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그거 놓으시지요.”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남자 중 하나가 말했다.
그는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나이 많은 남자였다.
대개 각성은 신체 건강한 젊은 나이에 이루어지는 게 보통인데, 이 사람은 예외인 모양이었다.
나이가 들고 나서도 계속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편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중국인들은 무술을 좋아하니까, 나이 많은 사람들이 공원에 모여 태극권 같은 것을 수련하는 것도 흔한 일이라고 한다.
그것이 각성에 영향을 주어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S급 헌터가 된 게 아닐까?
물론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어쨌든 남자는 중국인 헌터다운 풍모를 풍기고 있었다.
은둔 고수가 중국인의 권력자를 호위하기 위해 동원되었다는 느낌.
물론 그것은 사실이 아니겠지만.
류신휘를 호위할 S급 헌터들은 그 말고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사도 도감으로 보았을 때 이곳의 S급 헌터들은 서열이 높지 않았으니까.
더욱 강한 헌터들을 데리고 와도 됐겠지.
고만고만한 S급 헌터 세 명을 데리고 왔다는 것은 한국을 그만큼 무시한다는 뜻이었다.
한국의 S급 헌터들을 무시한다는 의미도 되지만, 감히 중국의 권력자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거라는 오만한 생각이 바탕이 된 게 분명했다.
“싫은데?”
나는 픽 웃음을 지었다.
“허허…….”
은둔 고수의 풍모를 가진 남자가 표정 변화 없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무슨 코스프레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유튜브에서 중국의 난다 긴다 하는 무술 고수들이 별 볼 일 없는 이종격투기 선수들에게 박살 나는 동영상을 보았었다.
그걸 어디까지 신뢰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소위 중국의 무술 고수라는 사람들은 과대평가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일반인과 헌터를 같은 수준에 놓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만, 어쨌든 내게는 다를 것이 없었다.
잘난 척해봤자 밑바닥이 훤히 보인다.
흰 수염 노인은 인내심이 많은 것 같지만, 그의 맞은편에 있던 남자는 아니었다.
그는 말 대신 행동에 나섰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더니 주먹을 확 뻗었다.
‘얼씨구?’
나는 속으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자가 보인 동작도 무술 동작이었기 때문이었다.
과거에 중국 영화에서 많이 보았던 것 같은 무술이었다.
물론 헌터가 발휘하는 무술과 영화배우가 보이는 동작은 질적으로 크게 차이가 난다.
방을 부수지 않기 위해서 절묘하게 마나 조절을 한 것은 알아주어야 할 대목이었다.
그러면 뭐하나?
스치지도 못했는데?
주먹질에 실패한 중국 헌터가 이번엔 발차기를 했다.
전광석화와 같은 발차기, 거기에는 S급 헌터의 묵직한 마나가 실려 있었다.
A급 헌터가 그것을 맞았다가는 말 그대로 박살이 나 버릴 터.
그래서 그는 발동작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내가 류신휘를 들이밀었으니까.
류신휘는 내게 덜미를 잡힌 채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이유는 내가 단순히 그를 붙잡고만 있는 게 아니라 마나를 주입해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류신휘는 A급 헌터라고 해도 스스로 싸운 적이 거의 없는 헌터였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그의 지위를 생각해서 판단한 것도 있지만, 그가 마나를 다루는 방식이 형편없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것은 손가락만 대도 파악할 수 있다.
내 ‘분석’ 능력도 이래저래 사용되는 동안 크게 능력이 향상되었으니까.
어쨌든 중국 권력자의 몸뚱이를 터뜨릴 수가 없었으므로 중국의 S급 헌터는 동작을 멈추었다.
휘익-
갑자기 바람 소리가 났다.
내 머리통을 노리고 추가 달린 쇠사슬이 날아든 것.
그것은 창가에 기대어 바깥을 보고 있던 여자가 날린 것이었다.
입고 있는 옷도 그렇고 머리칼도 짧아서 잘 몰랐는데 이제 보니 여자였다.
아마 그녀가 방 안의 풍경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은 류신휘의 변태 짓을 보기 싫었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튼 그녀가 날린 추 달린 쇠사슬은 꽤나 위협적이었다.
맞았으면 따끔했을 것이다.
일부러 의식하지 않는 한 이런 느린 공격을 내가 맞을 일은 절대로 없겠지만.
‘소란스러워지겠는데?’
흰 수염 노인도 내 실력이 녹록지 않다는 것을 알았는지 슬슬 가담할 기미를 보였다.
S급 헌터 네 명이 맞부딪치면 이 호텔은 어떻게 될까?
솔직히 호텔 건물이 무너지거나 그걸로 인해 호텔이 망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불법의 메카라고 불릴 정도의 호텔이니까,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차라리 사라지는 게 나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이 건물 안에 있을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다면 그것은 안 될 일이었다.
게다가 호텔이 S급 헌터들에 의해 붕괴된다면 그것은 큰 뉴스거리가 될 것이었다.
나는 귀찮은 일은 질색하는 사람이니만큼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나에 관한 뉴스는 전혀 나지 않길 바랐다.
그런 고로.
나는 미미를 돌아보고 물었다.
“류신휘는 네가 처리할 수 있지?”
“물론이죠, 주군.”
미미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미미에게 류신휘를 처리할 수 있겠냐고 물은 것 자체가 그녀에게 실례되는 일이다.
나는 그저 그녀의 반응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짧은 시간 마주했을 뿐이지만 그녀가 류신휘에게 가진 불호감은 꽤 큰 것 같으니까.
아마도 류신휘는 엄청난 공포를 맛보게 될 것이었다.
신체적, 물리적 피해는 입지 않을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지옥을 보게 될 터.
나는 류신휘를 휙 던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세 명의 S급 헌터들이 각자 공격을 해왔다.
나는 그들의 공격을 모조리 피해냈다.
그리고 스킬을 사용했다.
다름 아닌 하야시로부터 습득한 스킬.
내 그림자로부터 뻗어간 세 개의 분신이 중국 S급 헌터들의 몸뚱이를 속박했다.
그들은 속절없이 붙잡혀서 허우적댔다.
“나 좀 갔다 올게.”
“네, 주군. 천천히 다녀오세요.”
나는 인벤토리에서 게이트 상자를 꺼냈다.
‘게이트 생성’ 스킬을 사용해서 세 명의 S급 헌터와 함께 아공간으로 갔다.
“헉!”
“뭐야, 이게?”
“속지 마라! 이것은 적이 만든 환영에 불과하다!”
세 명의 중국 헌터들은 갑자기 바뀐 배경에 혼란스러워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게이트 하나를 불러들였다.
가장 처음에 만들었던 게이트 공간.
얼마 전에 하야시와 정운석이 훈련을 하고 온 차원으로 연결되는 문이었다.
나는 문을 열고 분신들을 움직여 중국인 S급 헌터들은 그 공간 안으로 집어 던졌다.
세 명 다 집어넣은 다음에 문을 닫았다.
‘죽지는 않겠지만.’
S급 헌터들이니만큼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차원에 떨어진다고 해도 살아남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힘을 뺄 수는 있을 것이었다.
정신적인 대미지도 입힐 수 있을 것이고.
같은 S급 헌터인 우라라에게 시험을 했으므로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중국인 S급 헌터들이 본인들이 가게 될 거라고 상상도 못 했을 공간에서 발버둥 치도록 놔두고 바닥에 앉았다.
핸드폰을 꺼내어 게임을 시작했다.
한꺼번에 일을 처리하려고 하면 귀찮고 피곤하다.
미미가 류신휘의 영혼을 속박하는 데도 시간이 걸릴 테니 나는 그동안 게임이나 하기로 했다.
이희진이 보낸 쪽지들을 가볍게 무시하고 게임을 시작했다.
현질을 많이 한 덕분에 게임 속 내 캐릭터는 먼치킨이었다.
물론 현실의 나만큼은 아니지만.
169
“진짜로 말 잘 들을 거냐?”
“네!”
“물론입니다!”
“한국에 이런 고수가 있었다니 놀랐습니다! 부디 제게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주십시오!”
내 말에 피떡이 된 세 명의 중국 S급 헌터들이 소리쳤다.
“아니, 니들 말고.”
이놈들은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구나.
생사가 내 손에 달린 세 명의 헌터 위로 드디어 사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본에서 S급 헌터들에게 빙의했던 사도들은 저네들끼리 도망가서 모습을 감추었었다.
그래서 방심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 사도들은 별로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아무 사도나 그런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사도라도 자기가 빙의한 본체를 벗어나면 대미지를 입는다고 하니까.
도망을 못 치는 것은 이 사도들이 일본에서 놓친 사도보다 강하지 않다는 것이 한 이유였고, 또 다른 이유는 내가 그때보다 훨씬 강해졌다는 데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방심하지 않고 눈을 부릅뜨고 있으니 도망치려야 도망칠 수가 없겠지.
압도적인 능력 차에 벌벌 떠는 것이 정상이었다.
“말 잘 들을 거지?”
내 말에 사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S급 헌터에게 빙의할 정도의 사도들이니만큼 방심은 금물이다.
하지만 나는 놈들을 내 통제력 아래에 둘 생각이었다.
중국으로 돌려보내지 않으면 되지, 뭐.
“알았어, 믿어줄게.”
나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그림자 분신술을 사용해서 게이트 문을 열고 중국인 S급 헌터들을 밖으로 내던졌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나도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중국인 S급 헌터들의 교육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차피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존재들이고, 중국으로 당장 돌아가지 않아도 문제가 없을 인물들이기도 했다.
관리가 곤란하니 일단 처박아두기로 했다.
나는 최근에 갖게 된 게이트인 루트론 게이트를 끌어당겼다.
그곳의 문을 열고 다시 중국 S급 헌터들을 집어넣었다.
“아, 아니! 이미 용서를 빌었지 않습니까?”
“이건 또 어디야?”
“윽! 숨이 막힌다!”
루트론 행성은 무척 빡센 곳이다.
부디 그곳 환경에 잘 적응하길 바란다.
나는 세 놈을 게이트 공간 안에 던져두고 밖으로 나왔다.
진짜 귀찮네.
그래도 류신휘가 미미에게 보였던 비매너를 생각하면 놈이 데리고 온 S급 헌터들도 참교육을 할 필요가 있었다.
자식들이, 상급자 교육을 어떻게 시켰길래.
폭주한다 싶으면 진언도 올리고 해야지.
충신이 사라지고 간신이 활개치면 나라가…….
‘내가 무슨 생각을…….’
무술을 사용하는 중국인 헌터들을 상대하다 보니 어느새 감성이 그쪽으로 흐르고 말았다.
호텔 방으로 돌아왔더니 이미 상황은 정리되어 있었다.
류신휘는 게거품을 물고 바닥에 고꾸라져 있었다.
미미가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세게 하지도 않았는데 일 분을 못 버티네요.”
류신휘는 무늬는 A급이지만 헌터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인물이었다.
그것도 그거지만 미미가 그에게 품었던 감정을 생각하면 세게 하지 않았다는 말도 믿기 어려웠다.
“좀 쉬자.”
내가 머물고 있는 호텔과는 다르지만 이곳의 시설도 나쁘지 않았다.
가끔은 다른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뒹굴어보는 것도 나쁠 것이 없겠지.
나는 추리닝 차림으로 침대 위에 뛰어들었다.
휴대폰을 꺼내는 내게 미미가 물었다.
“주군, 시장하세요? 룸서비스 좀 시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