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화
대체 이 산을 왜 날려달라고 한 걸까?
나는 다시 한번 의심스러운 눈으로 이희진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양팔로 몸을 감싼 채 아무 생각 없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딱히 눈보라가 치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온이 엄청나게 낮은 탓에 바람이 살짝만 불어도 피부를 찢을 듯한 느낌을 주었다.
지구와 비교해서 어느 쪽의 극점이 더 온도가 낮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비슷하거나 이쪽이 더 낮지 않을까 싶었다.
뭐, 나는 이곳으로 오는 동안 추위 내성이 필요 이상으로 강해진 탓에 추위를 전혀 느낄 수 없었지만.
이희진은 확실히 이 산을 부수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집중해서 생각하면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미 나에게 빙산 날리기를 맡겨놓은 탓에 자기는 결과만 보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뻔했다.
왠지 얄밉지만 틀린 생각은 아니다.
어차피 날려야 할 산이고, 자기에게 그럴 만한 능력이 없다면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이 최선일 테니까.
게다가 그녀는 동등한 조건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지만 자기가 게임 캐릭터 키우는 데 도움을 준 일을 이걸로 셈셈 쳐주겠다고 했다.
쪽지에 대답하지 않은 것도 용서해주겠단다.
물론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만큼 내게는 불만이 있었다.
그래도 딱히 그녀에게 더 무엇을 요구할까 생각해 보자면 그러고픈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그녀가 요구하는 빙산 부수기가 단지 그녀에게만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마도 지하 비밀 연구실을 발견했던 것처럼 이 빙산 부수기도 악마와의 싸움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는 일단 산을 날려버려야 알 수 있을 것 같고.
“흠…….”
나는 산의 견적을 뜯어보았다.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날려버려야 잘 날렸다고 할 수 있을까?
사실 나도 이희진만큼이나 아무 생각 없이 서 있는 것이었다.
다만 이러는 동안 ‘분석’ 능력이 제멋대로 발동해서 갖가지 답을 도출하고 있었다.
분석 능력은 내게 결과를 내보였다.
귀찮아서 보기 싫어질 만큼 수많은 결과를.
한마디로 지금 내 능력으로는 이 산을 날리는 것이 가능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그만큼 성장했다.
나는 실패해도 딱히 위험하지 않은 도전에 앞서서 한 가지 시험해 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분석’ 능력이 도출해 낸 답은 대부분 ‘지배자의 손아귀’를 사용한 방법이었다.
즉, 거대한 망치를 만들어내서 산을 정면에서 까부수거나, 검을 만들어내서 갈라버리거나, 대포를 형상화해서 마나탄을 펑펑 날리는 등.
거기에 더불어 이미 가지고 있는 스킬을 사용하는 방법도 있었다.
예를 들어 ‘핵주먹’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쉬운 예다.
하지만 나는 이 순간을 ‘연습’의 개념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런저런 일들이 쉼 없이 일어났기 때문이지만 근래 나는 훈련을 하지 않았다.
호텔 훈련장에 내려가는 일도 어느 순간부터 하지 않게 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내가 훈련을 하도록 은근히 유도했을 미미도 딱히 내게 그것을 권유하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훈련장에서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을 겪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녀로서 가장 싫은 일은 내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일일 테니까.
괜한 자만심에서 하는 생각이 아니라 미미에게는 내가 그만큼 소중한 존재일 것이다.
비단 내가 우주에서 유일하게 악마와 대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혹은 그녀의 행성을 날려버린 악마에게 복수할 수 있는 기회가 오로지 나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나에 대해 깊은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나 역시 그녀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무척 슬플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녀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할 것이다.
죽음을 막을 수 없다면 그녀를 죽게 한 무언가에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이런 감정은 남녀 간의 애정과는 좀 다른 것이다.
뭐랄까?
목숨이 다할 때까지 함께 버텼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보통의 수준과는 전혀 결이 다른 유대감을 갖게 되었다고 할까?
물론 그 유대감이라는 것은 한 다리 건넌 것이기는 해도 직접적으로 나눈 유대감과 딱히 다르다고 할 수도 없었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유야무야했던 훈련을 지금 해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빙산을 날리는 것은 S급 몬스터를 몇 마리 사냥하는 것보다 더 큰 경험치를 가져다줄 수 있는 훈련이었다.
무엇보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별로 없지 않은가?
지구에서 산을 날린답시고 시도를 했다가는 당장 세계 토픽이 될 것이다.
S급 몬스터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지면서 이제는 지구의 아주 외진 곳까지 경계망이 펼쳐져 있으므로 언제든 나는 산을 날려버린 일에 대한 추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강원도 산에 들어가 S급 몬스터를 불러내 사냥한 것과는 다른 문제다.
그때는 몬스터가 출현했다는 핑계가 있었고, 무엇보다 산을 날리는 것만큼 스케일이 큰일이 아니었다.
단지 등급이 별로 높지 않은 S급 몬스터 한 마리 사냥하는 것뿐이었지 않은가?
강원도의 어떤 산과 비교해도 지금 내 앞에 있는 빙산과는 비교할 수 없다.
‘이왕 훈련하는 김에…….’
나는 심호흡을 하고 착용하고 있던 장비를 벗기 시작했다.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을 때 느낄 수 없었던 추위가 급격하게 피부를 찌르기 시작했다.
일반인의 개념으로 말을 하자면 추운 겨울날에 산속에서 옷을 벗어 알몸이 되는 것과 같은 기분이다.
물론 그런 추위는 ‘내성’이 강해지며 곧 물러갔지만.
하지만 최대 수준의 내성이라도 추위를 전부 없애버리지는 못했다.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이곳의 추위는 치명적이었다.
뭐, 그렇다고 해도 이곳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 그만큼 내 내성도 높아질 것이다.
나는 람바스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당연하다.
아마 본인도 몰랐을 거니까.
그걸 보지 못한 것을 최후에 가서 처절하게 후회했으니까.
심지어 나는 노근의인집 스킬 중에 어느 것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미치도록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풍경이 온통 하얀 이런 환경이니까 그나마 다른 생각할 여유가 줄어들어 귀찮음이 상쇄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뭔가 지금 하지 않으면 벽을 깰 수 있는 기회는 앞으로도 좀처럼 주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미미가 계획했던 것보다 상황은 더 빨리 진전되고 있으니까.
미국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두 번째 헌터 강국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과의 대결도 목전에 두고 있다.
중국이라는 국가 자체와 부딪친다기보다는 그곳에 있는 사도들과 싸우는 것이지만.
어쨌든 나는 장비를 모두 벗고 마음속에 드글드글 끓어오르는 귀찮음과 싸우면서, 집중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당연히 이 집중력은 람바스의 것이 아니라 조철웅의 것이었다.
이제껏 특수능력을 제외하면 딱히 발휘할 기회가 없었던 내 본성.
어떻게든 그것을 끄집어내지 않으면 같은 결과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지구도 악마에게 집어 삼켜지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람바스가 그랬던 것처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후회를 하게 될 것이다.
왜냐면 나는 람바스보다 훨씬 더 나은 조건에 있었던 거니까.
엔딩의 보스전에서 좌절했던 게임의 2회차라고 할 수 있었다.
이다음 기회는 없다고 해야 맞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나는 내 안에서 조철웅을 끄집어내야만 했다.
뒤에서 이희진이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 딱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지는 않았지만, 그런 표정과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뭐라고도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가 없는 것이겠지.
아마도 내가 그녀라도 내 기운에 눌려 입도 뻥긋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지금 나는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다.
빌어먹을!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날카로워진 신경은 집중력을 올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나를 힘들게 하는 무엇이라도 때려 부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당연히 내 앞에 거만하게 서 있는 저 산이 될 것이다.
“개자식!!”
내가 산을 향해 소리를 지르자 이희진이 흠칫 놀랐다.
미안.
돌아이처럼 보일 것 알고 있어.
하지만 네가 시킨 거잖아.
물론 이런 전개는 절대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나는 노근의인집 스킬 중 어느 것도 사용할 생각이 없고, 더불어 다른 스킬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지배자의 손아귀’마저 벗어버렸다.
슬슬 한계가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가슴을 간지럽히는 귀찮음을 찍어 눌렀다.
“으아아아악!!”
괴성을 한 차례 지른 다음 산을 향해 돌격했다.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200
“아! 눈 떴네!”
나는 흐릿한 의식 속에서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반가워하는 이희진의 얼굴이었다.
그런데 각도가 늘 보던 것과 좀 다르다.
뒤통수에도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아마도 내가 정신을 잃고 있던 동안 이희진이 내게 무릎베개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주군! 깨어나셨군요!”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놀랐잖아요!”
하야시와 미나의 얼굴도 보였다.
그들의 얼굴에는 큰 안도감이 드러나 있었다.
“으윽!”
나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곧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다시 이희진의 무릎에 누웠다.
“아직 일어나지 마. 너 세 시간밖에 안 잤어. 나 허벅지 안 아프니까 열 시간 정도 더 자도 돼.”
이희진은 무미한 음성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그녀의 태도에서 크게 미안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딱히 그녀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장비를 벗고, 어떤 스킬도 사용하지 않고, 맨몸으로 빙산을 부수기로 한 것은 내가 내린 결정이니까.
“그러고 보니…….”
나는 각성한 이후로 처음 느껴보는 처절한 근육통 속에서 이희진에게 물었다.
“어떻게 됐어?”
“후우…….”
이희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울컥 화가 치미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못 부순 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설마…… 빙산에 진 건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런 기분도 각성하고 나서 처음 느끼는 것이다.
어쩐지 깨어나고 나서 내가 느낌이나 감각이 전과 근본적으로 달라진 기분이 든다.
그냥 기분 탓인 건가?
감기에 걸리면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처럼?
이희진이 완전히 질렸다는 얼굴로 말했다.
“박살 났지.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설마 맨주먹으로 그 거대한 산을 없애버릴 줄이야. 나 무서워서 오줌까지 지렸잖아.”
“아…….”
이겼다.
다행이다.
내가 했던 미친 짓이 아무 의미도 없지 않았다는 사실에 큰 안도감이 들었다.
그때였다.
마치 멈춰 있던 시스템을 다시 가동한 것처럼 메시지가 눈앞을 덮은 것은.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각오는 했지만 이 레벨업 메시지는 끝도 없이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어쩐지 레벨업 메시지를 보는 것이 전처럼 귀찮지는 않았다.
레벨업 메시지뿐 아니라 갖가지 신체 능력, 스킬이 계발되었다는 메시지도 떠올랐다.
그것들을 보고 있자니, 최종적으로 이런 메시지가 나타났다.
[‘조철웅’ 특수능력이 사라졌습니다.]
“응?”
이건 무슨 소리야?
내가 알몸으로 빙산이랑 맞장 뜬 게 다 내 본성을 끄집어내기 위해서였는데.
너무 나가는 바람에 시스템이 오류를 일으킨 걸까?
하지만 다음에 이어진 메시지는 내 그런 불안감을 일거에 일축시켰다.
[더 이상 특수능력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당신은 람바스의 인격과 동등한 수준의 인격 발현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