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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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석의 일은 다소 싱겁게 해결되었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쿠로를 상대하거나 S급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인 것이다.
내게 A급 헌터나 그 클랜을 상대하는 일은.
애초에 심각한 일도 아니었다.
아니, 김말중이나 박수철, 장오성에게는 그것이 무척 심각한, 자신의 지위와 장래에 심대한 영향을 끼칠 만한 일이었다고 해도, 적어도 나한테는 아니었다.
그리고 정운석에게도 그렇고.
그렇다고 해도 정운석이 직접 나를 만나자고 했던 것은 의외였다.
행동력이 강한 타입이라는 것은 알겠지만, 보통은 이렇게까진 안 하니까.
이른바 불타는 정의감에서 나온 행동일 것이다.
대한민국의 장래가 걱정되어서, 거기 그치지 않고 전 인류를 몬스터의 위협으로부터 구해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지루하지는 않겠지.’
그런 사명을 가진 사람이라면 적어도 평생 지루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무척 치열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왜냐면 그 목표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으니까.
람바스만 한 천재, 먼치킨 중의 먼치킨도 이룰 수 없었던 일이었다.
‘나는 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 책임이 나에게 전가된 지금 나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할 수 있다고 믿을 수밖에.’
모든 게 람바스가 그린 그림대로, 그리고 미미의 계획대로만 흘러갔다면 오히려 불안했을 수도 있다.
과거와 달라진 게 없으니까.
과거에도 람바스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을 것이고, 미미는 그의 옆에서 계획이라는 것을 세웠을 테니까.
물론 한 번의 실패를 딛고 그것을 바탕으로 교훈을 얻어 새로 업데이트된 계획을 세웠다고 변명할 수 있겠으나, 확률 낮은 도전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같은 사람, 같은 능력으로 도전하는 것은 그 확률이 조금 높아질지라도 같은 결과가 일어날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이다.
게다가 람바스가 가장 크게 극복하고자 했던 점은 바로 자신의 게으름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만 두고 보면 그 게으름은 크게 극복이 되지 않았다.
내게는 ‘노근의인집’이라는 조철웅 특능이 있지만, 그것이 람바스의 성정을 압도할 만큼 치고 나가지 못하는 것이 지금의 사정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 상황만 두고 보면 꼭 내가 못하고 있다고 볼 수도 없었다.
람바스는 자그마치 람바스다.
게으름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먼치킨인 것이다.
내가 아무리 부지런하고 좌절을 모르는 성격이었다고 해도 람바스의 엄청난 능력과 함께 그 성정마저 이어받은 이상 쉽게 극복이 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믿을 만한 구석은 있지.’
과거와 달리 악마를 이겨낼 수 있을 만한 단서.
과거와 현재의 다른 점.
단순히 람바스와 조철웅의 차이가 아니라 악마의 계획을 차단하고 좌절시킬 수 있는 조짐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가장 핵심적인 것이 바로 ‘게이트 생성’ 능력이다.
지금까지 경험한 세 개의 게이트 상자.
그것이 과거의 람바스가 가지지 못했던, 그리고 그 이상으로 내가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심지어 미나가 만들어서 준 레몬색 상자와 얼룩무늬 상자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얼룩무늬 상자 덕에 세 개의 상자를 하나로 합치는 것까지 가능했다.
내가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처음 게이트에 들어가서 했던 명상.
그때 얻었던 깨달음이 멈추지 않고 내 안에서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이 또 다른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스킬의 업그레이드를 이끌고 있는 것이었다.
미나가 만들어 준 게이트 상자는 그것을 촉발하는 매개체가 된 것이고.
사람은 자면서도 무언가를 생각한다고 하니, 아마도 내가 깨어 있는 동안은 게임을 하고 빈둥거리더라도 자는 동안 뇌가 쉬지 않고 일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주인도 모르는 사이에 뇌가 일하고 결과를 도출하다니.
정말로 람바스의 천재성은 이해할 수 있는 경지를 넘어서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계속, 따로 언급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질리지 않고 레벨은 계속 오르고 있었다.
레벨 시스템이 고장 난 거 아니냐고 따지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이것은 만든 사람도 능력이 부족한, 혹은 부지런하지 않은 게임 개발사가 아니라 람바스이니만큼 토를 달 구석이 없었다.
아마도 일반적인 레벨 시스템의 기본이 잘 구현되어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레벨이 오를수록 경험치를 얻는 속도가 느려진다거나 하는.
하지만 나는 S급인데도, 그리고 레벨이 충분히 높음에도 불구하고 레벨업하는 속도가 결코 느려지지 않았다.
물론 최근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으니까.
나는 차라리 일본의 S급 몬스터 세 마리를 내가 직접 상대했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면 아마 훨씬 많은 경험치를 얻었겠지.
레벨도 많이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일은 저지를 수가 없었고, 몬스터 사체를 이용해 미나가 보구를 업그레이드해 주었으니까 결과적으로는 비슷한 결과를 얻지 않았나 생각했다.
‘음…….’
나는 방금 어떤 생각인가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것을 실행해 옮기지는 않을 예정이었다.
왠지 당연하다는 듯 가능한 일일 것 같고, 멀지 않은 후일 하게 될 것 같기는 하지만 내 손으로, 내 발로 직접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악마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고 놈을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악마는 임박한 위협이 아니었다.
놈은 아직까지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놈의 동면이 끝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전에 미나가 언급한 대로 놈은 지금 행성을 포식하고 그것을 소화시키는 중이다.
인간이 식사를 하고 나서도 몸이 나른해지는 법인데, 자그마치 행성을 삼켰으니 그것을 소화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되겠는가?
물론 악마를 인간과 동일하게 생각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놈도 생명체이니만큼 그런 일반적 메커니즘은 적용되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모든 일은 천천히 갈 필요가 있었다.
만약 내가 서둘러서 나 자신을 성장시키는 것이 목표를 달성하는 유일한 수단이고 방법이었다면, 미미가 눈물로 호소해서라도 그렇게 하도록 하지 않았겠는가?
그랬다면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그것을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상대는 모습도 드러내지 않는 악마보다도 차라리 미미일지도 모른다.
나는 정운석을 다시 호텔로 불렀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서.
당연히 내 의지로 한 행동은 아니었다.
미미가 권유한 것이었다.
늘 그렇듯이 나는 그녀의 말을 거부하지 않고 따른 것이었고.
미미의 의견은 이러했다.
지금쯤이면 정운석도 알게 되었으리라고.
자신에게 어떤 영웅의 기억이 빙의되어 있고, 그가 바라는, 그리고 자신이 실행에 옮겨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
말하자면 다나카에게 빙의한 영웅과 대화한 이후 그가 기억을 깨치는 데 시간이 걸렸던 것과 같다.
정운석은 A급 헌터이고, 그에게 빙의한 영웅이 앞으로의 일을 모두 맡기고 사라진다는 식으로 말을 했으므로 정운석이 영웅의 기억과 능력을 이어받는 속도는 더 빠를 것이었다.
그것은 다나카가 여태 그에게 빙의한 영웅이 악마 대용으로 만들었다는 전술을 떠올리지 못한 것과 대비된다.
그래서 미미가 말했다.
“정운석은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니까요. 박수철이랑 장오성이 어쩔 수 없이 정운석이 자기들보다 높은 지위를 누릴 거라는 걸 납득한다고 하더라도 이왕이면 실력으로 압도하면 얘기가 더 쉬워지지 않겠어요?”
박수철과 장오성에게 사도가 빙의했다고 해도 마찬가지로 정운석에게도 영웅이 빙의해 있다.
빙의 상태를 벗어나서-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가정이니까 말해봤자 소용없지만- 싸운다고 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으나, 지금 상태로는 어떤 쪽에도 확실한 우위가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애초에 싸워볼 수가 없다.
정운석만큼 정의로운 성격의 남자가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박수철, 장오성과 싸울 리도 없고 박수철, 장오성도 나와 미미가 인정한 만큼 이 서열을 따를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도 방법은 있었다.
정운석이 확실한 아우라를 보여주면 되었다.
헌터들 간에는 싸워보지 않고도 우열을 감지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법이니까.
박수철, 장오성 그리고 잠재적으로 반항할지 모르는 헌터들이 정운석으로 하여금 그런 실력 차를 느낀다면 이야기는 더 쉬워질 터였다.
즉, 미미의 말은 정운석의 성장을 우리가 돕자는 것이었다.
그에게 빙의한 영웅이 정운석에게 자기 능력을 몽땅 넘겨주기로 마음먹었다고 해서 그것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만 해도 람바스의 능력을 아주 더디게 깨쳐가고 있는 중이니까.
하지만 적절한 푸시가 있다면, 정운석은 빠르게 성장할 것이었다.
그를 불러서 호텔 훈련실을 이용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곳도 분명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차라리 지금처럼 열심히 게이트를 도는 게 더 성장에 도움이 될 터였다.
호텔 훈련실은 성장에 필요한 경험치를 얻기보다 감을 잃지 않고 유지한다는 차원이 맞았다.
상식적으로 헌터들은 게이트에 들어가서 돈을 벌면서 성장하길 원하지, 호텔에서 돈을 써가면서 성장하려고 하지는 않을 거니까.
물론 훈련실도 훈련실 나름대로 존재 의의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정운석에게 의도하는 고속 성장과는 거리가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를 빠르게 성장시킬 수 있는 방법이란 무엇일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더 실력 좋은 사람에게 배우는 것.
그리고 사냥을 많이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드는 것.
두 가지를 한꺼번에 실행할 수 있는 수단이 내게는 있었다.
바로 게이트 안에 들어가게 하는 것.
내가 가진 게이트 상자들은 모두 하나로 통합되었다.
바로 얼룩무늬 게이트 상자로.
그곳에 통합된 두 개의 게이트 중 하나는 몬스터들이 우글대는 차원으로 연결한다.
그렇다.
하야시가 무척 좋아하는 그곳.
아무리 몬스터를 죽여도 끊임없이 나오는 그곳이었다.
미미가 생각한 방법은-나는 그녀에게 내 ‘게이트 생성’ 스킬의 업그레이드에 대해서 말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미나에게 전화로 말해주는 동안 그녀가 옆에서 들었던 것이지만.- 그 까만색 게이트 안에 하야시와 정운석을 같이 집어넣는다는 것이었다.
집어넣는다는 것은 표현이 좀 그렇기는 하지만, 이것은 박수철, 장오성 그리고 우라라를 게이트에 가두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충분히 준비를 하고 들어간다면-예를 들어 먹을 것과 회복 아이템-그곳은 호텔 훈련실, 그리고 현실이 게이트들보다도 훨씬 더 좋은 훈련장이 될 것이었다.
이는 훌륭한 발상이었다.
이 이상 바랄 수 없을 정도다.
까만색 게이트가 얼룩무늬 게이트 안에 통합되었을 때 어느 정도 생각했던 방법이기는 하지만, 정운석이라는 헌터가 같은 편에 합류하게 되면서 그것을 실행에 옮길 적당한 이유를 찾게 되었다.
당연히 하야시는 환호했다.
“알고 있어? 네 훈련이 아니라 정운석을 도우라는 거야. 그게 일차 목표라는 것을 잊지 마.”
“알고 있습니다. 이래 봬도 저 자격증도 있습니다.”
자격증?
나는 하야시가 말하는 자격증이 무도 사범 자격증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는 가르치는 쪽보다 자신이 배우고 성장하는 쪽을 훨씬 선호하는 타입이지만, 어쨌든 자격증을 가진 사범이라고 하니 신뢰가 되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