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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차니즘 헌터-120화 (120/160)

▣ 120화

정운석이 찾아왔다.

내 호텔 방으로.

그리고 혼자 오지도 않았다.

자신의 부하라고 할 수 있는 클랜원들을 우르르 데리고 왔다.

하지만 그것이 본인의 의도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괜찮다고 하는데 이 녀석들이 제가 걱정된다고 해서……. 조철웅 님께 좋은 얘기만 있는 게 아니라고 하면서 굳이 이곳에 따라오겠다고 했습니다.”

정운석은 솔직했다.

S급 헌터를 보고, 그리고 나처럼 썩은 표정의 헌터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역시나 나에 대한 이미지가 백 퍼센트 좋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그것은 김말중의 비호감도가 옮아온 것도 있겠지만, 예전에 유포된 내 사진의 임팩트가 너무 강해서이기도 할 것이다.

이해한다.

그리고 솔직히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 없었다.

그냥 귀찮게만 하지 말아 줘.

“이해합니다. 그래도 이야기는 조용히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저희 헌터님은 나쁜 분이 아닙니다. 우려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미미가 정운석에게, 그리고 그가 우르르 끌고 온 헌터들에게 말했다.

그녀만 한 미녀가 나긋나긋함을 꾸며내는 데 도가 튼 여자가 말을 하자 클랜장에 대한 걱정이 만렙이던 자들의 태도가 바뀌었다.

“아, 그렇습니까? 귀찮게 해서 죄송합니다!”

“저희 클랜장님이 미덥지 않은 구석이 있어서요. 항상 케어가 필요한 분이라 같이 왔습니다.”

“대화 나누실 동안 저희는 물러나 있겠습니다.”

역시 싸우지 않고 적을 물리는 데에는 미미만 한 능력자가 없었다.

물론 정상 클랜의 헌터들은 내 적이 아니지만.

정운석이 내 방으로 들어오는 대신 나머지 헌터들은 물러나야 했다.

손님으로 간주되는 자들이고, 클랜장이 나올 때까지 얌전히 돌아갈 것처럼 보이지도 않아서 그냥 쫓아내지는 않았다.

그들은 다나카가 상대하기로 했다.

어쨌거나 그는 영업 능력이 뛰어난 특이한 헌터이니까.

“제 방으로 가시죠. 한국의 훌륭한 헌터님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와 함께 무용담을 나누지 않으시렵니까? 저는 한국 클랜 헌터분들의 이야기에 무척 관심이 많습니다.”

다나카는 더 이상 일본인이 아니었다.

S급 헌터가 이렇게 친절하게 나오자 정상 클랜 헌터들의 태도는 더 누그러졌다.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저희가 무슨 무용담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S급 헌터님에 비하면 개발의 피죠.”

저네들끼리 “하하하.”, “호호호.”거리며 사라졌다.

좋구나, 미미 다나카 콤비!

앞으로 계속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더 마음에 들었다.

혼자 남겨진 정운석이 호텔 방으로 들어왔다.

그의 인상으로 말하자면 일단은 생각보다 젊었다.

이십 대 후반 정도.

운동선수나 연예인들이 그런 것처럼 젊은 나이에 이미 정상의 성공을 맛본 남자이다.

물론 일반 연예인, 운동선수와 헌터를 그냥 두고 비교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아무리 성공한 운동선수 그리고 연예인이라고 하더라도 한 나라의 최고 수준의 클랜을 이끄는 수장만 한 명성과 부를 얻기는 어려웠다.

‘역시 클랜은 이름을 잘 지어야 하는 건가?’

박수철의 태양 클랜과 장오성의 오성 클랜이라는 이름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정상’에는 말 그대로 최고라는 의미가 있었다.

중2병스럽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을 이루었으니, 보는 사람 입장에서 뭐라고 할 말이 없다고 할까?

정운석은 젊은 것 이외에 남자답다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다부진 체격이었다.

심지가 굳고 강인함이 엿보이는 얼굴이다.

얼핏 너무 세 보여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타입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일부러 걱정이 된다면서 따라온 저 많은 클랜원들을 볼 때에도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부하들에게 굉장히 신뢰감을 주는 타입인 것 같았다.

이런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예의가 밝다.

“안녕하십니까.”

내 썩은 얼굴을 보고도 그리 거리끼는 기색 없이 고개를 숙였다.

“네, 안녕하세요.”

나는 ‘근성’ 스킬을 발동 중이었으므로 별로 귀찮아하는 마음 없이 대답했다.

우리는 자리를 거실로 옮겨서 마주 앉았다.

확실히 박수철과 장오성이 찾아왔을 때와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그들은 나를 이용할 생각에, 그리고 내가 S급 헌터라는 사실에 겁을 먹어서 무척 비굴한 태도를 보였지만, 정운석은 그냥 자신이 먼저 청한 상대를 만나러 온 그 이상의 태도가 아니었다.

심지어 선물도 들고 오지 않았다.

뭐, 이 정도는 비굴함의 영역이 아니라 그냥 예의가 아닐까 싶기는 하지만.

그런 점에서는 좀 약점이 보이는 타입이라고 할까?

“갑자기 뵙자고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절 보자고 하셨는지…….”

사실 이쪽이 오히려 그에게 고마워해야 할 처지였다.

먼저 만나고 싶었던 건 이쪽이니까.

정운석이 연락을 하고 찾아온 덕분에 귀찮은 행동을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물론 그에게 연락하고 만날 약속을 잡고 하는 것들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지만.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정운석이 나를 똑바로 보면서 짧게 말했다.

이자도 하야씨처럼 말이 많지 않은 성격인 것 같다.

다만 하야시가 말이 적어서 편안함을 주었다면 이자는 오히려 답답함을 느끼게 했다.

그렇게만 말하면 나한테 뭘 어쩌라는 거냐?

대충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짐작이 갔지만 이왕이면 그에게 더 자세하게 듣고 싶었다.

내가 가만히 있자 정운석이 말을 이었다.

“지금 대한민국 헌터계의 정점은 조철웅 님입니다. 그것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죠. 다만 그런 조철웅 님을 둘러싸고 이런저런 말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저는 그것을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확인이요…….”

나는 정운석이 내게서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 뭔지 알 수 있었다.

물론 이는 그의 설명이 적절했다기보다는 내가 그에 대해 어느 정도 사전 학습이 되어 있기 때문이었지만.

정운석은 대한민국의 장래가 걱정되는 것이었다.

내가 가장 힘이 세고 이른바 헌터계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대한민국의 미래도 내게 달려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었다.

한마디로 그는 내가 제대로 된 인물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진짜로 대한민국을 맡겨도 좋은 사람인지.

이것은 얼핏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였다.

A급 헌터가 정말로 S급 헌터가 제대로 된 인물인지 판단하기 위해서 만나고자 하다니.

내가 착한 사람이라서 망정이지, 성격 나쁜-대부분의- S급 헌터들 같은 경우에는 엄청 화를 냈을 것이 분명했다.

분위기 파악을 못 한 정운석이 계속 말했다.

“솔직히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말을 믿어야 할지.”

나는 이쯤 되자 다른 걸 떠나서 그냥 호기심이 생겼다.

아무리 오글거리는 멘트라도 누가 내뱉느냐에 따라 확실히 들리는 느낌이 달랐다.

상대가 진지하면 이쪽도 뭐라고 딴죽을 걸기 힘든 법이니까.

다리를 꼬고 물어보았다.

“제가 뭘 어떻게 해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간의 모든 사정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게 알려달라고 부탁드릴 입장도 아닙니다. 다만 조철웅 님이 김말중과 제법 가까운 사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가 언론에 나와서 조철웅 님을 떠받들 듯 말하는 것은 단순히 헌터 님의 공적으로 일본의 S급 헌터들이 한국으로 귀화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닌 것으로 압니다. 외람되지만 저도 나름대로 정보망이 있습니다. 두 분간에 투명하지 않은 교류가 있었던 곳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정운석은 생각보다 답답한 사람이 아닌 듯했다.

그 나름대로 정보를 얻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말마따나 나와 김말중 사이에는 외부인이 알기 어려운 종류의 교류가 있었다.

뭐 결과적으로 애정이 빠진 애증 관계라고 할 수 있겠지.

김말중은 내 노예나 다름없는 처지가 되었지만, 그의 역할이 필요하고 나름대로 유능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인간적으로는 전혀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그것 때문인가요?”

나는 되물었다.

정운석이 말수가 적은 타입인 것은 알겠지만 이렇게 보면 나도 정말로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순수하게 귀찮기 때문이었다.

말하는 게 얼마나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데.

덕분에 정운석이 계속 자기 생각을 풀어 놓아야 했다.

“알고 있습니다. 저도 어린애가 아니니까요. 필수불가결한 관계라는 게 있기 마련이죠. 더구나 김말중은 헌터부 장관이 아닙니까? 우리 헌터들이 그를 통해야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 조철웅 님 같은 위치에 있는 분이라면 그와 어느 정도 가깝게 지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진짜 알고 싶은 것은 조철웅 님의 눈이 어디를 향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눈?

너를 보고 있잖아.

하지만 당연히 정운석이 말하는 눈이란 은유적인 의미이겠지.

말하자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느냐 하는 얘기였다.

이런 걸 나를 찾아와서 직접 물어본다는 것도 어찌 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A급 헌터의 세계와 S급 헌터의 세계는 확실하게 선이 그어져 있기 때문에.

막말로 정운석이 상관할 바가 아닌 것이다.

나는 물었다.

“제가 어디를 보기를 바라나요?”

정운석이 나를 정면으로 보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답했다.

“정의입니다.”

어이쿠.

왠지 맥이 빠지는 기분이다.

‘근성’ 스킬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 대미지를 주다니.

정말 대단하구나, 정운석.

중2병에 걸린 게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가 중학교 2학년생이었다.

“정의…….”

내가 맥빠진 음성으로 중얼거리자 그가 계속 말했다.

“그렇습니다. 정의입니다. 게이트와 몬스터가 출현하면서 인류는 이전 시대 보다 훨씬 풍요로워졌습니다. 하지만 경제적 풍요로움이 전부가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계속 몬스터에게 생명을 위협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제대로 된 세상이 아닐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담보로 한 풍요로움이라니요. 세상은 지금 잘못되어 가고 있습니다.”

과연 그렇다.

정운석의 말은 맞는 말이다.

A급 이하의 고정 게이트는 대부분 잘 관리되고 있지만 S급 게이트 같은 경우에는 차원이 다르다.

얼마 전 일본에서 세 마리의 S급 몬스터가 출현한 다음 벌어진 결과만 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물론 히로키와 두 명의 S급 헌터 이외의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몬스터가 출몰한 지역은 거의 초토화가 되었다.

아무리 관리 수준이 이전에 비해 혁신적으로 나아졌다고 해도 여전히 S급 몬스터는 한 지역, 나아가서는 한 국가를 초토화시킬 만한 힘이 있었다.

S급 몬스터 한 마리가 출현했을 때 그 경제적 효과가 엄청나게 큰 모양이지만, 그 경제적 효과라는 것이 정운석의 말대로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담보로 한 것이라면 차라리 없는 것이 나을 터였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맞는 말입니다. 몬스터는 사라지는 게 맞죠. 그리고 저도 그것을 목표로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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