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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차니즘 헌터-125화 (125/160)

▣ 125화

“별것은 아닙니다.”

다나카는 애써 자리를 마련하여 경청하려고 앉아 있는 내가 무색하게 그렇게 입을 열었다.

“제가 떠올린 기억은 그러니까…….”

그는 신중하게 표현을 고르는가 싶더니 말을 이었다.

“람바스 님과 같은, 아니, 람바스 님에 견줄 수 있는 사람은 전 우주에 한 명도 없을 테니, ‘람바스 님에 준하는’이라는 표현해야겠군요.”

나는 다나카가 말하는 방식으로 미루어 이 대화가 좀 길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예상보다도 더 알맹이가 없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인내’ 스킬을 사용했다.

‘인내’ 스킬은 ‘집중’ 스킬이 생기기 전에 노근의인의 가장 마지막에 있던 스킬인 만큼 상대적으로 그 사용 빈도가 적었던 조철웅의 특능이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레벨이 낮은 편이다.

어쩌면 이게 람바스에게 가장 부족한 특질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래서이니만큼 딴 스킬보다도 이 스킬은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이 선뜻 들지 않았다.

‘노력’이나 ‘근성’, ‘의지’ 같은 스킬들은 사용했을 때 문제를 금방 해결해 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 있지만 ‘인내’는 그저 지루하기만 할 것 같은 느낌이라서.

따라서 지루한 대화를 해야 하는 지금 같은 상황에 제격이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전 우주에 있는 최고의 능력자들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는 말이죠?”

“네, 그중 한 명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왜 다나카가 자기에게 빙의했던 영웅의 기억을 되찾는 데 시간이 걸리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말하자면 그 기억이 용량이 방대하다는 데 이유가 있을 터였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영웅 도감처럼.

그만큼 두꺼운 책에서 꼭 필요한 인물들만 간추린 것이 아마도 다나카가 기억해내는 내용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말하자면 최정예 중의 정예.

이왕이면 영웅의 숫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만, 만에 하나 다나카에게 빙의한 영웅이 우주의 다른 영웅들의 힘을 끌어들일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 능력이 소수에게만 사용할 수 있게 제한적이었다면 그런 발상을 할 만도 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이 영웅들이 사는 장소와 시대는 제각각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그들을 한 자리에 모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가장 큰 의문이었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

나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유는 내 앞에 있는 다나카에게도 영웅이 빙의했기 때문이었다.

같은 현상이 다나카에게 빙의한 영웅이 사는 행성에서 일어나지 말았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만약 그 영웅들을 감지해서 찾아낼 수 있다면, 그들의 기억을 깨칠 수 있다면 정예 부대를 만드는 것도 꼭 불가능한 일은 아닐 터였다.

내 주위에 영웅들이 하나씩 모여들고 있듯이.

물론 내가 영웅을 만나는 것은 이쪽에서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오히려 우연이라고 해야 했다.

무언가의 의지가 작용하여-예를 들어 영웅들의 악마에 대한 복수심이 강해서, 놈을 꼭 죽이고 말겠다는 의지가 역으로 나를 찾아내는 쪽으로 발현되어 이쪽으로 오게 되었다든가. 당연히 내가 악마와 싸워 이길 수 있는 가장 가능성 높은 사람일 테니까.- 모여드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그것은 더디고 랜덤으로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영웅을 골라 그들을 불러들일 수 있다면, 양상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혹시 다나카에게 빙의한 영웅은 그것을 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전 우주의 영웅들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그들을 활용한 전략을 구상한 것도 그런 이유라면 이해가 되었다.

자, 그렇다면 얘기를 계속 들어보기로 할까?

‘인내’ 스킬을 사용해서 그런지 나름대로 여유가 생겼다.

다나카가 하는 말의 여백을 이용해 추리도 할 수 있게 되고.

생각보다 유용한 스킬이며, 앞으로 자주 사용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제가 떠올린 영웅은 멀리 루트론이라는 행성에 살았던 영웅입니다. 그 행성에서는 자그마치 수백 년 동안 사도와 그곳 주민들 간의 대립이 이루어졌으며 싸움이 그렇게 길어지는 동안 악마가 어쩌지 못한 것은 그 영웅의 활약 덕분이었습니다. 결국 그 행성은 악마에게 집어 삼켜졌지만 영웅의 행적은 기릴 만한 것이었습니다.”

“음…….”

뭔가 시간 낭비를 한 기분이었다.

이 정도 이야기를 듣는 것은, 그리고 정보를 얻는 것은 ‘영웅 도감’을 읽는 것만으로 충분하니까.

그런데 뭐라고 할까…….

진짜 이게 다일까?

나는 다나카에게 빙의했던 영웅이 이 사실을 굳이 전달하려고 했다는 것에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더 자세히 말해볼래요?”

내 말에 자신감을 얻은 다나카가 영웅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내게 알려주기 시작했다.

어떻게 다른 행성에 살았던 영웅에 대해 이렇게까지 디테일한 정보를 얻었을까 싶을 정도로 자세한 이야기였다.

마치 내 눈앞에 그 장면이 그려지는 듯했다.

영웅이 앞장선 사도와의 전쟁.

무려 수백 년에 걸친 항쟁.

그것은 영웅의 행성이 특이한 모양으로 생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지표면을 덮은 강한 방사능 때문에 그곳 행성의 주민들은 지하로 들어가서 삶을 영위했다.

따라서 지하의 구조는 무척 복잡했으며, 주민 간의 소통과 교류가 무척 적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래서 사도들도 자기들이 주로 썼던 전략이 잘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그 행성을 공격한 이유는 단 한 가지.

악마가 루트론을 삼키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지표면을 덮은 방사능이 더 식욕을 자극하기라도 한 것처럼.

마치 핫도그 표면에 설탕과 케첩을 바르면 더 먹음직스러워지는 것과 같은 걸까?

나는 당연히 악마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무려 수백 년이 걸렸다고 하면 사도들이 고생했겠지만 악마는 그런 것 따위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도들은 전쟁에서 승리하여 결국 그 행성도 악마에게 꿀꺽 삼켜졌다고 하니…….

“주군, 주군…….?”

나는 먼 곳에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떴다.

그러고 나서 깨달았다.

내가 다나카의 얘길 듣다가 잠이 들었다는 사실을.

‘인내’ 스킬도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다나카의 이야기는 들을 만한 것이기는 했지만, 솔직히 그가 말하는 방식이 좀 지루해서 중간에 깜박 정신을 잃은 것 같기도 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아무리 내가 집중력이 부족하다고 해도 ‘인내’ 스킬까지 발동 중이었는데, 그런 식으로 잠이 들 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나는 다나카의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었다.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마치 그 이야기가 내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처럼.

‘이건 또 무슨 능력이지?’

람바스는 상대방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영화처럼 머릿속에 재생할 수 있는 능력이라도 있었던 걸까?

전투 중에 ‘분석’ 능력으로 세세한 부분, 그리고 그것을 응용하여 더 넓은 이론의 영역까지 확장하는 능력이 있었던 것을 보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람바스가 루트론이라는 곳에 가봤을 리가 없다.

만약 그랬다면 미미가 무언가 언질을 했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몽롱한 중에 떠올린 장면들은 마치 내가, 그러니까 람바스가 실제로 경험한 일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한.

내가 마치 그 영웅이 된 것 같았다.

다나카의 이야기를 어디까지 들었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내 머릿속에는 사도들 간의 치열한 전쟁이 끝나고 영웅이 눈을 감는 마지막 장면까지 재생되었다.

물론 이 그림들이 정확한 것은 아니겠지.

설마하니 내 머릿속에서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어 재생되었을 리도 없고.

‘뭔가가 있는데…….’

아마도 그것은 다나카에게 빙의한 영웅이 지닌 능력이었을지도 모른다.

알맞은 대상-그러니까 람바스-을 만나 이야기를 전달하면 그것이 특수한 능력으로 재현되는 것이다.

이 추측이 맞다면 과연 역사의 퍼즐이 맞추어져서 다큐멘터리가 완성되는 것으로 끝나는 걸까?

나는 그렇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이유가 있다.

다나카가 자신의 기억을 내게 이야기하고, 내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수면에 빠져들어 그 내용을 꿈으로 꾸었다는 것이.

‘모르겠다.’

다나카는 이미 자기 방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는 돌아갈 때 자기가 너무 이야기를 지루하게 했다며 미안해했다고 한다.

뭐, 지루했다는 건 사실이지만 내가 잠이 들었던 이유는 다른 데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그런 건 잘 모르겠고 ‘인내’ 스킬 발동 시간이 끝난 만큼 다시 몸이 나른해졌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이 여세를 몰아서 잠이나 더 자 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나는 루트론 행성에 대한 꿈을 더 꾸었다.

이번에는 더 디테일하고, 더 생생한 꿈이었다.

뭐냐고, 진짜.

재미는 있었다.

마치 꿈을 꾸면서 영화를 보는 것 같았으니까.

끝이 안 좋게 끝나기는 하지만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끝난 이야기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 것이다.

나는 이 꿈에서 무언가 교훈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루트론에서 주민을 이끌고 사도들과 전쟁을 벌인 그 영웅이 정말로 대단한 인물이었구나 하는 것 말고는 얻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 영웅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

만약 그의 사념이 남아서 지구의 헌터에게 빙의했다면 당연히 그를 찾고 싶었지만, 방법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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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다나카의 이야기를 듣고 생생한 꿈을 꾸게 되었는지는 다음날에 알 수 있었다.

바로 미나의 방문을 받고서.

“주군, 또 하나 완성했습니다!”

그녀가 가지고 온 것은 새로운 게이트 상자였다.

그것은 붉은빛이 도는 갈색이었고, 독특하게도 표면이 우툴두툴했다.

“이번에는 좀 특이한 샘플을 이용해 보았어요.”

“특이한 샘플?”

“네, 제게는 많은 샘플이 있거든요. 각종 몬스터 사체로부터 추출한 것, 그리고 게이트 성분 분석 과정에서 나온 것들이요. 혜진 언니에게 부탁하면 부하를 시켜서 배달시키거나 택배로 보내주거든요.”

아, 그렇구나.

나름대로 미나와 박혜진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와 미미, 그리고 파프리카에게만 빼고 모든 사람에게 까칠한 미나가 ‘언니’라고 부를 만큼 가까워진 모양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연구를 하려면 재료가 필요할 것이고, 박혜진을 통하면 그것들을 쉽게 조달받을 수 있을 테니까.

아무튼 무슨 샘플을 사용한 건지 모르겠지만, 이번 게이트 상자의 모양은 특이했다.

“이것은 어떤 차원으로 나타날까요?”

미나는 무척 기대된다는 표정이었다.

그도 이해가 되는 것이, 그녀가 앞서 만들었던 두 개의 게이트 상자를 통해서 나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공간으로 가게 되었다.

당연히 다른 세상으로 갈 줄만 알았는데 의외로 완전히 새롭게 창조된 곳으로 가게 된 것이었다.

거기에 내 영향이 지대하게 미쳤음은 당연했다.

그래서 미나도 나도 모르고 있었다.

이 게이트 상자를 통해 어떤 곳과 통하게 될지.

아니, 어떤 세상이 창조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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