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주군 어때요? 지금 다녀오실 생각은 없으신지…….”
미나가 다소 선을 넘는 듯한 말을 내게 했다.
뭐, 그녀와 내 사이가 제법 가깝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정도 말은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기는 했지만, 자그마치 내게 무언가를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내 성격을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기도 했다.
그렇다는 것은 곧 엄청나게 궁금하다는 뜻일 터였다.
자기가 가져온 이 게이트 상자가 어떤 역할을 할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장비를 업그레이드했을 때도 침실까지 들어와 내 잠을 깨울 정도였으니까.
이미 어떻게도 그녀의 이런 왕성한 호기심을 누를 방법이 없는 것이다.
말 그대로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 호기심이었다.
내가 그녀의 생명을 위협할 일은 당연히, 절대로 없겠지만.
“알았어…….”
아무리 미나가 적극적으로 부탁을 해도 그냥 물리치면 그만이었지만, 나도 솔직히 궁금했다.
그만큼 레몬색 게이트 상자와 얼룩무늬 게이트 상자가 준 임팩트가 강해서이기도 하다.
과연 이 적갈색 상자는 어떤 세상으로 나를 인도할지.
‘귀찮아도…….’
장비는 입고 가야겠지?
아무리 내 무력이 추리닝을 입은 상태로도 다른 S급 헌터에 뒤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을 터였다.
이것은 말 그대로 ‘미지’를 탐험하는 일이니까.
“갔다 올게. 기다리든지 말든…….”
“기다릴게요!”
미나는 냉큼 대답하고 소파에 눌러앉았다.
테이블에 놓인 아이스커피의 스트로우를 입에 넣고 나를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알았다, 알았어.”
나는 상자를 손에 들고 침실로 들어갔다.
장비를 착용한 뒤에는 적갈색 상자를 인벤토리에 넣었다.
이것을 바로 사용하지는 않을 거니까.
대신 내가 인벤토리에서 꺼낸 것은 얼룩무늬 상자였다.
‘이게 상당히 편하다니까?’
얼룩무늬 상자 속 차원에 다른 게이트 상자들을 통합할 수 있는 것은 무척 편한 일이었다.
나는 얼룩무늬 상자를 손에 든 채로 스킬 ‘게이트 생성’을 사용했다.
팟-
배경이 바뀌었다.
깔끔하게 하얀색으로 통일된 배경.
그 안에 두 개의 문이 있었다.
그중 까만색 문 안에는 하야시와 정운석이 훈련 중이었다.
정운석 한 명만 들여보냈다면 걱정이 좀 될 만했지만 하야시와 함께 들여보낸 탓에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아마 나올 때쯤에는 돈독한 선배와 후배 관계가 되어 있지 않을까?
뭐, 내가 오늘 여기 들어온 것은 그들의 훈련 과정이 궁금해서는 아니니까.
나는 인벤토리에서 새 게이트 상자를 꺼냈다.
표면이 우툴두툴한 적갈색 상자.
‘어딘지 익숙하단 말이지…….’
나는 이것의 모양이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랬을 가능성은 없다.
‘게이트 상자’라는 개념은, 그리고 ‘게이트 생성’ 스킬과 미나가 상자를 만들어내는 것까지.
람바스 때에는 없었던 일이니까.
조철웅의 대에 와서 생긴 새로운 요소들이었다.
나는 의혹은 가슴 속에 묻고, 이 게이트를 열기로 했다.
바로 게이트 안에 들어가서 그 안의 세상을 경험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굳이 한 번에 해도 될 일을 두 번에 나눠서 할 필요는 없으니까.
내가 시선을 주자 그 안에 아무것도 채워져 있지 않은 빈 문이 내게 다가왔다.
나는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었다.
그 안에 예의 새까만 공간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다시 문을 닫았다.
손에 게이트 상자를 올린 채로 능력을 발동하자, 상자가 덜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강력한 에너지가 터져 나오려 할 때쯤, 나는 상자를 새까만 공간을 향해 집어 던졌다.
휘이익-
적당히 던졌어도 상자는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파바바바밧-
상자가 열리면서 이 공간이 새로운 배경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윽!”
나는 불쾌한 느낌 때문에 인상을 찌푸려야 했다.
동시에 장비를 착용하고 오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이곳의 공기는 숨을 쉬기 어려울 만큼 탁했으니까.
대기 중에 몸에 좋지 않은 무언가가 짙은 농도로 섞여 있는 듯하다.
거기 더불어 새하얀 빛깔의 태양이 엄청 밝게 비추고 있었다.
내가 S급 헌터라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금방 화상을 입고 말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크게 내리쬐는 광선이 강한 태양이었다.
한마디로 이곳은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
뭐, 일반인이 게이트 안에 들어올 일은 애초에 없겠지만.
“응?”
사람이 살 만한 지표면이 아니라고 생각하자마자 나는 데 자부처럼 무언가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익숙하다, 이곳이.
그리고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바로 꿈에서 보았으니까.
어제.
다나카의 얘기를 듣던 중에 잠이 들었을 때도 보았고, 침실로 들어가 잠을 잘 때에도 이곳에 대한 꿈을 꾸었다.
“젠장…….”
이게 그런 거였나?
유독 이 공간에 대한 이미지와 기억이 선명했던 것이 결국은 새로운 차원으로 만들어지기 위함이 아니었나 생각했다.
이것은 다나카의 능력이 발현된 것일까, 아니면 람바스의 능력이 발현된 것일까?
당연히 후자일 것이다.
다나카는 자신이 떠올린 기억을 내게 전달한 것에 불과했다.
그것을 생생하게 재구성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은 내 잠재의식이었고, 마침 미나가 딱 맞는 게이트 상자를 만들어내서 루트론의 차원 공간과 이어지는 게이트가 열린 것이다.
뭐, 이렇게 말은 하지만-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결과 또한 그러했지만-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발생했느냐 하는 것을 내게 설명하라고 한다면 도저히 자신이 없다.
뿌연 대기 속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들이 시작했다.
거대한 몸뚱이를 지닌 생명체들.
걸어 다닐 때마다 쿵, 쿵, 소리가 난다.
나는 그놈들이 이 공기 나쁜 곳에서 사는 몬스터들이라는 사실을 알아보았다.
이런 곳에서 정상적인 생명체가 살 수 있을 리 없었다.
주민들은 나쁜 환경을 피해서 모두 지하로 들어갔다.
지표면에는 저 생명력 강하고 무시무시한 몬스터들만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더 인간들은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몬스터들은 죄다 A급이다.
이곳 주민들이 나름대로 싸움에 능숙하다고 하더라도 굳이 밖으로 나와 저 몬스터들을 상대할 필요는 없었다.
나쁜 공기를 마시고 사는 놈들이니만큼 고기도 먹을 수 없다.
쿵, 쿵, 쿵.
마치 산책하듯 천천히 움직이던 몬스터 몇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쪽으로 몸을 틀었다.
시력이 나쁜 그놈들은 내 형체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다만 나를 공격해도 좋을지, 먹이로서 가치가 있을지를 재고 있는 것이었다.
다른 부분이 퇴화한 만큼 그런 쪽의 감지력만은 발달한 놈들이었다.
여러모로 기괴하고 멀리하고 싶은 몬스터들인 것이다.
그런 놈들인 만큼 사체에서는 꽤 가치 있는 것을 얻을 수 있는 모양이지만,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당연히 사냥이 아니었다.
나는 예민한 저놈들에게 경고를 하기로 했다.
귀찮게 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파아앗!
귀차니즘인 나로서는 매우 드문 일이게도 강력한 마나를 몸 밖으로 방출해냈다.
장비도 입고 있었던 만큼 거리가 먼 몬스터들에게까지 그것은 쉽게 와 닿았다.
쿠웅!-
한 놈이 놀라서 자빠졌다.
그리고 다른 놈들은 몸을 돌려서 쿵, 쿵, 쿵, 달아나기 시작했다.
나는 나름대로 호기심을 느꼈다.
이곳에서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그냥 이렇게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정도로 여기고 끝낼 수도 있는 일이기는 했지만, 의미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직감으로 파악했다.
‘귀찮네…….’
어제 다나카가 나를 찾아왔을 때부터 시작되었을 새로운 귀찮은 일의 서막이 열렸다.
나는 이 일을 혼자 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같이 올 사람이 필요하다.
하야시는 게이트 안에 들어가 훈련 중이니 부를 수 없고, 미미도 이 공기 나쁜 곳에 불러오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는 그녀가 여기 들어올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다나카.’
그라면 내가 하려는 일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있어야만 그 일에 의미가 부여되어 알맞은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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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는 내가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다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반가워했다.
“주군! 다녀오셨나요?”
나는 호텔 방으로 돌아오기 전에 장비를 미리 벗었다.
하얀색 공간, 대기실이라고 불러도 좋을 그곳에서 장비를 벗고 탈탈 털었다.
방사능을 몸에 묻히고 현실로 돌아오면 안 될 거니까.
그 방사능이 하얀색 차원 공간에서 정화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이런 기능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새롭게 추가된 기능일 수도 있고.- 장비를 벗어 인벤토리에 넣은 다음에 현실로 돌아왔다.
그래서 미나를 다시 보았을 때, 나는 게이트 안에 들어가보겠다며 침실로 들어갈 때 그랬던 것처럼 추리닝 차림이었다.
“응.”
“어때요? 어떤 곳인가요, 그곳은?”
나는 불가피하게 긴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단은 ‘인내’ 스킬을 사용했다.
그리고 미미에게 말했다.
“다나카를 여기로 불러줄래?”
“알겠습니다, 주군.”
다나카를 부르면 내가 긴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내가 해야 할 사소한 일을 미루는 데 S급 헌터를 활용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어차피 그는 부를 생각이었다.
함께 루트론으로 가야 하니까.
부르는 김에 겸사겸사 미나에게 그 행성에 대해서 설명해 주면 좋을 테니까.
아닌 게 아니라 다나카는 대화 그 자체를, 그리고 무언가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내 부하 및 동료 중에서는 드물게 사교적인 성격인 것이다.
그가 전에 정운석의 클랜원들을 한꺼번에 데리고 가 준 일은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오 분도 지나지 않아서 다나카가 호텔 방으로 왔다.
미나는 일단 다나카에게 루트론 행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처음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던 그녀는 이야기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태를 파악했다.
“그러니까 그 게이트 상자가 루트론에 연결된 건가요?”
“대박!” 하고 미나가 입을 쩍 벌렸다.
역시나 그녀가 제작한 게이트 상자로 연결되는 상자는 차례차례 미나 기준으로 대박인 현상을 보여주었다.
내 꿈이 현실에서 구현되어 하나의 세상으로 연결되는 게이트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하면 좀 소름 돋는 일이기도 했다.
이제는 꿈도 마음대로 못 꾸겠다.
다나카도 모든 사정을 알고 나서 놀라워했다.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요! 우연이 아닌 게 확실합니다!”
나도 동감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말했다.
귀찮지만 때로는 미루지 않고 해야만 하는 일도 있는 법이니까.
할 일을 하지 않고 버티면 더 귀찮고 괴로워질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같이 갈까요? 루트론으로.”
“네!”
다나카가 예상했다는 듯 굳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