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모두 놀랐다.
몬스터들을 상대로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던 루트론인들도 놀랐고, 몬스터들 또한 갑자기 등장한 막강한 개체에 화들짝 놀랐다.
나는 다시 한번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 한 마리 몬스터를 더 죽였다.
이번에는 세로로 낫을 그었더니 말 그대로 거대한 몬스터의 몸뚱이가 절반으로 쪼개졌다.
동료가 두 마리나, 그것도 순식간에 죽임을 당하자 몬스터들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나는 놈들을 굳이 추격하지 않았다.
지금 눈앞에 떠오르고 있는 레벨 업 메시지만으로도 충분히 귀찮으니까.
지구에 있는 몬스터들도 괜히 나한테 덤비지 말고 이렇게 달아나주면 편할 텐데.
루트론인들은 달아나지 않고 한껏 긴장한 채로 이쪽을 보았다.
방호복을 입고 있기는 했지만, 머리통에 투명한 구 모양의 덮개가 있어서 얼굴이 보였다.
인간형의 개체이지만 얼굴 생김새는 달랐다.
피부색이 청록색이고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가 달렸지만, 코와 귀가 납작하여 구멍만 뽕뽕 뚫려 있을 뿐이었다.
머리카락도 하나 없이 민머리이다.
피부에 자기들만의 패션으로 문신을 잔뜩 해놓고 있었다.
보이는 것이 얼굴뿐이라 그런 것이지 그 문신은 그들 전신에 있다.
아무튼 그들은 나와 내게 달라붙어 있는 다나카가 적이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몬스터들과 달리 이들에게는 지력이라는 게 있다.
그것도 상당히 높은 수준의 지력이.
덕분에 상황 파악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자기들의 적이라고 해도 이미 도망가기는 늦었다고.
나는 천천히 하강했다.
나와 함께 다나카도 바닥에 내려섰다.
‘이걸 어쩌지?’
다섯 명의 루트론인들과 대치하고 섰다.
하지만 나는 이들의 언어를 모르고, 그들도 한국어를 모르기 때문에 대화를 나눌 수단이 없었다.
계속 이 뻘쭘한 대치를 이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곳에 와서 모래바람을 맞으며 30분 동안 걸은 것만으로 충분히 내 정신력은 한계에 봉착했다.
여기서 더 귀찮은 일을 겪어야 한다면 차라리 다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었다.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다나카가 앞으로 나서더니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언어로 말을 한 것이었다.
그의 말을 들은 루트론인들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같은 억양의 언어로 다나카와 대화를 나누었다.
다나카가 밝은 얼굴로 돌아보고 말했다.
“다행입니다. 우리를 자신들의 주거지로 안내하겠다고 합니다.”
“루트론어는 어떻게 아세요?”
“그게…….”
다나카가 허를 찔렸다는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튀어나왔어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럴 필요도 없고.
아마 그에게 빙의한 영웅에게 탑재된 능력일 것이다.
그 영웅의 지적 수준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방대한 기억을 떠올리느라고 다나카가 그렇게 각성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일 테지.
내가 람바스의 능력을 아주 천천히 깨우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루트론인들의 안내를 받아 입구로 걸어갔다.
그 앞에 선 루트론인 하나가 교신을 하더니 바위처럼 생긴 문이 쩍 하고 열렸다.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열려라, 참깨’ 신을 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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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론인의 거주지로 들어간 나는 점점 더 많은 것들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꿈을 꾸면서 보았던 것들.
원래 꿈이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깨고 난 직후에는 세부적인 것을 기억하기 어려운 법이다.
오히려 완전히 잊어버리는 경우가 더 허다하다.
내 꿈이 엄청나게 디테일하고 생생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곳에 들어와 공기 탁한 길을 걷는 동안 그것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왜냐면 내 꿈의 내용은 99%가 루트론인들의 주거지에서 벌어진 일들이니까.
그들은 지구인처럼 땅 위에 거주하지 않지만, 그들의 땅속 주거지는 지구인들의 그것보다 열 배는 더 광활하고 복잡했다.
땅 위에 건물을 세우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만, 땅을 파고 들어가는 것에는 한계가 없다고 할까?
루트론인의 땅 밑 생활은 역사가 깊고, 그들의 기술 수준도 매우 높다.
게다가 이 행성의 구조는 애초에 땅 밑 생활이 쉽도록 되어 있었다.
지표면에 강력한 방사능이 내리쬐고 있는 반대급부라고 해야 할까?
나는 슬슬 잠들어 있던 기억이 깨어나, 이들이 우리에게 왜 이렇게 친절하게 대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지루함을 참고 그들의 접대를 받는 중에, 은근슬쩍 들이민 음료를 그것을 가져온 루트론인의 얼굴에 부어버렸다.
“으아악!”
“왜 그러십니까?”
다나카는 내가 한 짓에 깜짝 놀랐다.
나는 그가 받아든 음료도 빼앗아 바닥에 던져버렸다.
“우리를 중독시키려는 거야.”
내 행동에 놀란 루트론인들이 경계 태세를 취했다.
그리고 옆방에서 대기 중이었던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우리를 정상적인 방법으로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한 이들이 판 함정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루트론인들이 자주 택하는 전략이기도 했다.
‘어차피 말도 안 통하고.’
다나카는 내가 한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무척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가 깨우친 기억과 내가 꾼 꿈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아니면 그의 능력이 내게 못 미치기 때문에 꿈을 기억하는 디테일에 차이가 있는 것일지도.
어차피 지루했던 참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깬다는 기분으로 살육을 시작했다.
그림은 일방적이지만 어차피 이들은 나를 죽이려고 했다.
그리고 아무리 다나카가 뛰어난 외교능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그들과 우리 사이의 오해는 해소되지 않을 것이었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시간이 너무 걸린다.
결론은 이러했다.
이곳은 이미 과거에 한 번 악마에게 지배당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 주민들은 한 번 멸망한 이후의 세대였다.
악마와 사도들에 대한 기억을 깡끄리 잊어버린.
미나가 말했었다.
악마가 자신이 아끼는 행성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완전히 파괴하지 않고 문명이 부활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먹어치운다.
그것의 반복이었다.
어차피 이들의 기억에 없는 일을 상기케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불가능한 일을 하려고 노력할 바에야 차라리 후딱 이곳에서의 용무를 해치우고 집에 가는 것이 낫다.
‘이곳에서의 용무…….’
나는 피바다가 된 넓은 접객실을 가로질렀다.
“허, 헌터님!”
다나카가 헐레벌떡 따라붙었다.
그도 나름대로 능력을 발휘하기는 했지만, 이 일방적인 살육에 그가 나설 여지는 별로 없었다.
하야시였다면 내가 굳이 나서지 않고 그에게 맡겼겠지만, 다나카의 싸움 실력은 그에 훨씬 못 미쳤다.
“슈팔체의 유골을 찾아야 해요.”
왠지 모르겠지만 이 행성의 영웅이었던 자의 유골을 찾는 것이 내가 이곳에서 할 일이라고 느꼈다.
그걸 찾아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맞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야 해요!”
내 말을 듣고 뭔가가 떠올린 듯 다나카가 씩씩하게 말했다.
그의 눈이 빛나는 것을 보니 유골을 찾고 나서 할 일은 그에게 맡겨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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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팔체의 유적지는 다행히 오래 헤매지 않고 찾을 수 있었다.
다만 거기까지 가는 동안 수백 명의 루트론인을 죽여야 한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쯤 되자 그들도 이 이상의 희생을 바라지 않는다는 듯 더 덤벼오지 않았다.
다나카와 나는 이 행성의 마지막 영웅이었던 슈팔체가 죽었던 장소로 갔다.
악마와의 처절한 사투가 벌어졌던 현장은 이미 묻혀서 그 기억을 떠올릴 수 없게끔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이곳이 바로 루트론의 영웅 슈팔체가 묻힌 장소라는 것을.
그의 처절한 사념이 땅 밑으로부터 느껴졌다.
땅을 파는 것은 귀찮은 일이므로 간단하게 해결하기로 했다.
나는 바닥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핵주먹!’
꽈앙!-
말 그대로 핵폭발이 일어난 듯한 충격이 바닥을 때렸다.
나는 커다란 방패를 만들어 내 나와 다나카의 몸을 감쌌다.
후드드드득-
완전히 뒤집힌 땅 밑에 유골이 드러났다.
유골로부터 강력한 원한과 집념이 느껴졌다.
그의 손에는 활이 쥐어져 있었다.
그 유물은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영웅이 악마와 싸우면서 사용한 신물에 가까운 무기였다, 그것은.
“아아…….”
다나카는 슈팔체의 유골로 걸어 내려갔다.
그가 두 손을 유골로 뻗더니 알아듣지 못할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미미가 같은 행동을 가끔 하지만, 그것과의 차별점이라면 나는 다나카가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주문만 외는 것이 아니라 다나카는 이것저것 의미 모를 행동을 했다.
조심스럽게 유골을 파서 한데 모으더니 마치 기도를 하는 듯한 모션을 취한다.
그가 인벤토리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태블릿 모양의 물건이었다.
기도를 올린 유골로부터 마나가 쭉쭉 뽑혀 나오더니 다나카가 손으로 든 물건으로 들어갔다.
그것을 다나카가 신중하게 조작했다.
그러자 화면에 의료기기의 생명 신호 같은 주파수가 나타났다.
하는 모양만 보면 마치 영혼을 기계 안에 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다나카가 뒤를 돌아보고 외쳤다.
“성공했습니다!”
뭘, 성공했다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자세한 것은 돌아가서 알아보기로 했다.
유골은 여전히 현장에 남긴 채로-마나가 뽑힌 그것은 이전의 아우라를 완전히 잃었다.- 활을 따로 챙겼다.
‘게이트 이동’ 스킬을 사용해서 차원 문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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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하셨습니다.”
나보다 100배는 더 지친 얼굴로 다나카가 말했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태블릿 모양의 물건이 들려있었다.
“그건 뭔가요?”
“영웅의 능력을 담을 수 있는 그릇입니다. 미나 씨의 도움을 얻어서 기억을 되새겨 만들었습니다. 혹시 과학적인 설명을 원하십니까?”
“아니요.”
내가 모르는 사이 다나카와 미나 사이에 교류가 있었던 모양이다.
바쁘구나, 미나.
조수를 붙여주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
그나저나 영웅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라니…….
이 판타지적인 세상에 일어난 또 하나의 판타지스러운 일이었다.
“그걸 어디에다 써요?”
내 물음에 다나카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었다.
“적합한 대상에게 능력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아…….”
비로소 나는 이 한바탕의 소동이 전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다나카에게 빙의한 영웅이 바랐던 일.
전 우주의 강자를 모아 악마에게 대항하고자 했다.
다만 그런 상상으로만 그친 게 아니라 실제로 영웅의 능력을 담을 수 있는 도구도 개발했다.
마치 미래에 이런 일들이 벌어질 것을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재밌네…….’
그나저나 영웅의 능력을 담을 수 있는 적당한 대상은 누가 있을까?
S급 헌터는 부적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미 강력한 영웅의 능력이 빙의된 상태니까.
두 개가 부딪쳐서 좋을 것이 없다고 여겨졌다.
1+1처럼 능력 위에 능력이 더해지면 좋겠지만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A급 헌터 중에 믿을 만한 사람…….’
그렇게 생각하자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검은색 차원 문으로 향했다.
그 안에서 훈련하고 있는 누군가가 딱 좋은 대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