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화
람바스와 동일한 수준의 인격을 발현할 수 있게 되었다고?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도 국어를 할 줄 알고, 지금 눈앞에 보이는 메시지는 한국어로 출력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대관절 이게 무슨 일이야?
아직까지 나는 심한 무기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희진의 무릎베개를 하고 있는 굉장히 어색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무릎에서 얼굴을 떼기가 버겁다.
물론 이것은 정신을 잃을 정도로 흥분해서 빙산과 맞짱을 뜬 나머지 생긴 근육통, 피로감 때문이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 정도로 큰일을 치르면 휴식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것.
하지만 이유는 그뿐이 아니었다.
내 안에서 엄청나게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을 깨어난 직후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가 설명해 주었다.
아마도 이것을 강도로 치자면 이희진, 정운석 등이 경험한 2차 각성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아니, 그보다 몇 배는 더 크다고 할 수 있겠지.
그나저나 내가 내 본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아직도 대단히 긴 시간이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 귀찮은 일들을 몇 단계나 더 거쳐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이루어지다니.
반칙 같은 느낌이 들지만 딱히 그렇다고만 볼 수도 없을 것이다.
나만큼이나, 아니, 나보다도 훨씬 더 간절하게 람바스도 그것을 바라고 있었을 테니까.
누구보다 노력하고 누구보다 근성이 있던 내가 본성을 되찾아 모든 잠재력을 끌어내기를.
계기는 생각지 못한 곳에서 발생했지만, 원래 인생이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니겠는가?
각본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으음…….”
어쨌든 정신이 돌아온 이후로 슬슬 몸도 회복이 되는 것 같아서 나는 몸을 일으켰다.
이희진의 허벅지는 그녀의 작은 체구를 생각할 때 기대 이상으로 편했지만, 이런 나를 지켜보고 있는 눈들이 많아 마냥 마음 편하게 누워있을 수도 없었다.
내 안에서 일어난 변화에 대해서는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했다.
체력이 빠져서 무기력감이 드는 것 말고는 이상하리만큼 정신이 또렷했는데, 이게 레벨이 폭증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조철웅의 본성이 깨어나서 그런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주군, 작업을 마쳤습니다.”
미나가 몸을 일으킨 나를 보고 상쾌하게 말했다.
“그래?”
충분히 그만한 시간이 흘렀으므로 놀랄 일은 아니었다.
중국인 헌터들은 각자 실험실 구석에 늘어져 있었다.
그들에게 딱히 무슨 변화가 일어났다고 짐작하기 어려웠다.
본인들이 절대로 감지하지 못할 만큼 정교하게 폭탄을 심었다고 하니까 그게 당연하겠지.
“그리고 이놈도 완성했어요.”
미나는 중국인 헌터들의 몸에 폭탄을 심었다고 말할 때보다 배는 뿌듯한 표정으로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가 가리킨 곳의 테이블 위에는 인간을 닮은 로봇이 시동이 꺼진 채로 누워 있었다.
내가 전에 이곳에 와서 싸웠던 기계수들과는 외형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지만, 나는 그것이 같은 기계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런 것이 S급 몬스터와 같은 힘을 내다니.
비록 그것을 구성한 재료는 몬스터들로부터 온 것이지만,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 냈다는 점이 괄목할 만했다.
이 행성의 가장 놀라운 기술을 우주 최고의 기술자가 금방 흡수해냈다.
“안전한 것 맞지?”
“네…… 아직 기동해보지 않아서 시스템적으로 완전한 안정성을 갖추었는지 확신을 못해도 아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미나는 그녀답지 않게 약간 확신을 하지 못하는 투로 말했다.
그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녀로서도 처음 접하는 경지의 기술이고, 그녀 말마따나 기동을 해보지 않았으니까.
나는 그것들이 깨어나던 순간을 떠올리고, 역시 함부로 기동하는 것은 삼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엄청난 시간 동안 방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에게 프로그래밍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깨어났을 정도로 엄청난 기술이 내장된 놈이다.
“저놈 안에도 자폭 장치가 있어?”
“네, 하지만 작동방식은 좀 다릅니다. 외부에서 함부로 꺼내지 못하게 보완하고, 리모트 컨트롤로 그것이 가동하게끔 설계했거든요.”
미나가 그것을 보완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나 때문일 것이다.
나는 기계수들의 약점을 금방 꿰뚫어 보고 폭탄을 꺼냄으로써 손쉽게 놈들을 제압했으니까.
그런 부분을 보완한 만큼 더 위험한 놈이 되었지만, 나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적이 완전히 없다고 할 수도 없었다.
기계수들이 아군 진영에서 폭발을 일으킨다면 그만큼 큰일이 벌어지는 거니까.
시스템적인 안정성을 갖추고 이쪽이 바라는 대로만 움직일 수 있다는 건 큰 보완을 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미나는 헌터로서의 전투 능력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지만 이로써 어떤 S급 헌터보다도 강한 능력을 갖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리모트 컨트롤로-흔히 생각하는 손에 쥐고 버튼을 누르는 방식의 리모컨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S급 능력을 가진 기계수 군단을 움직인다고 생각하면, 단방에 엄청난 능력을 갖게 된 것이었다.
각성이 아닌 기술로 그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 놀랍다.
대단하구나, 과학 기술이란.
“얘기 좀 해.”
이희진이 말했다.
고개를 돌리자 평소답지 않은 태도로 내게 무릎베개를 베풀었던 자애로운 표정이 사라진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서 있었다.
“응.”
내가 대답하자 눈앞에서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순간이동으로 바깥으로 나간 것이다.
뭐가 그렇게 비밀이 많은 것인지.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아군이라는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으면 좋으련만.
뭐, 그건 그녀도 아는 것일 테고 이유가 있겠지.
나를 극점으로 데리고 가서 빙산을 무너뜨리게 한 것은 황당했지만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 되었다.
단순히 좋은 일이라고 말하고 넘어가기에는 부족한,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나는 그 사실에만 집중하고 있었는데, 따지고 보면 그녀가 그걸 내게 바란 데에는 따로 이유가 있을 터였다.
내게 부탁하지 않더라도 자기 힘으로 빙산을 무너뜨리려고 했었다.
본인도 그렇게 해야 할 이유를 확실히 모르는 채로.
이제는 그 이유는 알게 된 걸까?
시도한 일이 엄청났던 만큼 그 이유라는 것도 엄청 무거운 것일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거운 이야기로부터는 노이로제 반응부터 일으키던 전과는 달리 나는 순수한 호기심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동료인 그녀의 이야기를 성실히 들어주어야겠다는, 전이라면 결코 갖지 않았을 마음도 생겼다.
이게 조철웅의 본성이 깨난 것과 상관이 있는 것인지 아닌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나는 이희진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이희진은 밤이 된 배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체구는 작지만 그녀의 뒷모습으로부터 커다란 애수가 느껴졌다.
이 행성은 아름다웠다.
지구보다 과학 문명이 훨씬 더 발달되었던 이곳이 멸망 전에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어딜 보든 압도적으로 아름답고 생동감 있는 자연 풍광이 펼쳐져 있었다.
인간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자연 속에 들어갔을 때 느끼는 경이감을 이 행성에서는 어디에서든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되어버렸다는 것이 아깝게 느껴질 정도다.
문명이 새로 시작하면 자연도 손상되기 시작하겠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달할 잠재력을 갖춘 곳이 버려진 채로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나와 내 동료들의 발길이 닿았고, 게이트 능력을 발휘하면 언제든 올 수 있지만, 단순히 내 개인 별장으로 가지고 있기에는 이 행성이 품은 잠재력이 너무 거대하다는 뜻이었다.
그런 감상을 갖게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이희진의 뒷모습에는.
내가 다가가자 이희진은 허공을 손을 뻗었다.
그녀가 손을 넣은 것은 그녀의 인벤토리였다.
쓱, 그녀가 꺼낸 것은 한 도막의 손이었다.
미라가 되었지만 보존 상태가 좋은 것으로 보아 어디에 묻혀 있었던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빙산에 저것이 묻혀 있었나 보다.
뭔가 허탈하기는 했지만, 저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새삼스러운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여기에는 이 행성 주민의 DNA가 있어.”
“아…….”
단박에 이야기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는 말이었다.
놀랍도록 내가 방금 했던 생각과 일치했다.
“여기서 추출한 DNA로 이곳 행성의 인간을 태어나게 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거니까. 물론 복잡한 기계를 만들어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미나가 만들 수 있을 거야.”
“응…….”
여기서 이희진은 입을 다물었지만 나는 긴 대화를 나눈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맥락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바람은 이곳 행성에 다시 문명이 깃들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함부로 그것을 시도할 수는 없다.
어설프게 그것이 시작되게 했다가는 다시 같은 운명을 겪게 될지 모르니까.
한 마디로 우주에 악마가 살아 있는 한 어떤 행성도, 문명도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
이희진은 그것을 알기 때문에 말을 멈추고 침묵하는 것이었다.
“걱정 마. 악마는 내가 죽일 거니까.”
확실하다.
방금 이 말은 조철웅의 본성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어조랄까? 느낌이랄까?
귀차니즘에 지배당했던 이전의 내가 할 만한 말이 아니었다.
물론 여전히 람바스는 내 안에 있고, 귀차니즘은 남아 있는 느낌이지만 이전과는 다르다.
나는 방금 뱉은 말에서 그것을 처음으로 지각할 수 있었다.
이희진이 몸을 돌렸다.
그녀의 표정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평소의 그녀와도 어울리지 않았다.
왜냐면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이었으니까.
그녀의 안에는 이 행성을 마지막까지 지키고자 했던 영웅이 빙의해 있다.
그 영웅의 마음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미라로부터 추출해 낸 DNA로 할 일을 기대하고 있었다.
대전제, 악마를 죽일 수 있다는 담보만이 필요했을 뿐이다.
이 우주 전체에서 그것을 입에 담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오직 나만이, 농담이 아닌 진지한 얼굴로, 그것을 말할 수 있다.
“이 행성은 전처럼, 아니, 전보다 더 활기 있는 곳이 될 거야.”
“아…….”
이희진은 팟 하고 사라졌다.
뭐 하는 짓인가 하고 허공을 바라보았더니 그녀가 눈가를 훔치는 것이 보였다.
울고 싶으면 내 앞에서 울어도 될 텐데, 하는 짓이 귀여운 외모와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까?
빙산을 무너뜨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내 본성을 끄집어내는 데 성공했다는 것도 그렇고, 한 번 죽었던 행성을 다시 살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도 의미가 넘치는 일이다.
악마를 반드시 쓰러뜨려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나 먼저 들어간다.”
나는 일부러 그녀 쪽을 보지 않고 말한 뒤 순간이동 능력으로 벙커 실험실로 돌아왔다.
그러자 그곳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완전히 기절해 있던, 그 상태로 수술까지 받았던 중국인 헌터들이 깨어나기 시작한 것.
‘오케이.’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공략을 이어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