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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차니즘 헌터-152화 (152/160)

▣ 152화

한 놈을 쓰러뜨렸으니 다음 놈들을 제압하는 것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기계수들은 나타날 때 위용은 전혀 드러내지 못한 채 순간이동으로 휙휙 이동하는 나에게 차례대로 쓰러졌다.

킹, 킹, 키잉-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에 묻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오랜만에 깨어난 것치고는 정말로 허무하게 자신들의 생을 마감한 기계수들이었다.

나는 기계수들에게 회수한 자폭 장치를 그냥 버릴까 하다가 생각을 바꾸어 인벤토리에 넣었다.

이곳에 또 누가 올까 싶기도 하지만 너무나도 위험한 장치라 오작동이라도 한다면 행성의 한 부분이 날아갈 만큼 큰 폭발이 일어날 것이다.

이미 악마와 사도들에게 큰 시련을 겪은 행성인 만큼 굳이 그런 일이 또 겪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기계수들에 대한 정보를 일절 전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미나에게 이것을 가져다주면 좋아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 장치 안에는 과학 문명이 발달한 행성의 정수가 담겨 있을 테니까.

적어도 지구보다 기술력이 수십 년은 앞서 있을 것이다.

이희진은 계속 내 뒤에 선 채로 기계수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나와 기계수들이 벌인 공방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는 듯한 태도였다.

그것보다 다른 무언가에 깊숙이 사로잡혀 있는 표정.

갑자기 무언가를 퍼뜩 떠올린 그녀는 쓰러져 있는 기계수 중 하나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기계수를 어루만지자 픽, 하고 가슴팍이 열렸다.

그 안에는 들어 있던 것은 한 쌍의 장갑이었다.

이희진은 그것을 아련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이로써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아마도 그녀에게 빙의한 이 행성의 영웅이 자신의 장비들을 기계수들 안에 숨겨둔 것 같았다.

이렇게나 과학 기술이 발달한 곳인 만큼 행성의 영웅이었던 존재에게 주어졌던 장비의 수준도 최상위였을 것이다.

그것들을 사도들에게 빼앗기지 않겠다는 마음은 알겠지만, 이렇게 강력한 기계수들을 만들어 그 안에 넣어두다니.

지나치게 치밀하다고 할까?

아니면, 이 시설과 기계수들이 만들어진 목적은 따로 있고 영웅의 장비를 기계수들 안에 넣어둔다는 발상은 나중에 이루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영웅이 죽고, 그녀를 기리기 위해 누군가가 기계수 안에 장비를 숨겨둔 것인지도.

이렇게 과학 문명이 발달한 곳에서 언젠가 영웅이 부활해 다시 이 장비들을 찾아 행성을 부활시킬 거라는 희망을 품었을 리는 없고, 내가 모르는 일련의 일들이 벌어진 결과가 아닐까 싶었다.

각자에게는 모두 자신만의 사정이 있는 거니까.

거기까지는 내가 아무리 애써도 추측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쨌거나 이희진을 이곳에 데려와서 그녀가 영웅의 장비를 찾게 된 것은 의외의 일이었다.

예상을 뛰어넘은 성과라고 할까?

헌터에게 장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익숙한 환경에서 오랫동안 훈련을 하여 능력을 계발하는 것보다 자기에게 맞는 장비를 착용하는 것이 몇 배 더 효율적인 일이라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희진은 작동이 멈추어서 쓰러진 기계수들 각자에게서 영웅의 장비를 회수했다.

나는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이곳 시설을 돌아보았다.

어쩌면 이곳의 존재 가치는 이희진을 위한 것만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녀는 자신의 안에 깃든 영웅의 장비를 되찾는 것만으로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얻었고, 그보다 더 큰 가치는 차라리 미나와 우라라에게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로 문명이 발달한 행성이 남긴 흔적이라면, 죽은 기계수들의 사체와 남아 있는 시설을 연구하는 것만으로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한마디로 그녀들을 위한 연구시설로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 지하시설로 직접 연결되는 게이트를 설치하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주변에서 강력한 마나가 감지되어 고개를 돌렸더니, 기계수들에게서 찾은 장비를 모두 착용한 이희진이 서 있었다.

그 모습이 뭐라고 할까…….

그녀의 능력이 이 장비를 착용함으로써 진일보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것을 입고 싸우는 데 어느 정도 익숙해진다면-그것은 호텔에 있는 훈련 시설을 이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자기 안에 깃든 영웅의 능력을 찾는 것이 훨씬 빨라질 것이다.

적어도 과거에 한국에 있는 다른 두 명의 S급 헌터들에 비해 개인이 가진 능력 면에서는 좀 떨어진다고 여겨졌던 그녀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달라지게 될 터였다.

이희진은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RPG 게임을 하면서 새 고급 장비를 맞춘 사람처럼 득의만만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입고 있는 장비는 그 성능을 차치하고, 디자인은 그리 좋다고 할 수 없었다.

과학 기술은 그토록 발달했으면서 디자인 센스는 거기 따라가지 못했다고 할까?

굳이 표현하자면 히어로 영화 속 여자 캐릭터 같은 모습이었다.

센스 없는 디자이너가 재현해 원작 팬들에게 원성을 들을 만한 디자인.

뭐, 성능만 좋으면 됐지.

본인이 만족하는 것 같으니 내가 관여할 부분은 아니었다.

나중에 미나와 우라라의 손을 거치면 개선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

“여길 오길 진짜 잘했다!”

뿌듯한 표정으로 말하는 이희진을 보자니 내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

“돌아가자.”

나는 이 지하시설로 직접 통하는 게이트를 만들었다.

이곳에서 얻은 영감과 계획은 돌아가서 미나와 상의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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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이건 못 보던 기술이네요.”

연락을 받고 호텔 방에 찾아온 미나는 이희진의 장비를 얼마간 뜯어보고 그렇게 말했다.

“이걸 이렇게 하다니 신선한걸?”

“이건 좀 아쉽네, 왜 굳이 이렇게 했을까?”

그녀는 연신 장비를 들여다보면서 그런 말들을 했을까?

도대체 뭘 보고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 범인의 지각능력으로는 알기 어려웠지만, 고수의 눈에는 대충 뜯어보는 것만으로 여러 가지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이희진은 자부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렇지?”, “대단하지?” 같은 말을 하다가 곧 지친 기색을 보였다.

“벗어 줄 테니까 천천히 봐.”

어디까지나 그녀도 기술자 타입이 아니었던 것이다.

성능이 좋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어떤 기술이 적용되어 그렇게 되었고, 또 어떤 기술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지까지는 관심사항이 아니었다.

진지한 과학적 토론은 미나와 함께 이곳에 온 우라라가 합세하여 이어졌다.

그녀는 미나에 비해서 덜 열성적인 태도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성격적인 부분에 기인한 것일 뿐이고, 그녀 또한 이번에 게이트에서 얻어온 전리품에 크게 관심이 가는 듯했다.

두 사람은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는 기술 용어들을 써가면서 열심히 토론을 했다.

이희진은 게이트 안에서 장비를 얻었을 때의 득의만만한 텐션은 버린 채로 미미와 함께 유유히 차를 마셨다.

뭔가 분위기가 확연히 갈라진 거실의 풍경이었다.

이것은 이것 자체로 균형미가 있어서 나쁜 것 같지는 않지만.

게이트 안에서 중국 헌터들을 길들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을 하야시와 정운석을 생각하니 뭔가 마음이 든든해졌다.

이렇든 저렇든 내 안에 리더로서 자각이 조금쯤 생기고 있는 것일지도.

물론 ‘책임감’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여전히 심한 거부감이 일어났지만, 람바스의 성정에 깊숙이 사로잡혀 있던 때와 비교하면 확실히 진일보한 것이기도 했다.

어쩌면 내게 있어 진정한 성장은 이 게으름을 극복하는 것일 테니까.

“너희들도 들어가 볼래?”

나는 미나와 우라라에게 말했다.

“어딜요?”

“와! 정말요?”

금방 이해하지 못하는 우라라와 달리 미나는 즉시 내 말뜻을 알아들었다.

“저희가 가서 연구할 거리가 그곳에 있는 건가요?”

“거의 다 파괴돼서 문명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한 곳은 잘 보존돼 있어. 거기로 통하는 문을 만들어뒀으니까 거기 있는 것들을 연구해 보면 얻을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싶어.”

“가고 싶어요! 가게 해주세요, 주군!”

미나는 훈련하기 위해 게이트에 들어가고자 하는 하야시만큼이나 열성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했던 일이다.

“거기 가려면 먹을 음식이 필요하겠네요. 생필품이랑 갈아입을 옷도.”

우라라는 미나보다는 현실적이었다.

나는 두 사람이 기대를 뛰어넘은 훌륭한 콤비가 되어 있다고 느꼈다.

미나가 열성이 지나쳐서 실수할 수 있는 부분을 우라라가 메꿔준다는 느낌이다.

게이트에 들어가서 연구를 시작하면 적어도 며칠, 몇 주는 걸릴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우라라는 예상했다.

한 번 연구에 빠지면 아무것도 안 보이는 미나이니만큼 그녀 옆에서 먹을 것과 같은 생활의 필수적 요소를 챙기는 것이 우라라의 역할이었다.

“제가 도울게요.”

미미가 분위기를 읽고 그렇게 말했다.

“아, 이거.”

나는 잊고 있었던 물건을 인벤토리에서 꺼내어 미나에게 주었다.

“이건 뭔가요?”

미나는 신중하게 내가 꺼낸 자폭 장치를 들여다보았다.

나는 간단하게 게이트 안에서 겪은 일을 말해주었다.

“아! 과연!”

그녀는 큰 깨달음을 얻은 얼굴로 말했다.

“몬스터들의 특성을 이용해 기계수들을 만들면 우리 측 전력을 쉽게 강화할 수 있겠네요!”

‘쉽게’라는 말은 하지 말아줄래?

발상 자체보다도 그 재료가 문제잖아.

“하지만 재료가…….”

미나도 금방 그 한계를 떠올린 것인지 그렇게 중얼거렸다.

“주군이 도와주면 쉽게 공수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가슴이 뜨끔해지는 말을 했다.

하긴, 게이트 안이라는 안전한 장소가 확보된 만큼 ‘운명의 목걸이’를 사용한다면 안전하게 S급 몬스터를 사냥하여 그 재료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행성 공간에서도 ‘운명의 목걸이’가 제대로 반응할 것인지, 혹시 그것을 통해 악마와 사도들이 우리가 벌이고 있는 일들을 눈치채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주군은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수 없는 분이니까요.”

다행스럽게도 미미가 옆에서 그렇게 말해주었다.

하기야 서울에서 S급 몬스터가 출현한 것이 불과 며칠 전이니만큼 같은 일이 발생한다면 곤란할 것이다.

게이트에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은 나만 발휘할 수 있으니까.

누구도 내게 위험을 알릴 수 없다.

“그건 그렇지…….”

실망하는 미나에게 내가 타협책을 내놓았다.

“하야시랑 정운석이 사냥한 재료들이 있을 거야. 일단 그걸 사용해 보는 건 어때?”

“오! 그것 좋네요! 루트론 행성 몬스터들에 대해서도 연구해 보고 싶었으니까.”

반갑게 대답한 미나가 추가 의견을 말했다.

“이 자폭 장치들을 중국 헌터들의 장비에 내장해 두는 것은 어떨까요? 배신할 경우 폭파하는 방식으로. 중국에 잠입시키면 전략적 용도로 사용할 수도 있을 거고요.”

“오, 그거 좋은데?”

A급 이하의 헌터들과 달리 S급 헌터들은 위험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들이 반기를 들면 귀찮은 일이 벌어지니까.

자폭 장치로 제어하면 효과적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 자폭 장치는 고도로 과학 기술이 발달한 행성에서 제작된 것이니만큼 그들을 제어할 강력한 수단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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