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정운석은 오늘 나를 만나러 와서 혼란의 연속이었지만, 그가 적응하기를 기다려 줄 만큼 나는 인내심이 많지 않은 사람이었다.
오늘은 ‘노근의인집’ 중 한 가지도 사용하지 않았다.
하야시와 정운석을 게이트 안까지 안내하는 것이 딱히 힘든 일도 아닐뿐더러, 사소한 일까지 너무 이 스킬들을 의존하다가는 오히려 더 내 성격을 되찾는 게 더뎌지는 게 아닌가 싶어서.
상식적인 견지에서 보면 스킬을 많이 사용해야 그 스킬의 경험치가 쌓여 레벨이 올라가는 거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그리고 그것이 맞는 말이지만, 이것은 좀 더 복잡한 메커니즘으로 돌아가는 문제라고 볼 수 있었다.
말하자면 람바스와 나는 다른 시공간에 살고 있는 사람이지만, 결국 지금은 하나로 합쳐진 것이다.
그래서 장기적으로는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람바스가 내게 맞춰져야 할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조철웅’이라는 특능에 기대는 것보다 가끔은 이렇게 람바스 자체를 공략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 것이다.
이런 발상도 각성 초기의 나라면 절대로 하지 못했을 생각이다.
헌터 능력이 성장하는 것에 비해 많이 더디기는 하지만 성격 쪽도 확실히 성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다소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두 개의 문 중 하나에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까만색 문이 스윽 다가왔다.
내가 손을 뻗으면 문고리가 잡힐 만한 거리까지.
“엄마야!”
정운석이 놀랐다.
정말 귀엽다니까, A급 헌터는?
그에 대해 진지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던 나는 의외의 모습을 많이 보게 되었다.
아마도 이런 모습들은 정운석 본래의 성격이 아닐까 싶었다.
내게 람바스와 조철웅 두 개의 모습이 있는 것처럼.
신기해하는 것은 하야시도 마찬가지였다.
여느 때처럼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그이지만.
표정으로 놀랐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곳이……. 그곳이군요.”
하야시가 일주일이나 있겠다고 결정한 곳, 그가 수행을 위해서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한 그곳이 이 문 안에 있다는 것을 그가 알아챘다.
그가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염원해 왔던 검술의 완성을 바로 이곳에서 이루었으니까.
한나절 동안의 몬스터 사냥만이 그 검술 완성의 이유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이트라는 특수한 공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측면도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고도로 업그레이드된 훈련실과 같은 역할을 했다.
이 게이트는.
하야시는 그 메커니즘에 대해 잘 모르고, 그것을 이해할 마음도 없어 보였지만, 그런 이유로 이곳에 오는 것을 적극적으로 바랐다.
가르쳐야 할 사람이 한 명 따라붙었다는 것은 상정 밖이었겠지만, 그로 인해 내 허락하에 일주일 동안이나 훈련을 하게 되었으니 그로서는 이득이었다.
“그러니까……. 이 안에 뭐가 있는 건가요?”
정운석은 완전히 인간적인 모습이 되었다.
사실 이런 모습이 평소의 성격일지도 모른다.
정의를 주창할 때는 자연스럽게 진지 모드가 되지만 평소에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그래서 전에 나를 만나려고 호텔에 왔을 때 그 많은 클랜원들이 따라온 것이겠지.
허당인 클랜장을 보호한답시고.
“내 생각에 자네 너무 질문이 많아.”
또다시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는 사실에 고무된 하야시가 냉정한 말을 했다.
엄격하고 좋은 스승이 될 것 같다, 하야시.
“설마 주군이 너에게 안 좋은 것을 하라고 하겠나?”
“주군이요?”
정운석이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젠장. 정운석까지 나를 주군으로 부른다면 참 난감할 것 같은데.
다른 이들이 나를 그런 식으로 부른다는 것을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일 테니 오히려 빨리 아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주군이라고 불리는 것을 궁금해하기에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 여유가 없는 것이다.
‘괜찮을 거야.’
박수철과 장오성도 어쨌거나 살아남았던 곳이다.
몬스터를 먹고 피부 발진이 돋기는 했어도, 적어도 지금은 충분한 식료품을 챙기지 않았는가?
더불어 하야시까지 있으니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끼아아아악!”
아, 깜짝이야!
나는 문에서 불과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던 몬스터가 이쪽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고 얼른 문을 닫았다.
아마 이 몬스터도 자기 딴에 놀라서 소리를 지른 것일 터였다.
‘역시 좀 변하기는 했어.’
왜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전에 까만색 차원 공간으로 가서 하야시와 파프리카가 몬스터들을 죽인 이후로 한동안 놈들이 새로 나타나는 인간들을 경계했던 것과 달리 이곳의 놈들은 겁이 없어졌다.
어쩌면 여기 가깝게 붙어 있던 몬스터도 전에 같은 장소에 내가 나타났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 식이라면 더 많은 몬스터가 가까이 있을 것이었다.
“하야시, 좋겠다.”
나는 그의 바람대로 일이 흘러간다는 생각에 그에게 진심으로 축하를 건넸다.
아마 일주일 뒤에는 미미도 할 일이 많아질 것이다.
몬스터 사체를 정리하는 것은 그녀가 잘하는 일이니까.
가장 소중한 부하를 하찮은 일에 소모한다는 느낌도 있지만, 재능을 살린다는 측면에서는 그녀보다 더 나은 해체 전문가가 없었다.
“이, 이게 뭔가요?”
역시 우리 순진한 A급 헌터 정운석은 문을 열자마자 나타난 몬스터를 보고 깜짝 놀랐다.
“후배, 우리가 바빠질 거라는 뜻이야. 적어도 몇 시간은 너를 지도할 시간이 없을 것 같군. 빨리 무기 꺼내고 마음을 단단히 먹도록 하게.”
음, 이 정도면 준비는 충분한 것 같다.
나는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이번에는 손을 대지 않고 일종의 염력으로-굳이 이런 게 있다고 말을 하지 않아도 나는 염력을 쓸 수 있다. 이런 능력은 람바스가 가진 능력의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 더구나 이 장소는 내 의지에 탄생한 차원이었다. 염력 같은 것을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내 의도대로 무엇이든 움직일 수 있었다. 물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문을 열었다.
“끼아아아악!”
“크아아아앙!”
거 봐.
몬스터 떼가 더 많이 몰려들었다.
이놈들은 먹잇감이 등장하기를 이곳에서 기다렸던 것이다.
벌써 우글우글 몰려들고 있다.
먹이를 두고 경쟁을 벌이는 동물들처럼.
하지만 먹이가 되는 것이 정작 자신들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여, 여길 들어간다고요?”
정운석은 망설였다.
당연한 것이다.
S급인 하야시에게는 이 정도 몬스터 따위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지만 정운석은 A급이라 달랐다.
박수철과 장오성이 몬스터들을 죽이는 걸 포기하고 도망가는 쪽을 선택했던 것과 같은 이치다.
“정의를 위해서야.”
나는 그에게 부스터가 될 만한 말 한마디를 던졌다.
“아, 정의…….”
이것은 놀랍도록 효과가 있었다.
어쩌면 내가 하야시보다 더 정운석의 좋은 스승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면 언제 어느 상황에서건 ‘정의’라는 말만 들으면 정운석은 자동 반사처럼 최선을 다할 테니까.
이 얼마나 단순하고 귀여운 인물인가, 정운석은?
세간의 사람들은 그의 이런 본모습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이미지를 깨지 않기 위해서 클랜원들이 그의 인터뷰를 막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어서 가자고.”
하야시가 검을 꺼내 들고 기쁜 얼굴로 문 안에 뛰어들었다.
내게 정의를 위해서라는 말을 듣고 고양된 정운석도 결심한 듯 나를 돌아보았다.
“다녀오겠습니다!”
“응, 일주일 뒤에 봐.”
“이, 일주일!”
이제야 이 안에 일주일이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은 정운석이 울상을 지었다.
“정의를 위해서야.”
나는 다시 한번 그에게 부스터를 주입했다.
“그래, 정의! 다녀오겠습니다! 주군!”
뭐?
너 방금 뭐라고 했어?
잊어버리지도 않고 그걸 기억하다니.
왜 나를 그렇게 부르는 건데?
물론 어떤 조직이든 윗사람을 부르는 은어나 경칭, 별명 같은 것은 있을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고 말한 것이라면 이해할 수 있기도 했다.
제발 남들 앞에서는 그렇게 부르지 마라.
아무튼 2차 부스터를 주입 받은 정운석은 게이트 안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그의 뒷발이 문 안으로 빨려들자마자 문을 닫았다.
“수고해.”
어휴, 이제 돌아가서 쉬어야지.
간단한 일을 했을 뿐인데 몸이 피로했다.
아니, 몸이 아니라 정신이.
돌아가서 회복을 좀 해야 할 것 같다.
155
하야시와 정운석을 게이트 안에 들여보낸 후로 며칠은 조용히 지나갔다.
근거는 없지만 나는 그들을 훈련 목적으로 게이트 안에 들여보내고, 다시 나올 때까지 일주일이 조용히 지나갈 줄 알았다.
그럴 이유가 딱히 없는데도.
이런 내 조용한 시간은 이틀 만에 깨어졌다.
다나카가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쿠로에서 일본으로 귀화를 한 첫 번째 S급 헌터이기 때문에 상징성이 컸지만, 솔직히 그 뒤로 그가 부각되는 일은 없었다.
싸우는 능력으로 치면 하야시와 비할 바가 아니고, 그렇다고 우라라와 같이 연구와 기술 쪽 특기를 지닌 것도 아니기 때문에 딱히 두드러질 이유가 없었다고 할까?
하지만 나는 잊고 있었다.
그에게 빙의했던 영웅, 많은 전략적 지식과 정보력을 통해 람바스의 존재를 알고, 그라면 악마를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 영웅이 남겼던 말을.
그러니까 그는 악마와 싸울 수 있는 효과적인 전략을 만들기 위해 고심했었고, 그 일환으로 전 우주에 있는 능력자들 중 누구와 누가 힘을 합치면 악마를 이길 수 있는지에 대한 것까지 생각했다.
상식적으로 필요 없는 공상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에게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그가 가진 능력 때문이기도 하고, 결과적으로 죽을 때까지 자신의 시나리오를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그 유지를 지구에 살고 있는 다나카에게 잇게 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다나카는 자기 안에 있는 영웅의 존재를 빨리 자각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그의 기억과 능력을 깨치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았다.
나도 이런저런 일을 거치는 동안 그것에 대해 잊고 있었고.
하지만 예의 바른 다나카는 밤사이 떠올린 자신의 기억 속 파편을 아침-그것도 식사 때가 지나 차분해질 시간까지 기다려서-에 내게 가져왔다.
“주군, 어제 갑자기 떠오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주군과 빨리 공유해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래요?”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얘기를 듣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나를 찾아온 것이 또 어떤 복잡한 사건으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가급적 듣고 싶지 않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 그래요? 그렇지 않아도 다나카 씨가 뭔가 떠올리실 때가 됐다고 생각했어요.”
미미도 그렇게 말하며 거들었다.
그녀가 끓여서 가지고 나온 따뜻하고 향긋한 차와 곁들여서 다나카가 떠올렸다는 기억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