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나는 이희진이 하는 행동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그것이 그녀에게 필요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어쩌면 그녀와 함께 이곳으로 오게 된 이유가 전부 이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내 안에 있는 능력이 발동하는 메커니즘을 확실히 알 수 없다.
각을 잡고 명상하면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그러기는 귀찮은 일이다.
천재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이란 지식이나 해석보다는 직감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는 거겠지.
람바스의 경우에는 그 직감을 얌전히 따르는 것이, 거의 백 퍼센트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밖에서 보았을 때는 그저 거대한 크레이터일 뿐이었지만, 그 내부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복잡했다.
문명의 흔적.
이 행성의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이 크레이터 안에는 남아 있었다.
아마도 이 광활한 대지를 뒤집으면 더 많은 유적과 유물을 발굴할 수 있을 것이다.
악마는 이 행성에서 단물을 쪽쪽 빤 다음 내버리고 떠나갔다.
놈은 자신의 기호에 따라서 ‘1. 문명을 한 번 멸망시킨 뒤 그것이 회복되기를 기다려 다시 포식한다. 2. 골수까지 쪽쪽 빨아먹어 그 영향으로 행성이 완전히 사멸한다. 3. 적당히 포식한 뒤 내버리고 떠난다. 이 경우 나중에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는다.’의 방법을 택한다.
이 행성의 경우는 의심할 여지 없이 3의 경우이고 악마가 가장 많이 택하는 선택지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자기 나름대로 입맛이 까다롭다고 할까?
아마 전 우주를 한 바퀴 돈 뒤에 먹을 것이 부족하면 대충 먹고 버렸던 행성에 다시 관심을 가질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단물이 빨려 흥밋거리가 모두 사라진 상태라면 그것도 가능성이 없는 일이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생명체가 멸종한 다음에 생기는 희망이란 전혀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이런 것들은 내가 새로 얻은 능력,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한 명상 끝에 알아낸 사실이었다.
지구는 어떤 케이스에 속하게 될까?
거기까지는 아직 추측할 단서가 부족하지만,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1~3 중 어느 경우에 속하더라도 재앙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희진은 멈추지 않고 과거 문명의 흔적들 속에 파고들었다.
정말로, 전무라고 해야 할 만큼 생명의 기미가 없는 행성이다.
문명의 흔적이라고 해도 모두 파괴되고 남은 잔해들일 뿐이다.
이희진의 안에 이 행성에 살았던 영웅이 깃들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복잡한 기분이 될 만도 한데 그런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한 방향으로 날아갈 뿐이었다.
그녀가 멈춰선 곳은 크레이터의 심층부였다.
가장 밑바닥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이는 그곳에 서서 그녀가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무엇인가의 기척을 찾는 것처럼.
그러다 갑자기 두 손을 뻗더니 잔해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얼핏 보면 화가 난 사람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부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지만, 나는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보기에는 그녀의 심장 박동이 지나치게 평온하고-오히려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 들뜬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표정에도 큰 변화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말을 걸 수도 없는 분위기라고 할까?
다만 좀 지루하게 느껴져서 도와주기로 했다.
지배자의 손아귀를 이용해 망치를 만들었다.
그것을 양손에 쥐고 마나를 불어넣었더니 쑥쑥 크기가 자라났다.
“비켜.”
내 말에 이희진이 깜짝 놀라 순간이동으로 멀리 비켜났다.
아마도 갑자기 등 뒤에서 닥친 커다랗고 위험한 기운에 놀란 것이겠지.
꽈앙-!!!
나는 크레이터의 심층부, 이희진이 뚫어내고자 했던 잔해들을 일격에 날려버렸다.
먼지가 날리는 중에 이희진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차 하는 순간에 벌어진 일이라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2차 각성 후 이희진의 순간이동 능력은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을 정도로 발전했으니까.
말하자면 벽을 넘어 이동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녀가 사라진 곳이 어디인지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했다.
아마도 맨 밑바닥이라고 생각했던 곳에 또 하나의 심층이 있었던 모양이다.
훅- 입바람을 불어 먼지를 날려 보내고 바닥을 보니, 과연 조그마한 구멍이 나 있었다.
500원짜리 동전이 들어갈 만한.
의식하고 보지 않으면 놓칠 만한 크기의 구멍.
나는 그 앞으로 가서 조용히 기척을 탐지해 보았다.
예상대로였다.
사라진 이희진의 기운이 그 안에서 느껴졌다.
이쯤 되니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왜 이것을 만들어 둔 것일까?
이희진이 망설임도 없이 여기로 곧장 왔다는 것은 그녀 안에 깃든 영웅과 이 구멍이 뭔가 연관이 있다고 해석할 수 있었다.
이희진도 이곳에 와서 그것을 깨달았을 것이고.
만약 내가 이희진의 뒤를 쫓는 중에 순간이동 능력을 얻지 못했다면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면, 아래 이희진이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또 한 번의 망치질을 통해 구멍을 넓히려 했을지도.
하지만 이제 나는 그녀와 같은 수준의 순간이동 능력-어쩌면 더 뛰어날지도 모른다.-을 가지고 있으므로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순간이동 능력으로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남들이 보았다면 마법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광경.
하지만 불행히도 이 마법을 구경할 생명체는 행성에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음…….”
나는 구멍 안으로 빨려든 뒤 새삼 놀랐다.
이 안에는 부서지지 않은, 크레이터 안에 있던 박살 난 문명의 흔적이 제대로 보존되었더라면 이렇지 않을까 싶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마치 우주선 내부 같은 모습이라서, 이곳이 현재의 지구 문명보다 훨씬 발달한 곳이었다는 사실을 방증했다.
악마에게 먹히는 것은 문명의 발달과는 무관한 문제였던 것이다.
오히려 발달한 문명일수록 그러한 운명을 받아들이는 걸 허무하게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런 고도의 문명이 무언가 메시지를 남기는 방향으로 작동했다면.
왠지 그럴 가능성의 앞에 서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모든 생명체가 사라진 상황에서 대체 무엇을 기대하고 그런 행동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모든 이성을 지닌 생명체는 마지막 순간이 되면 희망에 기댈 수밖에 없을 터였다.
발견이 되든 그렇지 않든, 메시지를 남긴다는 자체가 중요할 수도 있지.
이희진의 모습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내가 나타나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나라면 당연히 구멍 안으로 사라진 자신을 쫓아오리라고 생각한 모양.
그녀는 전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은 땅 밑에 있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널따란 곳이었다.
물론 루트론 행성은 탁한 공기와 지상을 장악한 괴물들 때문에 문명 자체가 지하에서 형성되었지만 이곳은 그런 사정이 있는 것도 아닌 듯했다.
게다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겠다는 듯 방금 들어온 그 조그만 구멍을 제외하고는 외부로 통하는 길을 모두 없애 버렸다.
내가 예상했던 것이 사실이었다는 확증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이곳은 악마에게 패배하여 문명이 멸종할 것을 예상하고, 그 후를 대비해서 남긴 메시지가 있는 곳이었다.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과연 누구를 위해서, 어떤 메시지를 남긴 걸까?
아마도 그것은 이희진만이,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녀 안에 깃든 영웅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이희진은 크레이터 안에 들어와서 그랬던 것처럼 가만히 선 채로 뭔가를 기억해 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곧 그녀의 발걸음이 한쪽 벽면으로 향했다.
그녀가 벽을 더듬자, 그 안에 강화 유리로 감싸인 버튼 하나가 나타났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강화 유리를 손으로 감싸고 그것을 지그시 눌렀다.
비잉-
기계음을 내면서 강화 유리가 걷어졌다.
아마도 그 유리는 버튼을 보호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누군가의 생체신호를 통해 스스로 사라지게끔 설계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특정한 인물이 만져야 버튼이 드러나는 게 아니라 악마나 사도들에게 반응하지 않는 식으로 설계되었다고 보니 편이 맞겠지.
왜냐면 이것이 만들어질 당시에 이미 이 행성은 악마에게 패배하여 먹힐 것이 확정된 상태였을 테니까.
아마 이 설비가 만들어지는 동안에도 회의감이 가득했을 것이다.
과연 누가 들어와서 이것을 작동시킬지.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벌어졌다.
나와 이희진이 여기 올 것이라고 예상한 것은 당연히 아닐 터였다.
말 그대로 가능성 없는 희망에 기댄 것에 불과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은 땅속에 묻혀 있었던 것일까?
이희진에게 물어보면 답을 알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당연히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이희진은 곧바로 버튼을 눌렀다.
뭔가 본인도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지만 드러난 버튼을 누르는 것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나라도 버튼을 눌렀을 것이다.
비잉- 비잉- 비잉-
강화 유리가 걸렸을 때보다 훨씬 불길한 기계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딱히 누가 말해 주지 않더라도 이것이 위험을 알리는 경고음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경고음 자체는 우주 공통이라고 할까?
넓게 펼쳐져 있던 공간의 각 벽면이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막혀 있던 문들이 우르릉,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문 안에서 스멀스멀 나쁜 공기가 흘러나왔다.
단순히 오랫동안 막혀 있어서 그 안에 방사능이 고였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안에 뭔가가 숨겨져 있던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흐름대로라면 숨겨 놓았던 보물이 나올 만도 했지만, 지금 분위기를 보자니 그쪽은 전혀 기대할 수 없을 듯했다.
오히려 반대의 추측을 할 수 있었다.
이곳까지 악마와 사도가 짖쳐들었을 때, 그들을 막기 위해서 뭔가 장치를 해놓은 것이다.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나이지만, 지금은 불길하게 가슴이 뛰었다.
한마디로 엄청나게 나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젠장.”
나는 지배자의 손아귀를 발동해 무기를 만들었다.
급한 상황이기 때문에 딱히 다른 무기를 상상할 겨를이 없어서, 이곳에 들어올 때 형상화했던 망치를 똑같이 만들어냈다.
쿵, 쿵, 쿵,
몸체가 거대한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 무게감 때문에 공간이 흔들거렸다.
부슬부슬 머리 위로 먼지가 떨어졌다.
거대한 기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저건?”
내가 원망스럽게 묻자-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자기도 몰랐다고는 하지만 이런 위험한 존재들을 불쑥 내보낸 것은 바로 이희진이었다.- 이희진이 미간을 찡그린 채 대답했다.
“기계수야. 이곳은 과학 문명이 발달해서, 사도들과 대항해 싸울 때 기계수들을 이용했거든.”
“그러니까 이걸 왜 지금!”
“몰라.”
허무한 대답이 돌아왔지만, 정말로 본인도 모르는 것 같아서 더 추궁할 수 없었다.
다만 내가 해야 할 일은 이곳에서 벌어질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던 기계수들과의 싸움을 준비하는 것뿐이었다.
진짜 귀찮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