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화
중국인 헌터들은 깨어나자마자 놀라서 강력한 마나를 확 방출했다.
저마다 S급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인 만큼 그것은 상당한 위압감을 조성했는데, 다행히도 그들은 금방 자신들이 처한 환경을 자각했다.
이 안에 자신들을 통제하고도 남을 만큼 뛰어난 능력을 가진 헌터들이 많이 있다는 것.
자신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
저네들끼리 중국어로 뭐라 중얼거렸다.
“조용히 해.”
하야시가 낮고 강하게 말하자 그들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나는 조용해진 중국인 헌터들 중 리더인 만두 머리 소녀에게 말했다.
“너희들에게 시킬 일이 있다.”
만두 머리 소녀는 나를 가만히 쏘아보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모습을 보자니 확실히 귀엽기는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이 아니었다면 영입해서 이희진과 투톱으로 마스코트로 삼으면 좋을 텐데.
이희진뿐 아니라 이 여자애도 그런 데 응할 만큼 호락호락한 성격은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귀엽게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만두 머리 소녀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열었다.
“……말해라.”
“나는 너희를 중국으로 보낼 생각이다.”
“뭐?”
만두 머리 소녀뿐 아니라 여기 있는 중국인 헌터들은 내 말에 모두 놀랐다.
나는 훌륭한 외국어 능력을 갖추었으므로 원어민과 동일한 수준의 중국어를 구사했다.
모두 우라라가 만든 언어 습득 장치 덕분.
어쨌든 중국인 헌터들이 놀란 것은 내 유창한 중국어 실력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을 중국에 보낸다는 말 때문이었다.
“왜지……?”
만두 머리 소녀가 의혹이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말했잖아. 시킬 일이 있다고.”
혼란 가득한 표정으로 만두 머리 소녀는 내가 하는 말을 들었다.
확실히 이전까지는 틈만 보이면 달아날 궁리를 하는 것처럼 보였던 중국 헌터들이 자신들을 중국으로 돌려보내주겠다는 말을 하자 얌전해졌다.
하지만 내가 하는 말을 듣는 동안 그들의 표정은 천천히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네 말은…… 우리더러 배신을 하라는 것이냐?”
만두 머리 소녀가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렇지.”
“영리한 줄 알았더니 머리가 나쁘군.”
“뭐라고?”
만두 머리 소녀의 악담에 하야시가 참지 못하고 나섰다.
자기가 보는 앞에서 내가 모욕을 당하자 기분이 나빴던 것이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 그를 저지했다.
만두 머리 소녀의 말은 당연한 것이었다.
내가 그녀 입장이었다고 해도 미친놈이라고 생각했을 거니까.
중국은 미국과 자웅을 겨룰 만큼의 헌터 강국이다.
그 나라에 자신들을 돌려보내면 완전히 놓치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떤 식으로 생각해도 성공할 수 없는 계획이다.
그러니 머리가 나쁘다는 식으로 말할 수밖에.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말한다는 점에서 만두 머리 소녀가 용모에 어울리는 순진함을 조금은 갖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면 보통은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입 밖에 내놓지 않을 테니까.
속으로 ‘X신’ 하고 중국으로 돌아간 다음에 생 까면 그만인 것이다.
“잘 알겠습니다.”
역시 만두 머리 소녀보다는 훨씬 세속에 물든 것 같은 인상의 남자가 나서서 말했다.
“저희를 그토록 신뢰하신다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돌아가서 꼭 말씀하신 일을 성사시키겠습니다.”
만두 머리 소녀가 얼굴을 찡그리고 그를 보았다.
하지만 얍삽한 인상의 남자 헌터는 내가 보아도 뻔히 드러날 만큼 눈을 뒤룩뒤룩 굴려댔다.
만두 머리 소녀더러 자신의 속마음을 알아채 달라고 열심히 어필하는 것이 훤히 보였다.
진짜 머리 나쁜 것은 자신들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이놈들은.
설마하니 아무 대책도 하지 않고 중국으로 돌려보낼까.
결국 만두 머리 소녀가 푹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알았다.”
여전히 납득하기 어렵다는 표정이기는 하지만 자기와 함께 있는 다른 중국 헌터들이 모두 염원의 눈길로 자신을 보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는 듯했다.
“언제 보내 줄 거냐?”
“금방 보내줄게. 너희랑 같이 중국에 갈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만 데리고 오면 바로.”
내 말에 만두 머리 소녀가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같이 갈 사람?”
나는 딱히 다시 보고 싶지도, 여전히 가까워지고 싶지도 않은 한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떻게 지내고 있으려나?’
201
게이트에서의 일을 일단락 지은 뒤 나는 헌터들과 현실로 돌아왔다.
헌터들이라고 해도 나를 따라서 게이트에서 나온 헌터는 하야시와 정운석 둘뿐이었다.
미나는 여전히 연구실에 남아서 연구를 이어가고 싶어 했고-무엇보다 기계수 만드는 일에 더 몰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희진 역시 그곳에 남아서 미나를 돕고 자기가 더 할 일이 없는지 알아보고 싶다고 했다.
우라라는 미나가 남았으니 세트로 남을 수밖에 없었고.
중국인 헌터들은 현실로 데리고 나오면 관리하기 어렵기 때문에 게이트에 두는 대신 그들을 미나 일행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두었다.
이희진은 크레이터 아래에 있던 연구실과 비슷한 시설을 몇 군데 더 알고 있었는데, 그중 한 곳에 중국인 헌터들을 가둬 둔 것이었다.
한마디로 순간이동 능력이 없는 그들은 그 시설 바깥으로 절대 나올 수 없었다.
현실로 돌아온 나를 마주한 미미가 놀란 얼굴로 굳었다.
“주군…….”
역시 너는 알아보는구나.
하야시는 매우 실력 있고 예리한 헌터이기는 하지만 내 달라진 태도와 표정까지 읽어내지는 못했다.
기본적으로 무뚝뚝한 성격의 그이니까.
일단 나에 대해서는 백 퍼센트 신뢰하고 있으므로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 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미는 내게 생긴 근본적인 변화를 바로 눈치챘다.
“맞아.”
나는 그녀가 생각을 정리하기 어려워 미처 물어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짧게 대답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확실하게 느끼고 있다.
게이트에 들어가서 이런저런 일을 하고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침대나 소파에 드러눕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생각했던 일을 미루지 않고 빨리 진행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물론 이것으로 조철웅, 나 자신의 본성을 백 퍼센트 다 찾았다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예전에 나는 밥 먹는 시간, 자는 시간도 아깝다고 생각하고 몸을 굴리던 사람이었으니까.
아직 그렇게까지 하기에는 넘어야 할 심리적 벽이 크게 느껴졌다.
“아…….”
미미는 나를 똑바로 마주 보고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말 그대로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다.
그녀의 복잡한 심리 중 몇 가지만 추론해 보자면 일단 그녀는 이미 죽어서 세상에서 사라진 람바스와 나를 동일시하고 있었으므로, 내게서 람바스의 성격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대해 약간 서운한 마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일차적인 감상일 뿐이고 역시 그녀는 람바스가 죽는 순간에 그토록 간절하고 절실하게 바랐던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것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울 게 분명했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 안에서 흔들리고 있는 물기가 그것을 증명했다.
나는 미미에게 시간을 좀 준 뒤에 말했다.
“류신휘를 만날까 하는데.”
“아, 류신휘 말씀이십니까?”
미미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반문했다.
나는 게이트에서 있었던 일과 앞으로 하려고 하는 일을 그녀에게 간단하게 설명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아니, 그 이상으로 좋은 계획은 없을 것 같습니다!”
미미는 내 계획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기뻐하는 그녀를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았다.
202
오랜만에 보는 류신휘는 전과 인상이 좀 바뀌어 있었다.
나를 보고 굉장히 주눅이 들었지만, 그래도 전처럼 딴세상에 정신이 뺏긴 사람처럼 붕 떠 보이지 않았다.
살이 좀 빠지고 헤어스타일과 옷차림이 전보다 더 세련돼 보인다.
전에는 중국 최고의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졸부 같은 느낌이 있었는데,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뒤룩뒤룩 찐 살만큼이나 찌들었던 독이 웬만큼 빠진 모습이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류신휘는 내 호텔 방으로 와서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인사했다.
누가 보았다면 엄청 놀랄 일이다.
자그마치 중국 주석의 아들이고, 중국의 이인자인 그인데.
아무리 한국에서 가장 높은 주가를 올리고 있는 S급 헌터라고는 하지만 이 정도로 저자세를 보이다니.
나는 내심 류신휘가 아버지 앞에 가면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 외에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한껏 과시하며 살았겠지.
하지만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예전에 보았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사람이 나아 보였다.
“잘 지냈어요?”
“네, 덕분에…….”
내가 부드럽게 물음을 던지자 류신휘가 한결 긴장이 풀린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미미가 가져다준 아이스 커피를 홀짝 들이켜며 얼굴을 발갛게 물들였다.
나이는 많아도 뭔가 귀여운 구석이 있는 아저씨다.
아버지 때문에 어울리지 않는 감투를 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긴장을 풀려고 했던 류신휘는 내가 다음에 던진 말에 화들짝 놀라 커피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슬슬 중국으로 돌아갈 때가 되지 않았나요?”
테이블에 떨어져 와장창 깨질 뻔했던 커피잔은 내가 받아냈다.
직접 몸을 움직인 것은 아니고 분신술을 써서 분신으로 하여금 그것을 받아내게 한 것이다.
류신휘는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반문했다.
“중국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이십니까?”
“왜 그러시죠? 중국이 집이잖아요. 가족들 보고 싶지 않으세요.”
“아아…… 가족…….”
류신휘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울상이 되었다.
“어머니는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는 내가 헌터가 아니었으면 듣지 못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저를 죽이려고 할 겁니다.”라고 중얼거렸다.
아들에게 전 중국의 헌터들을 통할하게 해서 꽤 자식을 아끼는 아버지인 줄 알았더니 중국 주석인 아버지가 무척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뭔가 복잡한 사연이 있는 것 같지만 당연히 관심이 없었다.
류신휘의 사정을 생각해서 그를 중국에 보내지 않을 생각도 없다.
“그래도 아들인데 죽이기까지 하겠어요.”
“그건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차라리 죽이면 다행이게요. 아마 저는 감금해서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못 할지도 모릅니다. 세상에는 류신휘가 무엇무엇 했다 라는 말만 전해지겠지요. 저는 살아도 살아있는 게 아니게 될 겁니다.”
류신휘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는 알 것 같았다.
그의 아버지인 중국 주석은 ‘각성한 아들’이라는 타이틀만 중요하게 생각할 거니까.
한국에 가서 큰 실수를 저지른 아들을 말 그대로 살아있도록 숨만 붙여 둘 가능성이 농후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게는 좋은 얘기이기도 했다.
왜냐면 내가 그린 계획에는 류신휘가 아버지인 주석을 만나는 것이 꼭 필요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요. 최대한 별일 없도록 뒤를 봐 줄 테니까.”
“저, 정말이십니까……?”
류신휘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하지만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을 수 있어 다행이라는 얼굴로 반문했다.
나는 딱히 그를 안심시켜줄 필요는 없었으므로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