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그림자 재단사
그림자 재단사.
게임 초장기에 그 사기적인 능력으로 페이크 월드의 주가를 한순간 반 토막까지 내버렸던 직업.
아셀은 그 어마어마한 위명에도 불구하고 호숫가 바닥에 잠들어있던 보물 상자를 손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원래 이런 게임이지.”
상자를 호숫가 위로 끌어올린 아셀은 평범한 나무상자처럼 보이는 상자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페이크 월드에서 이런 일은 그리 놀라운 게 아니었다.
몇 년에 걸친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받은 보상이 10골드뿐이었던 이야기들도 있었으니까.
‘서둘러야 해..’
이곳까지 달려오고 호숫가의 바닥에서 이걸 들어 올린 것.
평상시의 아셀이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분명 이곳까지 달려오다가 지쳐 쓰러졌을 게 분명한 상황.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집념이 지금 같은 일들을 가능하게 해준 것이 분명했다.
“푸하..”
굳게 닫힌 상자를 여는 데 남아있는 모든 힘을 쓴 것 같았기에.
아셀이 현기증 나는 머리를 잠시 부여잡는 것도 잠시.
그는 상자 안에 황금색으로 빛이 나는 비단 3필과 고급져 보이는 바늘과 실들 그리고 검은색 책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것이!’
쿵쿵거리는 심장의 고동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페이크 월드에서 가장 희귀하다는 그림자 계열의 직업.
그중 그림자 재단사로 전직할 수 있는 책이었기 때문에.
황금으로 빛이 나는 비단을 뒤로하고 책을 집어보는 것도 잠시.
아셀은 자신의 그림자가 솟아올라 자신을 감싸기 시작하는 놀라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후인이여.. 그대는 [그림자들]의 원통함을 풀어줄 수 있는가?
머릿속으로 알 수 없는 음성들이 들려왔다.
그것이 게임에서 들려왔던 시스템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도 잠시.
아셀의 눈앞으로 수많은 장면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죽여라!
-여기에 그림자들이 있다!
-이 바퀴벌레 같은 놈들 끈질기구만!
기사들 그리고 마법사 정령사. 모든 사람들이 검은색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는 사람들을 사냥하듯 학살하는 모습이 아셀의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우리에게 이럴 수 있는가!
-같이 마왕을 쓰러트린 전우인 우리를 어찌 이렇게!
-하늘이 두렵지도 않은가!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는 그림자들은 죽어가며 절규하고 원망 어린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인데.’
현실에 있을 때 아셀은 [그림자]들의 이야기를 그저 인터넷에서밖에 듣지 못했다.
페이크 월드 역사에서 마왕을 무찌른 7명의 용사들은 메인 스토리에 해당하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리고 용사들을 도와 함께 싸웠던 황금 기사단. 마탑 그리고 그림자들.
이중 그림자들은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들처럼 토사구팽당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심지어 10년 전 게임에서는 그림자들을 토벌하는 퀘스트도 있었던 상황.
이들이 사실은 마족들의 계략으로 같은 인간들에게 토사구팽당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9차례 몬스터 웨이브 중 7번째 마룡들의 침공이 끝났을 때였다.
-후인이여.. 그대는 우리의 이런 억울함을 해결해줄 수 있는가?
다시금 머릿속으로 알 수 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것에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고 아셀이 고개를 끄덕이자 주위의 그림자가 마치 기뻐하듯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대는 나를 따라 재단사의 길을 걷게 되리라.
[그림자 재단사로 전직하셨습니다.]
[재능에 손재주가 추가되었습니다.]
[그림자 재단을 익히셨습니다.]
[코어가 생성되었습니다.]
그림자가 없어지고 아셀은 놀라운 눈으로 눈앞의 메시지들을 바라보았다.
그림자 재단사로 전직한 것은 물론 4가지밖에 가질 수 없는 재능 중 손재주가 또 하나 추가된 상황.
“말도 안 돼...”
더 놀라운 것은 아셀의 몸 안에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코어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었다.
마나에게 혐오 받는 몸.
형래가 아셀에게 설정한 저 쓰레기 같은 재능 때문에 다른 형제들이 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코어를 생성한 것과 다르게 아셀은 15살의 나이에도 전혀 코어를 생성하지 못했다.
그런 아셀이 그림자 재단사로 전직하며 코어를 생성한 것.
지금은 비록 작은 코어였기에 별다른 효과가 없을 것이 분명했으나 마나에게 혐오 받는 몸에 코어가 생성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일단 지금은 이럴 시간이 없어.”
몸 안에 마나가 조금씩 돌기 시작하자 그동안 없던 활력이 조금씩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셀은 지금 자신의 몸 안을 탐구할 시간이 없는 상황.
그는 황급히 상자 안의 황금색 비단을 꺼내 보였다.
‘누굴.’
그림자 재단사.
이 사기적인 직업은 직접 봤던 대상의 옷을 똑같이 만들면 그 대상의 능력과 직업 심지어 재능까지 따라 할 수 있었다.
게임에서는 레벨과 숙련도에 따라 구현되었던 것이 달랐던 상황.
그마저도 너무나도 사기라는 평가를 받았기에. 발견되고 나서 연속적으로 너프를 맞았었다.
“어떻게 나올지 생각할 시간이 없어.”
숲속이 점점 고요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 슬슬 사냥이 끝이 나고 용병들이 도망간 아셀을 찾기 위해 수색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게 분명했다.
서둘러 누군가의 옷을 비슷하게라도 만들어야 하는 상황.
눈썰미와 미적 감각.
이 재능이 아셀의 머릿속에 그동안 봐왔던 사람들의 옷차림을 정확하게 떠올리게 만들어주었다.
“아.”
용병들의 옷차림을 똑같이 만들어봤자 녀석들의 손에서 벗어날 리 없었다.
기껏해야 용병 나부랭이였기 때문에.
머릿속에서 무언가 떠오른 아셀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이걸 이렇게.”
옷을 처음 만들어보지만, 어째서인지 아셀은 튜닉을 제대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재단사로 전직한 것과 눈썰미와 미적 감각 손재주가 주는 재능이 분명한 상황.
슬쩍 긴장되는 마음으로 튜닉을 입어본 아셀의 눈앞에 놀라운 메시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롬마니아 기사단의 단장 군림보의 튜닉을 비슷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림자 제단의 효과가 발동됩니다.]
[원단의 효과로 2% 올려줍니다.]
[용기. 중급 검술. 미천한 오러의 재능. 기마술. 재능이 구현됩니다.]
[동기화 7%.]
[스탯이 재분배됩니다.]
[유지시간 1시간.]
“떨림이 멈췄다.”
겁쟁이 특성 때문에 시종일관 떨려왔던 자신의 손이 멈추었다.
그것과 다르게 몸 안에서 솟아오르기 시작한 용기들.
동기화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나 지금 아셀은 어째서인지 용병들이 모두 덤벼도 질 것 같지 않았다.
“레벨과 스탯은 분명.”
게임에서는 상태창으로 레벨과 스탯을 볼 수가 있었으나 게임 속에서는 불가능했기에.
이것이 어떻게 구현되는지 아셀이 고민하는 것도 잠시.
근처의 수풀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보고 싶었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하 이 등신 같은 게 진짜 등신 같은 짓을 했네?”
“털보...”
아셀을 배신하고 노예로 팔아버린 4명의 배신자 중 한 명.
녀석은 비릿한 웃음과 함께 한 손에는 단검을 들고 아셀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 등신아. 도망가려면 그래도 멀리 도망이라도 가는 노력이라도 해보지. 진짜 한심하구만. 네놈도.”
쯧쯧거리며 다가온 털보는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아셀의 푸른 눈동자에 자신도 모르게 흠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 자식이 뭐가 조금 다른 거 같은데?’
분명 자신의 눈만 마주쳐도 온몸을 벌벌 떨던 것과 다르게 지금은 그저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고 심지어 여유로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 잠깐만 네놈 옷 꼬라지는 그게 뭐야?”
“네게는 갚아줄 게 하나 있지.”
털보는 황금색 비단으로 만든 튜닉을 입고 있는 아셀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털보는 아셀에게 받은 위화감이 고급져 보이는 옷이라고 착각하는 데 그리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방금 전까지 자신을 보며 겁에 질렸던 녀석이 한순간에 바뀌었다는 것은 웬만해서는 믿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갚아줄 거? 너 진짜 죽고 싶냐?”
슬쩍 살기를 담아 아셀을 노려보던 털보는 이내 흠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겁먹고 떨 거라 생각했던 녀석이 근처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들고 자신을 겨루었기 때문에.
“너 지금 뭐 하는?”
털보의 예상이 맞았다.
아셀 본인이었다면 분명 겁먹고 떨며 털보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용서해달라고 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롬마니아 기사단장 군림보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상황.
군림보의 재능 용기가 아셀의 성격을 바꾸어 주었으며 믿기지 않는 속도로 휘둘러지는 나뭇가지가 아셀에게 없던 검술의 재능이 생겨났음을 보여주었다.
쉬익
나뭇가지라고는 믿기지 못할 정도의 속도로 휘둘러진 나뭇가지가 털보의 손등을 가격했다.
“헉!”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 것은 털보가 나뭇가지 한 번에 부러진 자신의 오른손을 발견했을 때였다.
“오.오러?!”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동안 아셀을 옆에서 봤을 때 코어 하나 만들지 못한 등신 머저리였던 녀석이 갑자기 나뭇가지에 오러를 불어넣은 것이 눈앞에 보였으니까.
“너는.”
익숙지 않은 왼손으로 재빠르게 단검을 뽑아 들어 봤지만, 그보다 아셀의 나뭇가지가 휘둘러지는 것이 빨랐다.
쉬익!
파공음을 내며 달려든 나뭇가지. 그것은 이번에는 털보의 왼손과 녀석의 왼쪽 허벅지를 가격하는 데 성공했다.
“오늘 죽는다.”
아셀의 선고와도 같은 말에 털보는 그제야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게 되었다.
“아.아셀 진정해...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오해?”
“그. 그래 으.으악! 그만.. 그만!”
오러가 담긴 나뭇가지. 그것은 털보 같은 일반인이 체감하기에 쇠몽둥이로 맞는 것과 비슷했기에.
계속해서 휘둘러진 나뭇가지에 털보는 온몸의 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계속해서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만해줘 그만.. 그만 그만해주세요.”
눈물까지 질질 흘리며 고통에 부들부들 떠는 녀석을 내려다보며 아셀은 긴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이런 녀석 따위에게...’
아셀이 배신당하고 비참하게 노예로 팔아 넘겨질 뻔했다는 사실이 우스워질 지경.
몸을 가누지 못하고 떨고 있는 녀석의 근처에 떨어진 단검을 주워들며 아셀이 입을 열었다.
“야.”
“흑..흑.. 그만해. 나도 나도 가정이 있는 사람이라 어쩔 수 없는.”
“말해봐. 누가 시킨 거야?”
털보같이 코어도 만들지 못한 용병 따위가 대륙의 용사 가문의 장남을 노예로 팔아넘길 계획을 세웠을 리 없었다.
분명 뒤를 봐주는 누군가가 있는 상황.
아셀이 녀석의 눈앞에 단검을 흔들며 스산하게 묻자 눈치 빠른 녀석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르센! 아셀 도련님의 둘째 동생이신 아르센 님이....”
“그래 고맙다.”
“어. 어째서..”
원하는 대답을 들었기에 아셀은 미련 없이 녀석의 목에 단검을 꽂아주었다.
자신이 배후를 말하면 살려줄 거라 생각했기에.
털보의 믿기지 못하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아셀은 차갑게 입을 열었다.
“설마 나를 배신한 녀석을 내가 살려줄 거라 생각한 거야?”
방긋 웃어 보이는 아셀의 표정에 털보는 더 이상 자신이 알던 필드가의 유명한 등신 아셀이 없음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조만간 다 보내줄 테니까 먼저 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