에게 신성력에 대한 운용을 배우고 있던 아셀은 르안느가 평상시처럼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다가온 것을 바라보았다.
“믿음이 없으면 너처럼 멍청하고 우둔한 녀석은 평생 정화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걸?”
“그냥 두르려 팰 걸 그랬나..?”
중간중간에 욕설을 내뱉으며 웃는 르안느의 목소리에 아셀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것도 잠시.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품 안에서 초콜릿 하나를 꺼내 보였다.
“그리고 신성력 많이 사용하면 당 떨어지니까. 이거 먹어. 그냥 네가 쓰러지면 내가 챙겨야 하니까.”
“어 그래 고맙다.”
준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기에.
아셀이 무심하게 초콜릿을 받아들자 르안느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잠시 아셀을 노려보다 쿵쿵거리며 사라졌다.
‘역시 사춘기인 애들은..’
슬쩍 혀를 차며 아셀은 주위의 성기사들을 바라보았다.
‘타락의 징후는 전혀 없는 거 같은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순수함과 불을 상징하는 헤스티야교의 성기사들 답게 쉽게 호감도가 높아졌으며 대다수가 호인들.
아셀은 이들이 타락하게 되는 원인이 대체 어떤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에.
그는 곰곰이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신성력이 잘 안 되면 흙의 정령으로 정화를 해도 괜찮아.”
아셀이 고민에 잠겨 있는 것이 정화 때문인 줄 알았기에.
에프릴이 방긋 웃으며 아셀을 바라보았다.
“원래는 물의 정령이 좋기는 하지만, 그건 아직 계약 못 했으니까. 그리고 아셀 너라면 흙의 정령에게도 그런 부탁을 하는 게 가능할 거야.”
“흙의 정령으로요?”
아셀을 바라보는 에프릴의 두 눈에는 기대감이 가득 차 있었다.
벌써 이틀째.
전날에 정령 4마리와 계약하고 지금은 자신이 가르쳐주는 지식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아셀에게 가르치는 재미가 생겨났기 때문에.
“한번 해볼래?”
‘동기화는 19%.’
에프릴과의 동기화는 19%였다.
말릭과 사냥을 했었음에도 잘 오르지 않았던 동기화가 그녀와는 정화를 하면서 순식간에 올라간 것이었다.
“땅 좀 깨끗이 해봐라.”
“어허.. 아셀 정령에게는 친절하게 부탁해야 해. 그렇게 명령조로 말하면...”
에프릴이 했던 것처럼 아셀 또한 하급 흙의 정령에게 말하자 땅에서 소환된 녀석이 움찔거리더니 마치 밭을 가는 농부처럼 순식간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기화가 올라갔습니다.]
“얘. 얘네가 원래 이렇게 빨랐나?”
에프릴조차 이렇게 빠르게 움직이고 열심히 일하는 흙의 정령은 본 적이 없었기에.
혼란스러워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아셀이 눈빛을 반짝거렸다.
동기화 그것을 올릴 수 있는 기회였기에.
“에프릴님 더 가르쳐 주실 거는 없나요?”
자신을 바라보는 아셀을 바라보며 에프릴은 아셀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모두 수정해야 함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천재가 아니었네.’
천재 같은 말 따위로 단정할 수 없었다.
“괴물이었구나 아셀?”
***
1주일에 5일을 밖에서 오염된 지역을 정화시키고 고블린 시체를 소각시켰다.
오직 2일 동안만 여명 수도원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을 뿐.
아셀은 그 짧은 휴식 시간에서도 쉬지 않고 수도원을 조사했다.
“역시나 없어.”
후에 마경 중 하나가 되는 이곳에 수도 없이 많은 던전이 생겨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도 없는 상황.
혹시나 필드가에 숨겨진 던전 같은 것이 있을까 하고 조사해본 아셀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아셀! 레인 선배님이 장비 수리해달래.”
수도원을 수색하는 것과 동시에 아셀은 후에 말릭을 따라 타락하게 되는 신성 기사단을 조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접근하는 건 쉬웠지.’
그들에게 다른 성기사들처럼 무구를 수리해주며 호감도를 쌓는 것.
다행히 먼저 수리를 받은 성기사들과 어째서인지 아셀에 대한 자랑을 하고 다닌 르안느 덕분에 수월하게 일이 진행되었다.
“메이스네?”
대다수가 대검. 메이서 같은 무기들을 사용했기에.
아셀은 아르테스의 망치 부분으로 손쉽게 수리할 수 있었다.
“레인 선배님 다음은 팔룩스 선배님 그리고 아르만드 선배님이랑..”
르안느가 손가락을 접으며 이야기하는 목소리에 아셀은 피식 웃어 보였다.
“어디 가서 나 일 잘 한다고 소문이라도 내고 다니는 거야? 어떻게 그렇게 많이들 수리를 해달라고 하는지 모르겠네.”
“아.아니거든! 나는 그냥 네가 신성력도 제대로 못 다루는 게 안쓰러워서 선배들에게 조금 이쁨이라도 받으라고 말한 거뿐이거든?!”
붉은 머리처럼 붉어지는 르안느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셀은 그저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그냥 신성 기사단의 훈련장으로 가자. 오늘 안에 끝내려면 왔다 갔다 하기 귀찮으니까 말이야.”
뭔가 어색하게 고개를 푹 숙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르안느를 따라 아셀은 신성 기사단의 훈련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 아는 얼굴들이구만.’
말릭을 따라 타락했던 기사들이었기에.
이들과 수도 없이 싸워본 아셀은 신성 기사단의 얼굴을 알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쌍검의 페레나. 분쇄추의 레나. 모두 네임드 몬스터였는데...’
그중 희귀한 아이템을 주었던 녀석들이 멀쩡하게 살아 움직이는 모습에 아셀은 묘한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선배님들 아셀 데리고 왔어요!”
훈련을 하고 있던 몇몇 기사들이 방긋 웃으며 다가왔다.
그들에게 무구를 공짜로 고쳐주는 아셀이 반가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에.
“어디서 이런 복덩이가 들어왔는지 몰라.”
“그러게 말이야. 말릭 단장님이 역시 사람 보는 눈이 있으셔.”
“너를 단원으로 뽑은 거 보면 꼭 그런 건 아닌 거 같기도 하고..”
“뭐 임마?! 메이스 맛 좀 한번 볼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단장인 말릭의 성품에 걸맞는 기사단들.
아셀은 그들의 무구를 두드리며 그들의 옷차림 또한 살펴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숨겨진 재능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만약 이들 중에 마족들에 끄나풀이 있을 수도 있었기에.
아셀은 그들의 재능을 알아내는 것만으로도 마족의 끄나풀인지 알 수 있을 게 분명했으니까.
“흠.. 날 부분이 많이 상했네요. 어디 단단한 곳에 휘두른 거 같습니다.”
“그게.. 술을 마시고 바위에 검을 내려쳤더니 그만..”
날이 상한 검을 갈아주며 아셀은 방긋 웃어 보였다.
그림자 대장장이 한스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에. 간단한 수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버리자 몇몇 신성 기사단의 성기사들은 믿기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와아... 일반 대장장이들보다 더 뛰어난 거 같은데?”
“날이.. 날이 살아 움직이는 거 같아.”
‘뭔가 다른 점은 없는 거 같은데...’
마족에 대한 아무런 흔적도 없었고 타락에 대한 징후도 없었다.
아셀이 기억하는 배반의 기사 말릭과 타락 기사들이 맞는지 의구심마저 일어나고 있을 지경이었다.
“요즘 몸은 어떠십니까 괜찮으신가요?”
“응?”
“그냥 몸에 맞게 검을 조정해드리려고요.”
“아! 그런 의미였구나. 우리야 튼튼한 거 빼면 쓸모가 없지.”
성기사들의 무기를 조정해주며 슬쩍 물어봤지만, 그들에게서 별다른 정보를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최근에 이상하게 있다면 새로 만든 우물을 마시고 복통이 조금 온정도?”
“그것도 얼마 가지는 않았지만.”
“맞아 원래 새로운 물을 마시면 물갈이 한번 하는 거지 뭐.”
“?!”
‘우물?!’
우물이라는 말에 아셀의 눈이 번쩍 뜨였다.
망치질을 하고 있던 손을 내려놓을 정도로!
“아셀 무슨 문제 있니?”
“표정이 안 좋은데?”
“혹시 못 고치는 거라도 걱정하지 말아. 애초에 이렇게 도와주는 것도 우리한테는 정말 도움이 됐거든.”
“맞아 맞아 필요한 게 있으면 다 말하라고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줄게!”
무구를 공짜로 손질해주고 심지어 더 좋은 상태로 만들어주었기에.
신성 기사단이 아셀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진 모습들이었다.
이 모습에 어째서인지 르안느가 뿌듯하다는 표정을 짓는 것도 잠시.
아셀은 무언가 상념에서 벗어난 표정으로 눈앞에 신성 기사단을 바라보았다.
“그 우물이라는 곳 어디에 있습니까?”
‘내 예상이 맞다면. 아니 분명 맞을 거다.’
아르테스를 쥐고 있는 아셀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
신성 기사단이 알려준 우물은 그들의 훈련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지하수를 끌어와 만든 우물.
우물 주위에는 헤스티야의 조각상마저 세워져 있어 물을 알아서 정화시켜 주게 만들고 있었다.
“어째서 이건 짐작하지 못했을까.”
신성력을 사용하는 자들. 그들에게 정화란 기본적인 소양이었기에.
어쩌면 아셀이 지금 같은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화로도 못 풀어내는 것들이 있는데 말이지.”
투마리스가 준 황금활 기온을 등에 메고 허리춤에는 아르테스를 메고 있었다.
완전 무장을 할 만큼 지금부터 들어갈 곳은 위험했으니까.
‘우선..’
투마리스의 가죽 갑옷을 착용한 아셀이 민첩하게 우물 위로 올라섰다.
정화가 계속 유지 되었기에 일반 우물보다 깨끗하고 신성해 보이기까지한 우물의 물이 먼저 아셀의 눈에 들어왔다.
“역시나..”
직접 마주한 아셀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투마리스의 날카로운 눈썰미가 아셀의 생각하고 있던 그것이 맞음을 알아차리게 해주었으니까.
“우물 주위에도 풀이 없어. 역시 정답은 페러사이드였어!”
이런 맑은 물이 있는 우물 주위에 풀 한 포기 없었다.
그것이 이 우물 안에 정화로도 없애지 못하는 페러사이드. 그것이 있음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