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무한의 정령사
아셀의 깊은 고민은 놀랍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 아이가 말릭 경의 새로운 제자입니까?”
“오 자네는?”
‘어라?’
목소리가 들린 곳에서 사람이 나타났다.
바닥에서 마치 흙이 올라와 사람의 형상으로 만들어지더니 이윽고 나타난 여자를 바라보며 아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무한의 정령사 에프릴!’
마법사들이나 쓸 거 같은 거대한 모자에 백금의 머리색. 신비로운 분위기의 여자가 아셀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한의 정령사 에프릴.
아셀은 그녀가 소환하던 3마리의 정령왕들이 마계 군단장들과 대등하게 싸우던 것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반드시 그림자를 가져올 사람이었긴 했는데...’
에프릴 그녀는 정령사 특유의 자유로움을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었다.
게임을 했을 적에도 그녀를 발견했다는 유저들은 그날 복권을 샀을 정도로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을 정도였기 때문에.
“에프릴님! 언제 오신 거예요?!”
“르안느. 오랜만에 보니까 너무나도 좋구나.”
에프릴의 손에서 바람이 일어나더니 르안느의 몸을 붕 뜨게 만들었다.
“하하하 간지러워요. 에프릴님!”
잠시 르안느와 놀아주던 에프릴이 이윽고 아셀을 바라보며 묘한 눈빛을 보냈다.
“재미있는 아이를 제자로 받아들이셨군요?”
“자네도 느끼고 있나?”
“예. 본인 능력이라기보다는..”
잠시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턱을 쓰다듬던 에프릴이 빙그레 웃음 지었다.
“어떤 물건에서 정령사의 기질이 느껴지는군요.”
“?!”
정령사의 기질이라는 말에 주위의 모든 존재들이 놀라워할 수밖에 없었다.
순수함과 불.
그것은 여신 헤스티야의 상징이었기에.
그들은 신성력을 사용하는 와중에도 순수함의 상징인 정령들과의 교감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었다.
“애야 너 혹시 특이한 물건 하나 가지고 있지 않니?”
에프릴이 아셀의 눈을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정령사의 기질이라니..”
“역시 말릭님의 제자로 선택될 만한 아이 아닌가.”
주변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헤스티야의 성기사로서 정령을 소환할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들이 수련하는 방법 중 하나였기 때문에.
‘말릭의 경우도..’
여신에게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듯.
완성된 무인임에도 말릭은 상급 정령 한 마리를 소환할 수 있는 무인이었다.
“특이한 물건이요?”
“응! 네게서 뭔가 특이함이 느껴지는 걸 정령들도 지금 네 존재에 수군거리고 있어.”
에프릴의 시선이 점점 아셀의 품 안에 있는 만년설이 꽃이 있는 곳에 고정되기 시작했다.
“그게 뭔지 내게 알려줄래?”
주변의 시선이 모두 아셀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정령사 에프릴이 관심을 가질만한 물건을 지금 아셀이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되었기 때문에.
“음... 여기서는 조금 그런데요.”
“아! 뭔지 알겠다. 하기야 그런 민감한 물건을 사람들 앞에서 내보일 수는 없지. 암암. 그렇고 말고.”
혼자서 무언가 깨달았는지 에프릴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방긋 웃어 보였다.
“말릭 경. 이 아이 제가 잠시 데려가도 될까요?”
“데려간다는 건?”
“정령사의 자질이 있어보여서. 제가 조금 확인하고 싶어서요.”
에프릴의 말에 르안느의 표정이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르안느 또한 수년간 정령들과의 교감을 위해 노력했지만 아무런 재능이 없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럴 수가.. 이 얼마나 경이로운 날인가.”
“그러게 말일세. 성배에 성수가 채워지고 말릭 경의 제자가 정령사의 자질 또한 있다니!”
“참으로 여신께서 도우신 날일세.”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흠.. 자네라면 내 제자에게 큰 도움이 되겠지. 좋아. 대신 아셀과 함께 고블린 시체들을 정화시켜 주었으면 좋겠네.”
“그것도 제가 받은 의뢰이니 오히려 일손이 늘어나면 저야 좋지요.”
에프릴은 정령사긴 했지만 당연히 여명 수도원의 협력 관계이지 소속이 아니었다.
“좋아 그러면 아셀을 잘 부탁하네.”
“자 어떠니 말릭 경도 허락하셨는데?”
다시 한번 아셀에게 묻는 에프릴의 말에서 그녀가 상대방을 얼마나 배려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건 기회다.’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찾아왔을 때 거절하는 것은 미련한 일이었다.
심지어 에프릴처럼 대륙에서 만나기 힘든 존재의 그림자를 가져올 수 있는 기회는 더욱더.
“제가 부탁드리겠습니다. 에프릴님.”
***
말릭을 전송하고 에프릴을 따라 도착한 곳은 평범한 연무장이었다.
‘정령이라..’
게임을 했을 적 심심해서 하급 정령 몇 마리와 계약했던 기억이 떠오른 아셀은 에프릴의 모자를 만들고 있던 손을 바라보며 피식 웃어 보였다.
‘완전 꽝이었지만.’
랜덤.
정령에 대한 것은 재능이 있다고 해도 어떤 정령과 계약할지 그리고 그 정령이 계약자의 말을 들을지 미지수였다.
일례로 정령왕과 계약한 한 유저는 자신을 공격하는 변덕스러운 정령왕에게 몇 차례 목숨을 잃고 캐릭터를 새로 키워야 했었으니까.
“세상에 정령은 많고 우리는 그 일부분만 알고 있단다.”
연무장에 도착한 에프릴은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듯 아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 품에 있는 것 그것도 아직 우리 정령사들이 모르는 그런 거겠지?”
“보여 달라고 하시잖아. 어서 보여드려 봐.”
어째서인지 르안느가 따라온 상황이었지만 아셀은 별 상관없다는 듯 품 안에서 만년설이 꽃을 꺼내 보였다.
“우와 이건 생각 이상인데 아셀?”
“너 이거 이거 어디서 난 거야?!”
에프릴과 르안느는 아셀이 꺼내든 만년설이 꽃에 놀라워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정령사인 에프릴은 만년설이 꽃이 어떤 것인지 벌써 짐작했기에.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평상시에 발견할 수 없던 욕망마저 일어났다.
“흐음... 알았어 알았어 강제로 안 뺏을 거야. 너희들은 나를 어떻게 나를 그렇게 보는 거야?”
에프릴과 계약한 정령들이 말을 걸었는지 그녀가 허공에 손을 흔들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랑 거래하자 아셀.”
“거래요?”
“그래 불확실한 일에 매달리기 보다는 확실한 일에 매달리는 게 좋지 않겠어?”
어떤 말이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셀은 에프릴이 꺼내든 방패를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에. 에프릴님 그건 설마 [새벽의 종] 아니에요?”
“맞아. 저번에 주교님이 내려주신 임무를 완벽하게 해결하고 보상으로 받은 거야!”
“맙소사... 새벽의 종이라니. 아셀이 들고 있는 꽃이 그 정도 가치가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음.. 그 이상?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 중 아셀에게 필요할 거 같은 것중에 이게 그나마 가장 가치가 높으니까. 어쩌면 조금 부족할 수도 있겠다.”
방긋웃으며 방패를 들이미는 에프릴을 바라보며 아셀은 너털거리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확실히 좋은 물건이지.’
여명의 수도원.
그곳에서 내려주는 수많은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주교급 이상의 인물들의 호감을 얻어야 얻을 수 있는 물건이었다.
“절대방어.”
“오! 아셀 아는구나?”
새벽의 종.
그것이 좋은 아이템인 이유는 그 어떤 공격도 하루에 단 한 번 방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걸로 그때.’
몇몇 유저들이 이 방패로 수많은 기적을 일으켰었기에.
조금 탐이 나는 물건이었지만 만년설이 꽃에 비하면 부족한 물건이었다.
“좋은 제안이지만 저는 정령과 계약해보고 싶습니다.”
“어라.. 야. 그건 너무 불확실한데. 정령과 계약한다고 해도 네가 그 꽃으로 불러낼 정령과 계약할 가능성은 적을 텐데..”
에프릴의 말이 맞았다.
말릭의 그림자를 불러오고 있는 지금. 아무리 노력해도 만년설이 꽃으로 불러낼 눈의 정령과 계약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래도 시도는 해보고 싶네요.”
“하아.. 안 돼.. 안 돼 그런 귀중한 재료가 한순간에 없어지게 할 수는... 네가 원하는 건 다 줄 테니까 제발 주면 안 될까?”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는 에프릴에게 아셀은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단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죄송합니다. 에프릴님 그리고 저는 성공할 자신이 있어요.”
어느새 에프릴이 쓰고 있던 모자가 완성되었기에.
아셀이 그녀와 똑같은 모자를 착용하자 그의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무한의 정령사 에프릴의 모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림자 재단의 효과가 발동됩니다.]
[원단의 효과로 8% 동기화가 올라갑니다.]
[순수의 상징. 정령들에게 경외와 사랑을 받는 존재. 정령술에 특화된 코어. 끝을 알수 없는 그릇. 특성이 구현됩니다.]
[동기화 7%.]
[스탯이 재분배됩니다.]
[유지 시간 1시간.]
에프릴의 특성은 모두 사기적인 것들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어라.. 너 지금 뭐가 변했는데?”
아셀을 바라보고 있던 에프릴의 눈동자가 점점 커지더니 이윽고 믿기 힘들다는 듯 중얼거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 꽃에서밖에 정령에 대한 재능이 없었는데. 지금은 안에서부터 정령술에 대한 재능이 보이잖아. 맙소사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래?”
“너 또 뭘 한 거야?!”
에프릴과 르안느의 말에 그저 어깨를 으쓱거리며 아셀은 아무거도 아니라는 듯 입을 열었다.
“그냥 착각이시겠죠. 저 그런데 정령들하고 계약해보고 싶은데..”
“어.. 어... 좋아. 나도 갑자기 네가 해낼 수 있을지 궁금해지기 시작했거든. 지금 바로 도와줄게!”
아셀을 믿기 힘들다는 듯 바라보던 에프릴이 황급히 바닥에 마법진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꽃을 손에 들고 이 위에 올라서 있으면 돼.”
“그럼 끝인가요?”
“음.. [아스트랄] 안에서 길을 잃지만 않는다면 별문제 없어.”
정령들의 세계 아스트랄.
그곳에 들어가 볼 수 있다는 말에 아셀의 몸에 흥분감이 차올랐다.
‘바로 발견할 수 있을까?’
정령계에서 눈의 정령.
그것을 발견하고 바로 계약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던 것도 잠시.
에프릴이 무언가 중얼거리자 바닥에 있던 마법진이 환한 빛을 토해내며 아셀의 몸을 뒤덮기 시작했다.
‘음?’
눈부신 빛 때문에 눈을 감았다가 뜬 아셀은 자신의 몸이 마치 물속 안에 있다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여기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사방에는 그저 백색의 공간.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이 이질적인 공간에서 아셀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잠겨 있던 것도 잠시.
그의 귓가에 거대한 기운을 가진 존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기한 녀석이 왔군.]
[우리들의 계약자라고 착각했다.]
[믿기지 않아. 어떻게 우리들을 착각하게 만든 거지?]
거대한 불 그리고 번개 토산.
그것들이 아셀의 눈앞에 나타났다.
‘정령왕들..’
에프릴이 계약한 정령왕들이 분명한 상황.
그들은 아셀을 바라보며 놀랍다는 듯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것도 재미있겠군.]
[나도 찬성이야.]
[그럼 제안은 나도 하지.]
재미있겠다는 듯 서로 웃던 그들 중 거대한 불로 이루어져 있던 불의 정령왕이 거대한 코끼리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아셀의 앞에 나타났다.
[그대 우리들과 계약하지 않겠나?]
무려 세 마리의 정령왕들이 한 번에 아셀에게 계약하자고 제안한 것.
정령사들의 역사에는 전혀 없던 일들이었다.
‘분명...’
에프릴과 똑같은 기운을 지니고 있었기에. 녀석들이 흥미를 가지고 제안을 한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세 마리의 왕급 정령과 계약하면 그 밑에 있는 하위 정령들은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이점이 존재했다.
[좋은 기회라 생각한다.]
[인간들 사이에서는 이런 경우에 대박터짐. 이라고 하지 않나?]
정령왕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셀은 피식 웃어 보였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