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화
루트론 게이트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 늘 그렇듯 삭막한 공기가 나를 반겼다.
하지만 지난번에 여기에 들어와서 환경에 오래 노출되었을 때, 그에 맞는 능력과 적응력이 갖춰졌다.
덕분에 딱히 불편하지는 않았다.
다만 여전히 시야가 좋지 않다는 것, 이 행성이 기본적으로 품고 있는 공기와 마나의 질이 사람을 괴롭게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내가 이런 가혹한 조건에서도 멀쩡하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굳이 이런 환경을 반길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야시랑 정운석이 고생 좀 했겠는데?’
기본적으로 수행에 있어서는 가히 변태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집착을 보이는 하야시는 그렇다 치더라도 S급 헌터가 된 지 얼마 안 되는 정운석은 꽤 고생했을 것이 뻔했다.
이곳에서 하는 훈련은 먼저 진행했던 훈련과 크게 달랐을 것이다.
애초에 정상적으로 몬스터를 죽이면서 이것저것을 배우기가 불가능한 환경이다, 이곳은.
차라리 하야시와 같이 생존에 집중하는 것이 성장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나나 다나카가 같이 있었으면 더 편했겠지만.’
나는 지난번에 이곳에 왔을 때 다나카와 함께 행성민들과 대면했었다.
물론 좋은 만남은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수의 루트론 행성인들이 죽었으니까.
그 덕분이라고 할까?
이곳에서 나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말 안 들으면 알지’? 하고 주먹만 흔들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수준이 된 것이다.
‘뭐, 그래서 훈련인 거지.’
편하게 할 생각이면 뭐하러 굳이 훈련이라고 부르겠는가?
게다가 S급 헌터 정도 되면 웬만한 수준의 자극으로는 경험치를 얻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루트론 행성은 좋은 기능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더구나 이곳은 정운석에게 빙의한 영웅이 살았던 곳이니까.
그가 성장하기에 최적인 곳이었다.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지만, 당연히 어디에 있는지 모를 하야시와 정운석을 두 발로 찾으러 다닐 생각이 없었다.
그런 일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지금은 여유 있는 상황도 아니고.
지난번에 정운석과 중국 S급 헌터들을 들여보내면서 했던 대로 크게 소리를 질렀다.
“하야시! 정운석! 어디 있냐!”
내 목소리는 대기를 찢고 멀리멀리 날아갔다.
거기 놀란 몬스터들이 움찔, 움찔, 반응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떤 경위로 이런 능력을 갖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다른 몇몇 능력들이 그랬던 것처럼 ‘혹시 되지 않을까’ 싶어서 해봤더니 정말로 된 케이스였다.
내가 뱃심 가득 마나를 불어넣어 어쩌면 행성 전체가 울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소리를 질렀지만, 대답은 금방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하야시와 정운석은 멀리 가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이 게이트에 들어온 것 자체가 관광이 목적이 아니었으니까.
더구나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런 가혹한 공기를 뚫고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할 만큼 멀리 갔을 거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하긴 그렇지.’
나는 중요한 부분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나는 할 수 있어도 저 녀석들은 못 하니까.’
내가 크게 소리를 질러 두 사람을 부른다고 해도 상대 쪽에서도 응답을 못 하면 소용이 없다.
적어도 내가 목소리를 낸 위치는 특정할 수 있었을 테니, 아마 이쪽으로 오고 있을 거라는 짐작 정도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얌전히 그것을 기다리기에는 상황이 너무 급박했다.
지금 서울에 나타난 S급 몬스터는 보통 놈이 아니다.
더구나 몬스터만 상대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본에서 놓쳤던 사도.
놈이 빙의한 김주환도 있었다.
실상 몬스터와 김주환이 한 편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절대로 내가 현장에 늦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나 혼자 갈 걸 그랬나?’
내가 하야시와 정운석을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히 전력을 늘려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지만, 이유가 그뿐만은 아니었다.
S급 몬스터가 출현하면 모든 S급 헌터에게 연락이 가도록 되어 있다.
만약 연락을 받고도 출동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큰 페널티로 작용한다.
평소에는 국가와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S급 헌터이지만, 그것은 당연히 공짜가 아니었다.
S급 몬스터가 나타나는 비상시에 활약해 줄 거라는 믿음이 있기에 S급 헌터가 헌터계의 정점에서 군림하며, 대부분의 알짜 이득을 독차지한다.
만약 본인의 태만으로 출동을 못 하게 된다면?
그 후폭풍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더구나 정운석은 국민들로부터 인기가 많은 헌터이니만큼 그에 대한 추궁이 커질 것이 자명했다.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해서라도 그는 신비주의와 약간의 악인 이미지가 있는 나와는 달리 국민들의 영웅으로 활약해 주어야 했다.
문제는 또 하나 있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될 경우,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가 싸움에 지거나 능력을 잃어버릴 경우 하야시와 정운석은 지구로 돌아오지 못하고 영영 루트론 행성에 갇히게 될 것이었다.
아무튼 이런 복합적인 이유 때문에 일부러 그들을 찾으러 온 것인데, 만약 이러다가 미미와 파프리카, 그리고 이희진과 다나카, 우라라 등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이는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것과 같게 된다.
’너무 시간을 허비하지 말아야지.‘
아무리 그래도 나는 김주환이나 그가 만들어낸 S급 몬스터에게 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시간이 너무 지체된다 싶으면 차라리 혼자라도 현장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소리쳤다.
“내 목소리 들었으면 그 자리에서 마나를 발산해! 내가 데리러 갈게!”
나처럼 큰 목소리는 못 내도 제자리에서 본인들의 마나는 발산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 위치를 특정하여 두 사람을 데리러 갈 수 있었다.
“톤톤즈”
내 뒤를 따라서 날아오고 있던 조그만 새가 “삐이익!” 소리를 내며 날아올랐다.
역시 굉장한 능력을 자랑하는 각성수답게 루트론 행성의 환경에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은 모습이었다.
곧 탁한 공기를 뚫고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톤톤즈는 내 쪽으로 몸을 낮추었다.
하지만 바닥까지 내려앉을 필요는 없었다.
나도 하늘을 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
날개를 펼치고 비상하여 땅과 가까워진 톤톤즈의 등으로 올라탔다.
톤톤즈는 나를 태우고 다시 높이 높이 올라갔다.
“음.”
루트론 행성의 상공은 상대적으로 공기가 맑은 편이었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지만, 이 정도 공기라면 행성민들이 나와서 생활해도 크게 무리는 없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루트론 행성인들도 이런 환경에서 살아남은 종족이니만큼 적응력이 억센 편이니까.
뭐, 지하와 드높은 상공, 둘 중에 살아가야 할 장소를 한 곳만 고르라면 당연히 날개가 없는 생명체는 지하의 삶을 고를 수밖에 없겠지만.
공기가 덜 탁한 영향으로 상공에는 상대적으로 약한 등급의 몬스터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기괴한 날짐승의 형태를 한 그놈들은 톤톤즈의 출현에 기겁하여 도망가기 바빴다.
나는 시력을 돋우어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과연, 내가 한 말을 들었는지, 하야시와 정운석의 것이라고 특정할 수 있는 마나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희미한 그것의 흔적을 따라 움직이면서 아래를 보았더니 곧 그들을 찾을 수 있었다.
의외로 하야시와 정운석은 싸움을 하고 있었다.
상대는 몬스터가 아니었다.
여러 명으로 구성된 인간 집단.
그들은 바로 하야시, 정운석과 함께 게이트에 집어넣은 중국인 헌터들이었다.
내가 모르는 어떤 사건으로 말미암아 중국인 헌터들이 통제력을 벗어나 저들끼리 뭉친 모양이었다.
아무리 기가 꺾였었다고 해도 전부 S급 헌터.
여러 명이 뭉치니까 상대하기 어려워진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가만히 두었다면 결국은 하야시와 정운석이 그들을 제압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나도 이미 상대해 본 적이 있는 터라 중국인 S급 헌터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고 있었다.
아마 본국에는 그들보다 실력이 좋은 S급 헌터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류신휘가 호위로 데려온 세 명, 그리고 진상조사단에 속해 있던 S급 헌터들은 그 실력이 크게 뛰어나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적어도 나를 만난 뒤 일취월장한 하야시보다는 두세 수 아래라고 봐야 했다.
정운석도 자기 능력과 마나를 가장 잘 펼칠 수 있는 장소에 와 있는 셈이었으니 결국 그림은 하야시와 정운석이 이겨서 상대를 제압하는 쪽으로 갔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어쨌든.’
나처럼 목소리를 낼 수 있었느냐의 여부를 떠나 그들이 금방 나를 찾아오지 못한 이유는 알 수 있었다.
느긋하게 위에서 저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는 것도 흥미롭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내가 목을 탁탁, 두드리자 톤톤즈가 강하했다.
갑자기 그림자를 드리우며 나타난 강력한 몬스터 때문에 땅 위의 S급 헌터들이 혼비백산했다.
나와 톤톤즈가 날아간 방향은 중국 S급 헌터들의 배후였다.
하야시 또한 당황한 얼굴이었으나 정운석이 톤톤즈의 존재가 무엇인지 말해주자 금방 상황을 파악했다.
반면 중국의 S급 헌터들은 그야말로 혼비백산했다.
하야시와 정운석을 상대로 고군분투하고 있던 와중에 뒤에서 엄청난 크기와 위압감을 자랑하는 몬스터가 덮쳐온 거니까.
특히 이미 한 번 톤톤즈의 매운맛을 경험한 적이 있는 중국인 S급 헌터들은 더더욱 경악했다.
싸울 생각도 못 한 채 머리를 싸매고 엎드리기까지 했다.
톤톤즈를 바닥에 내려서게 한 뒤에 하야시, 정운석에게 말했다.
“타! 훈련은 종료야.”
길게 설명하지 않았지만 하야시와 정운석은 즉시 톤톤즈 쪽으로 다가왔다.
그들이 동료라는 것을 알고 톤톤즈는 목을 낮추어 그들이 등에 올라타기 쉽게 해주었다.
“심각한 일입니까?”
하야시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는 내 성격을 잘 알고 있다.
웬만큼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굳이 내가 여기까지 와서 자신들을 데려가려고 할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응.”
나는 짧게 대답했다.
어쨌거나 더 지체하지 않고 두 사람을 찾아서 다행이었다.
중국인 S급 헌터 여덟 명은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이곳에 있는 한 어디로도 도망 못 칠 거니까.
나는 떠나기 전에 중국어로 그들에게 말했다.
“여기서 나가고 싶으면 너희들이 처음 들어왔던 장소로 가 있어. 까불면 안 데리러 올 거니까 알아서 하고.”
망연한 그들을 남겨두고 휙 날아올랐다.
게이트가 있는 장소로 돌아와서 바닥에 내려섰다.
톤톤즈도 다시 귀여운 사이즈로 돌아갔다.
게이트에서 나와서 스킬을 써서 호텔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나는 문득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금 새로운 통로 하나가 생성되었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원하는 장소로 이동할 수 있게 해주는 게이트.
그 안에 새로운 문이 생겼다.
전에 일본과 중국으로 이동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하면 대단히 짧게 이동할 수 있는 통로가 열린 셈이었다.
그것은 한 가지 가능성을 시사했다.
내 의지대로, 거리와 상관없이 이동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 수 있다는 것.
‘택시는 안 타도 되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하야시, 정운석 그리고 톤톤즈와 함께 게이트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