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필드가로
페이크 월드.
게임 속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가장 메인이 되는 이야기는 7명의 용사들이 마왕을 무찌른 역사에서 시작 되었다.
‘필드가.’
덜컹거리는 마차에서 아셀은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용사가문의 후예들은....’
아셀이 게임을 플레이했을 적에는 대다수 마족들에게 이미 죽임을 당한 상황이었다.
필드가에 대한 정보가 아셀의 기억에 의존하는 것도 게임 속에서는 진즉에 멸망 당했기 때문에.
용사의 후손이라는 npc중 기억에 남는 존재들은 아셀의 머릿속에 얼마 되지 않았다.
‘몇 안 되는 녀석들...’
모두 그림자 재단으로 재능을 흡수할 값어치가 있는 녀석들이었다.
아셀은 생각에 잠기며 창밖에 보이는 파도가 치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긴장되더냐?”
생각에 잠긴 아셀의 모습에 말릭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가출했다고는 해도 내가 아는 유론이라면 분명 너그럽게 이해해 줄 거니 걱정하지 말거라.”
“글쎄요...”
“어린 나이에 일탈도 해볼 수 있는 법이지. 나도 이런 말 하면 부끄럽지만 어린 시절 수도원이 너무나 답답해서 도망친 적도 있단다.”
“스승님이요? 에이 설마요?”
“정말이란다. 르안느. 모든 사내들은 가슴속에 불꽃을 가지고 있어서 때로는 가슴이 뜨거워 견딜 수가 없어질 때도 있는 법이지.”
“쟤는 안 그럴 거 같은데요? 생긴 것도 불꽃하고는 영...”
마차 안에는 말릭. 그리고 그의 제자인 르안느도 함께 있었다.
“너는 불꽃이 있는 거 같아.”
“뭐?”
“근데 가슴이 아니라 머리에 있는 거 같다. 내가 알기로 그런 사람들은 대게 정신에 문제가 조금 있거든.”
아셀이 빙글빙글 손가락을 돌리며 말하자 르안느의 표정이 급격하게 붉어지기 시작했다.
“너..너!”
“허허.. 사제들간에 싸우는 건 좋지 않단다. 다들 진정하거라.”
르안느와 아셀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말릭을 바라보던 아셀은 넘실거리는 파도 그리고 절벽 위에 세워진 고성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필드가...’
바다에서 왔다는 용사 [에밀 필드]의 후손들.
조상이 왔다는 바다에 세워진 고성 [아메라.]
용사들 가문에 대한 접점이 없어도 저곳은 아셀이 게임을 플레이했을 적에 자주 찾던 곳이었다.
“성이 아니라 사냥터였지만.”
지금은 필드가의 고성이지만, 당시에는 아메라의 비명 소리라는 던전이었던 것을 떠올린 아셀이 피식 웃음 지었다.
“흐음.. 도착한 거 같구나.”
성으로 가려면 아직 멀었건만, 어째서인지 마차는 한참 남은 곳에서 세워졌다.
‘허어.....’
창밖으로 보이는 수많은 기사들.
그들이 모두 화려한 갑옷을 입고 있는 모습들이 아셀의 눈에 들어왔다.
“성검 말릭님을 위하여!”
말릭과 르안느가 마차에서 내리자 수많은 필드가의 기사들이 일제히 검례를 올리는 모습이 아셀의 눈에 들어왔다.
‘만약 나 혼자 왔다면..’
파도는 구경도 하지 못하고 검례를 올리고 있는 기사들에게 조롱이나 당하고 여기서 쫓겨날 것이 분명했다.
르안느 또한 아셀과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아셀을 바라보았다.
“허어.. 내 분명히 그저 조용히 유론을 만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거 너무나도 번거롭게 한 거 같구만.”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릭이 기사 한 명 한 명에게 눈을 맞추며 인자한 미소를 보내주었다.
“그럴 수 있겠습니까? 성검께서 필드가를 방문해 주시는데요.”
“호오 자네는?”
기사들 사이로 푸른 머리의 아이가 걸어왔다.
아셀과 마찬가지로 아쿠아색의 머리에 자신감 넘치는 표정. 거기다 허리에 차고 있는 검.
녀석을 발견하자 아셀은 자신의 손이 미약하지만 떨리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심지어 투마리스의 가죽 갑옷을 착용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필드가의 첫째 아르센이라고 합니다. 말릭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으응? 첫째? 그게 무슨 소리인가 첫째는 분명 여기 있는 아셀이 아닌 건가?”
말릭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도 잠시. 아르센은 고개를 들고 말릭의 옆에 서있는 아셀을 발견하고는 눈살이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네.. 네가 어떻게 여기에?”
마치 네가 어째서 거기 있는지. 어째서 말릭 같은 위대한 기사 옆에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
그것을 바라보던 아셀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형한테 ‘네가’가 뭐냐 ‘네가’가.”
“하! 네가 형이라고?”
아르센이 무언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말릭의 앞이었기에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우물거리는 것이 아셀의 눈에 들어왔다.
괜히 말릭 앞에서 가정사를 말하기 싫은 것이 분명한 상황.
그는 잠시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말릭을 바라보며 방긋 웃어 보였다.
“후우.. 일행이 있으셨군요.”
“분명 유론에게 전했는데 아무래도 깜빡한 거 같네.”
“아버님이라면 그러실 겁니다. 저런 쓰레기는 기억에 담아 두시지 않으시거든요.”
“푸하하 쓰레기래 쓰레기.”
르안느가 아르센의 말에 기분이 좋다는 듯 웃어 보였다.
“르안느 누님도 오랜만이시군요. 잘 지내셨습니까?”
“잘 지내지. 그런데 어째 형제가 참 다르다. 한 명은 엄청 싹싹한데 다른 한 명은 싸가지가 없고 말이야.”
“들었지 아르센? 얘가 너보고 싸가지 없대.”
르안느의 말에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아셀은 기사들 사이를 걷기 시작했다.
말릭 보다 먼저 기사들 앞을 걷자 몇몇 기사들은 대놓고 불쾌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이 검례를 올리는 사람은 아셀이 아닌 말릭이었기 때문에.
“거 다들 환영해줘서 고맙다.”
그런 기사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기에 아셀은 씨익 웃으며 대놓고 불쾌함을 나타내는 녀석들의 어깨를 토닥여주기까지 했다.
“저 새끼가 왜 저러지?”
아셀의 변화된 모습에 아르센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
‘그때는 이게 부서져 있었는데...’
거대한 고성.
대륙을 구한 7명의 용사의 후손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웅장한 고성에 세워져 있는 동상.
아셀은 필드가의 시조 에밀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동생하고 사이가 좋지 않은 거 같구나.”
아셀의 뒤로 말릭이 다가와 안타까운 듯 바라보았다.
그 표정에 그저 어깨를 으쓱거리는 것도 잠시.
자신과 말릭이 친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티나게 질투하는 아르센을 발견한 아셀이 씨익 웃어 보였다.
“싸우면서 크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더냐? 그래도 형재간에는 우애가 좋아야 한단다.”
말릭의 말에 아셀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지금 자신을 죽일 듯 바라보는 아르센이 자신을 노예로 팔아넘기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말릭이 과연 지금처럼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생겨났지만.
“가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성에서 내려온 집사장이 말릭을 안내했다.
노년의 집사도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지 유론이 있는 곳으로 가는 도중에 아셀을 힐끔거렸다.
“내 얼굴에 뭐 뭍었어?”
“아닙니다. 오랜만에 보니 좋아서 그랬습니다.”
“좋기는 무슨.”
집사의 말에 아셀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에게 뵙니다가 아니라 보니라고 한 것. 존댓말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것에서 아셀이 이곳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제대로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고성의 한 곳.
아셀은 저 문을 바라보고 있자 갑자기 온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가주실...’
아셀의 기억에 전혀 좋은 곳이 없는 곳이었다.
가주실에서 칭찬을 받던 다른 형제들과 다르게 아셀은 유론에게 사람 취급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었기 때문에.
“야 너 괜찮아?”
시종일관 아셀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르안느마저 새하얗게 변한 아셀의 얼굴을 걱정하며 입을 열었다.
옆에 있는 아르센은 그럼 그렇지 저 등신이 하는 표정으로 아셀을 바라보는 것도 잠시.
말릭이 문을 여는 것과 함께 아셀은 드디어 자신의 아버지 유론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랜만이네 유론 잘 지냈는가.”
거대한 창문에 요동치는 파도를 바라보며 뒷짐을 서고 있던 유론이 뒤돌았다.
허리까지 내려와 있는 아쿠아색 머리. 50대가 넘었지만 여전히 20대로밖에 보이지 않는 젊은 외형.
수염만 없다면 아셀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유론은 무심한 눈으로 말릭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었군.”
“무엇이 정말이라는 말인가?”
“내가 가져다 버린 쓰레기를 자네가 주웠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네.”
유론의 차가운 시선에 아셀은 자신의 몸이 굳었다는 사실에 속으로 혀를 찼다.
‘아직인가?’
아셀 본인의 몸이 투마리스의 가죽 갑옷을 입고 있는 와중에도 유론을 마주하고 겁에 질린 것이 분명했다.
“아들에게 쓰레기라니. 그건 너무 심한 거 같은데...”
“하나 묻겠네 말릭.”
점점 다가오는 유론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인상을 찌푸렸다.
“자네는 나를 조롱하기 위해서 이곳에 온 건가?”
“조롱이라니?”
“그런 게 아니라면 어째서 저런 쓰레기를 자네 제자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한 것인가?!”
고성이 가주실을 가득 채웠다.
제자로 받아들인다는 말. 그것은 가주실 근처에 있던 기사들은 물론 이곳까지 일행을 이끌고 왔던 집사마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뜨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들에게 아셀은 코어도 생성시키지 못한 등신에 머저리였으니까.
‘아셀이 말릭 경의 제자가 된다고?’
‘어찌 이런 일이?!’
시종들과 기사들이 서로 눈치를 보는 것도 잠시.
믿겨지지 않아 눈을 껌뻑이고 있던 아르센이 무언가 분한지 얼굴을 붉히며 말릭을 바라보았다.
“말릭 님 이건 이상합니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해요!”
질투.
아셀은 아르센의 붉어진 얼굴과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바라보며 녀석이 자신을 질투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기야 대륙 제일의 기사의 제자가 되는 것은 모든 젊은이들의 꿈과도 같은 일이었기에.
“어째서 저딴 병신을 제자로 받아들일 수 있단 말씀이십니까?!”
“내가 누구를 제자로 받아들이건 그건 내 자유라네 젊은 필드가의 아이여.”
소리치는 유론과 아르센이 슬슬 지겨운지 인상을 찌푸린 말릭이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나야말로 자네가 어째서 이 아이의 재능을 못 발견했는지 의문이구만.”
아셀은 자신의 양어깨에 손을 올리는 말릭의 손에서 신뢰감을 느낄 수 있었다.
“재능? 하.... 말릭.”
말릭의 말에 잠시 손으로 이마를 짚던 유론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좋아. 좋아 자네가 내가 버린 쓰레기를 재활용하든 태우든 나는 신경 쓰지 않겠네. 어차피 내가 버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그렇다는 건?”
“녀석을 제자로 받아들이던 아무런 신경 쓰지 않겠다는 소리네. 뭐 우리로서도 나쁘지 않겠군. 필드가의 머저리를 이런 식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게 말이야.”
유론의 시선에 아셀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계속된 유론의 비아냥에 참는 것에 한계가 왔었기 때문에.
“거.. 아들에게 말이 조금 심한 거 아닙니까?”
아셀의 중얼거림에 주위의 모두가 순식간에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설마 아셀이 이런 식으로 유론의 말에 토를 달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직 아셀이 이 집에서 어떤 취급을 받은지 몰랐던 말릭과 르안느만이 갑자기 조용해진 필드가의 사람들을 의아한 듯 바라볼 뿐이었다.
“잘 되면 칭찬이나 조금 해주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쓰레기니 재활용이니 하는 거죠?”
처음 보는 아들의 모습에 유론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화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