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
기계수.
이 얼마나 만화 같은 존재란 말인가?
하지만 그런 불평을 할 수 없는 것이, 세상에는 이미 몬스터와 헌터들이 활동한 지 오래되었다.
상대가 생명체인 몬스터에서 기계로 만들어진 존재로 바뀌었을 뿐.
‘강하구나.’
나는 깨어나서 걸어 나오는 기계수들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의외로 이곳은 과학 문명이 대단히 발달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각각의 행성은 나름대로 개성을 지니고 있다.
이곳의 장점을 활용할 방법이 있을까?
물론 악마라는 존재는 과학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차라리 마법이라는 단어로 풀어내는 것이 더 쉬울 것 같지만.
고도로 발달한 과학 문명과 행성을 집어삼키고 다니는 초현실적 존재의 충돌이라는 것도 만화에서나 볼 법한 설정이었다.
대단하구만, 진짜로.
하지만 대단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려고 하면 절대로 빠질 수 없는 남자가 있다.
바로 내 안에 있는 람바스의 존재.
그는 죽으면서 내게 자신의 능력을 넘겼으므로 이제는 그 표현을 나 자신에게 써야겠지만.
‘귀찮으니까 패스.’
만화에서 대단한 능력을 지녔다는 것은 곧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소설에서 총이 등장하면 그것의 방아쇠는 꼭 당겨져야 한다는 말을 한 작가도 있으니까.
한마디로 대단하다는 자각조차도 귀찮음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안쪽에서 걸어 나오는 기계수들의 숫자가 다섯 구로 늘어났다.
그것들은 모습을 보인 상태에서 조금 주춤거리고 있었다.
위협적인 존재인 내 전투력을 감지하고 머뭇거리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것은 아닐 터였다.
상대는 어디까지나 기계이니까.
상황으로 보건대 아마도 여기 접근한 상대를 해치우라고 프로그램된 모양이었다.
혹시 이곳에 들어와 스위치까지 작동한 이희진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그녀 쪽을 보았는데, 미간을 찡그리고 어딘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뭔가 기억을 떠올리는가 싶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 기억이 편한 기억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저렇게 집중하는 상태에서는 뭔가 묻기도 애매하다.
그리고 이 기계수들을 잠재울 수단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녀 쪽에서 먼저 행동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어휴…….”
마치 전기에 감전된 동물처럼 멈칫거리며 제자리에 서 있던 기계수들이-아마도 오랜만에 작동되어 시스템을 정상적으로 가동하기 위한 세팅을 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긴 세월 만에 깨어났어도 정상 작동하는 기계수들을 만들어내다니, 아마 이곳의 존재가 밝혀지면 지구의 과학자들 사이에서 일대 센세이션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었다. 그들에게 이곳의 존재를 알릴 방법이 딱히 없어서 안 가르쳐 줄 거지만. 귀찮기도 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전투에 임할 때 귀찮음을 물리치는 치트키라고 할 수 있는 노근의인집 스킬들 중 두 번째 근성 스킬을 발동했다.
거의 같은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다섯 가지 스킬들이니만큼 큰 구분은 없다고 할 수도 있지만, 당연히 디테일한 면에서 차이가 있다.
지금처럼 갑작스럽게 싸워야 할 때는 강력한 심적 동력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순간 효과가 강력한 ‘근성’ 스킬이 어울린다고 할 수 있었다.
키잉, 키잉, 키잉,
SF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기계수들과의 싸움이 시작되려는 순간이다.
놈들의 안쪽에서 무언가가 바쁘게 반짝거리는 것을 보자니 나에 대해서 분석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지만 아마도 마나의 세기나 질감 등에서 특질을 잡아내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내가 입고 있는 장비로부터 무언가 정보를 얻고 있을지도.
어느 쪽이든 놈들이 발휘하고 있는 능력은 최첨단의 그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분석’이라는 능력으로 말하자면 나도 뒤지지 않는다.
자그마치 그런 이름이 붙은 스킬까지 가지고 있으니까.
이 스킬은 패시브이므로 노근의인집 스킬과는 달리 저절로 동작한다.
이희진을 따라 날아가면서 저절로 ‘순간이동’ 스킬을 습득한 것처럼.
나는 ‘분석’ 능력이 평소보다도 훨씬 바쁘게 발동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 보는 상대이니만큼 분석할 거리가 많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스킬도 사용해 온 지 오래된 만큼 레벨이 많이 올랐고, 나 자신의 수준도 점점 올라가고 있는 만큼 스킬의 성능 자체가 좋아진 측면도 있었다.
말하자면 이 기계들에 장착된 분석 시스템처럼 고성능의 센서와 연산 능력을 가진 것이 바로 내 ‘분석’ 스킬이었다.
기계와 인간의 능력으로 대결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지구의 기준에서 말하자면 인간이 두뇌를 사용하는 속도와 컴퓨터의 연산 능력은 도저히 비교할 수가 없다.
무조건 인간이 질 수밖에 없고, 헛된 경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면에 있어서는 헌터도 능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머리가 엄청나게 좋아진 S급 헌터라고 하더라도 컴퓨터와 직접 대결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하물며 지구보다 과학 기술이 훨씬 발달한 이곳에서 만들어진 기계라면…….
‘아…….’
아직도 기계수들은 내 능력을 제대로 계산해내지 못하고-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서 있었을 뿐이며, 마나조차도 최대치의 10분의 1 정도밖에 발동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게다가 이 기계수들은 나만큼 강하고 신기한 존재를 맞닥뜨려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머뭇거리고 있었지만, 나는 내게서 발동되고 있던 ‘분석’ 능력이 조금 느려지는 것을 느꼈다.
말하자면 연산을 끝낸 컴퓨터가 천천히 속도를 늦추는 것처럼.
‘뭘 어떻게 분석한 거야?’
기계수들은 나도 처음 보는데.
게다가 놈들과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이다.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익숙한 파라락, 소리가 나더니 홀로그램이 튀어나온 것.
그것은 다름 아닌 ‘몬스터 백과’였다.
S급 몬스터들이 수록된 버전의 백과사전.
왜 이런 게 나오나 싶어 나는 평소와 달리 책을 바로 집어넣지 않고 어떻게 되나 지켜보았다.
그러자 파라락 넘어가던 책장이 멈추고 특정 페이지에서 멈추었다.
나는 페이지가 펼쳐진 곳에 수록된 몬스터의 정보와 이것이 가리키고 있는 대상일 게 분명한 기계수 중 하나를 대조해 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외형에서 닮은 점이 있다.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기계수에서 비슷한 질감의 마나가 흘러나온다는 것도 감지할 수 있었다.
“아!”
내가 깨달았다는 듯한 입소리를 내자 페이지는 다시 파라락 넘어가서 다른 페이지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 파라락~
다섯 구의 기계수 숫자에 맞추어서 각각의 페이지를 내비친 백과사전을 나는 다시 집어넣었다.
‘그렇게 된 것이구만.’
이 기계수들은 처음부터 완전히 이곳의 기술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하긴, 그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특정한 기술적 능력을 각성한 인물들이 장인이 되어 헌터 장비를 제작하는 것처럼, 이곳의 장인들은 기계수들을 만들었던 것이다.
폭주하기 시작한 몬스터, 사도들과 싸우기 위해서.
감히 악마와 대적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해도, 이 정도라면 어느 정도 효과적인 싸움을 할 수 있었을 게 분명했다.
‘이곳의 사이언티스트들은 굉장히 똑똑하네.’
지구의 과학자들, 그리고 장인들은 분발해야 할 것 같다.
하긴, 지금처럼 헌터들이 게이트를 잘 관리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굳이 만약을 대비해서 기계수들을 만들 필요가 없을 것이기도 하다.
어디선가 열심히 제작되고 있지만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일지도.
이 기계수들은 저마다 S급 몬스터의 정보를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아마도 그 S급 몬스터들은 모두 이 행성에 출현했던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의 정보를 이용해서 같은 능력을 발휘하는 기계수들을 제작한다.
그럴듯한 발상이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고, 어쨌거나 이곳의 사람들은 그것을 해냈다.
우주 최고의 장인인 미나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면 어떻게 생각할까?
당장 작업에 착수할지도 모른다.
우라라라는 훌륭한 조수까지 있는 만큼 마치 기계수들을 만들어내 지구를 정복하겠다는 야심을 품은 애니메이션 속 매드 사이언티스트처럼 열을 낼 게 분명했다.
‘패스하자.’
이 기계수들은 척 봐도 대단히 좋은 재료들을 이용해 만들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재료들이 다 어디서 나왔겠는가?
헌터들의 장비를 만들 때 그 재료는 또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S급 몬스터에 준하는 능력을 가진 기계수를 만들기 위해서는 S급 몬스터를 사냥해서 그 재료를 구해야 할 것이었다.
어쩌면 하나의 기계수를 만들기 위해 열 마리의 S급 몬스터 사체가 필요할지도 몰랐다.
그런 의미에서 내 눈앞에서 움직이고 있는 기계수들은 대단히 귀한 존재임에 분명했다.
엄청나게 비쌀 것은 자명한 사실.
과학이 발달한 이곳 행성에서도 최고 수준의 프로젝트가 발동하여 만들어진 놈들일 것이었다.
그런 놈들이 다섯 개체나 있는 이곳은 대체 뭘 하는 곳일까?
완전히 보이지 않게 숨겨져 있었고, 실제로 그 은폐는 성공적이어서 행성이 멸망하는 순간에도 이곳은 지켜졌다.
이희진에 빙의한 영웅은 이곳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때가 되면 발굴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게이트에 들어오자마자 곧장 여기로 달려온 것이었다.
아직 이곳에 대한 기억을 백 퍼센트 떠올리지 못해 지금 저렇게 미간을 찡그리고 있는 것이겠지만.
‘흥미롭네.’
미미의 돌발적인 제안으로 할 수 없이 같이 온 것이기는 했지만, 내가 오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당연히 이희진 혼자만의 능력으로는 이 다섯 구의 기계수들을 전부 상대할 수 없었다.
아무리 그녀가 2차 각성을 했다고 하더라도.
더구나 그 능력도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격렬한 전투가 능력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되었겠지만, 그전에 이희진이 죽었을 확률이 백 퍼센트다.
그도 그럴 것이…….
‘자폭 장치가 내장돼 있구나.’
이 기계수들에게는 애니메이션 속 흔한 설정처럼 자폭 장치가 내장되어 있었다.
상대가 너무 강해서 이겨낼 수 없겠다 싶으면, 핵폭발의 몇 배에 달하는 강력한 에너지를 발산하며 폭발한다.
내 분석 능력은 거기까지 밝혀냈다.
‘이런 위험한 놈들을 깨우다니.’
이곳의 비밀이 다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이놈들을 깨우지 않고 돌파하는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희진이 이곳의 설계에 관여했다만 당연히 해법도 알고 있었을 테니까.
아니면 배수의 진처럼 이 기계수들을 물리치지 않고는 비밀의 시스템이 동작하지 않도록 만들어졌거나.
어쨌든 분석이 끝난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이 기계수들은 최대한 안전하게 쓰러뜨리는 것.
기본적으로 S급 몬스터의 준하는 능력을 발휘하도록 만들어진 놈들이니만큼 본격적으로 날뛰기 시작하면 곤란해질 것이기도 하다.
나는 이희진에게서 얻은 유용한 스킬을 사용하기로 했다.
휙-
‘순간이동’으로 기계수 한 놈에게 접근한 나는 놈의 뱃속에 손을 집어넣어 자폭 장치를 꺼내었다.
기계수는 마치 점혈을 찔려 기절한 무협 소설 속 인물처럼 픽, 하고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