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나중에 실험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저한테도 알려주세요, 주군.”
미나는 내가 이 얼룩무늬 상자를 가지고 실험할 것을 당연한 전제로 말을 하고 돌아갔다.
나는 그녀가 돌아간 뒤에 그 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원래라면 입고 있는 장비를 훌훌 벗어버리고 바로 추리닝을 입었겠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왜냐면 생각을 한 김에 지금 해버리자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에.
아마도 그것은 발동 중인 스킬 ‘의지’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 실험을 어디에서 하면 좋을지도 이미 생각해 두었다.
그러니까 내가 할 일은 귀찮더라도-항상 이게 문제지만- 이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었다.
‘일단은 이 얼룩무늬 상자가 어떤 건지 알아야겠지?’
이 상자는 새로 제작된 것이니만큼 새로운 세상과 연결될 것이었다.
그곳이 어디인지부터 파악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로 느껴졌다.
나는 상자를 들고 침실로 갔다.
거실이나 침실이나 매한가지이지만, 그래도 이곳에는 미미와 파프리카가 있으니까.
다소 위험할지도 모를 실험에 그들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침실로 가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얼룩무늬 상자를 손에 들고 ‘게이트 생성’ 스킬을 사용했다.
처음 사용하는 상자이니만큼 배경이 바뀌는 속도가 약간은 더뎠다.
그리고 배경 전환이 완전히 끝났을 때, 나는 이걸로 끝인가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바뀐 배경에는 온통 하얀색 공간, 그것 말고 아무것도 없었다.
‘뭐야, 이거?’
설마 미나가 실패한 건가?
아무리 그녀가 먼치킨 천재 개발자라고 하더라도 그녀가 착수한 모든 일이 성공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이것은 그녀 최초의 실패로 기록될 것인가?
‘아니, 그럴 리 없지.’
람바스가 하는 일뿐 아니라 미나가 하는 일도 실패할 확률이 지극히 낮다.
비록 그것이 0퍼센트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결론을 내리기 전에 조사를 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미나가 처음으로 만들어서 준 레몬색 상자도 그러했지 않은가?
그것이 만들어낸 장소는 새로운 차원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어려운 감이 있었다.
실제로 하야시와 함께 조사한 끝에 그것은 각각의 갈림길에 공간을 이동할 수 있는 워프 존이 있는 특수한 공간이라는 것을 알아냈고.
비슷한 일이 이번에도 벌어지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아니, 지금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럴 확률이 지극히 높았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주변에 그야말로 완전히 하얀색 공간밖에 없어서 무언가를 조사하기가 어렵다는 것.
뭔가 단서라도 있어야 행동에 들어갈 수 있을 텐데.
적어도 레몬색 상자로 들어간 공간에서는 동굴이라는 특이성은 있었다.
앞뒤로 길이 나 있어서 그곳으로 가 볼 여지는 있었다는 말이지.
“음…….”
나는 또 다른 스킬을 사용해 보았다.
‘집중’.
왜 이런 생각을 했냐면 비록 이 공간은 아무것도 없이 하얀색뿐이었지만, 약한 마나 반응 같은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약하기는 하지만 마치 그것은 내게 호소하는 것 같았다.
자기를 발견해달라고.
자기의 잠재성을 드러낼 스위치를 눌러달라고.
나는 스킬을 사용하고 눈을 감았다.
마나 반응을 좇아 집중력을 발휘했더니 그 느낌이 강해졌다.
먼 곳에서 먼저 솟아오른 그 반응은 점점 나와의 거리를 좁혔다.
코앞까지.
내가 손을 내밀면 닿을 만한 거리까지 가까워졌다.
그래서 나는 손을 내밀었다.
툭.
상상되는 이미지는 문이었다.
그리고 내 손에 닿은 것도 둥그런 손잡이였다.
눈을 뜨자 예상대로 문이 있었다.
문의 색깔도 하얀색이어서 배경과의 구분감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공중에 떠 있고, 물리적으로 분리되어 있어서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런 곳에 태양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웬 그림자?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애초에 그런 사소한 것을 따질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이곳은.
상식을 버려야겠지.
문고리를 잡기는 했지만 이것을 여는 데에는 역시 망설임이 일었다.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하얀색 공간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갑자기 생긴 문을 열고 들어가기까지는 당연히 망설여졌다.
람바스라면 거침없이 들어갔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조철웅인 데다가 람바스의 능력을 전부 깨치지도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에 까만색 상자로 워프한 차원에서도 무사히 돌아온 나다.
이번에도 명상하면 돌아올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하야시랑 같이 올 걸 잘못했다.
그라면 새 게이트 상자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면 좋다고 따라왔을 텐데.
이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몬스터 떼가 몰려든다면…….
나는 그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진저리가 쳐졌다.
다시 돌아가고 싶어졌다.
‘그래…….’
나는 내가 잡고 있는 문고리를 신뢰하기로 했다.
여차하면 다시 문을 닫아버리면 된다.
새로 펼쳐질 세상이 나를 당황시킨다면 다시 그것과 분리되면 그만이었다.
적어도 이것만큼은 생각대로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더 고민하지 않고 문을 열기로 했다.
“후우…….”
벌컥.
바깥으로 열린 문 안을 들여다본 나는 또 한 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그 안은 문밖과 다를 것이 없었으니까.
그 안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단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문밖은 온통 하얀색 공간이라고 한다면 문 안은 까만색 공간이었다.
‘이래서 얼룩무늬인가?’
예상치 않게 상자의 색깔이 그렇게 된 원인을 발견했다.
그렇다고 해도 아직은 전혀 이 공간의 본질에 접근했다는 기분이 아니지만.
하얀색과 달리 까만색은 불안감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왜냐면 그 안에 무언가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게 하니까.
하지만 이것은 뭐랄까…….
나는 이 안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차원은 상자를 열지 않았을 때 그런 것처럼 오로지 하얀색과 까만색, 얼룩무늬로 이루어진 장소인 것이다.
나는 문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이곳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안전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문을 다시 닫았다.
공간을 분리해야 이곳이 가진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달칵.
문이 다시 닫혔다.
그리고 나는 눈을 감고, 아직 스킬 효과가 사라지지 않은 ‘집중’을 발휘해 보았다.
“음…….”
알 것 같다.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이 공간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이는 마치 호텔 지하실에 있는 훈련실과 같다.
디테일한 설정이 추가되기 이전의 훈련실.
그것과 차이가 있다면 훈련실이 최대 S급 헌터의 훈련을 감당할 수 있게끔 만들어진 공간이라면 이곳은 그것보다 훨씬 더 막대한 에너지를 흡수하고 감당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말하자면 이곳은 하나의 차원을 품어낼 수도 있을 만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잠깐…….’
차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자 내가 애초에 뭘 하러 여기 들어왔는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실험을 하기 위해서였다.
파니카 몬스터로부터 얻은 재료를 바탕으로 얻은 새로운 능력 및 기능을 실험하기 위해서.
‘이것도 예상외라는 것은 분명하네.’
미나가 전에 만들었던 레몬색 게이트 상자.
그것은 결과적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이것도 그런 것이 아닐까?
내 필요와 연결되어 창조된 기존에 없던 완전히 새로운 공간.
이전에 레몬색 게이트 공간이 창조될 때도 그러했다.
미나가 내 마나와 협응이 잘되도록 그것을 제작했고, 나는 스킬 ‘게이트 생성’으로 새 차원으로 들어갔다.
두 가지가 시너지를 일으켜 완전히 새로운 기능을 가진 공간이 창조된 것이었다.
당연히 이번 일도 미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슨 일인가가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이런 식이라고는 예상하기 힘든 것이다.
“음…….”
나는 어쨌든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건지 이론적으로 따져보아 봤자 의미가 없다.
내가 할 일은 이왕 생긴 이 공간을 잘 활용하는 것이었다.
‘여기서라면…….’
파니카의 독특한 능력이 적용된 이 공간이라면 그것이 가능할 것이다.
미나가 말했던 것.
하나의 세상 안에 다른 세상을 풀어 놓는다.
나는 이 현상이 악마가 가진 능력과 닮은 부분이 있다고 보았다.
행성 안에 수많은 게이트를 생성시킨 것.
물론 내가 그 정도 수준까지 가려면 아직 멀었다.
그래도 이런 차원을 창조했다는 것만으로 그 능력의 끝자락에 닿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적어도 기능적으로는 악마의 능력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이 능력은 앞으로 내게 아주 유용하게 사용될 것 같으니까.
나는 인벤토리에서 다른 게이트 상자를 꺼냈다.
까만색 상자.
그것을 손에 쥐고 생각했다.
‘평범하게 쓰는 것이 아니겠지?’
집중을 발휘해서 고민을 좀 해보았더니 ‘게이트 생성’ 능력의 새로운 경지가 열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 장비 안의 파니카 능력이 내 안으로 흡수되어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게 되었다.
나는 상자를 손에 쥔 채로 ‘에너지 차지’ 능력과 그것을 폭발시키는 파니카 특유의 능력을 이미지화했다.
쿠구구구.
상자가 내 손 위에서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이 안에서 벌어지는 반응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상자 안에 있는 에너지가 확장되면서 외부로 튀어나오려고 한다.
엄밀히 말하면 이 상자는 차원과 차원을 잇는 게이트 역할을 하니까 다른 차원이 이 게이트를 통해서 다른 곳으로 완전히 이어 붙으려는 작용이라고 보아야겠지.
나는 손바닥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상자를 온통 새까맣기만 한 공간으로 집어 던졌다.
내 힘으로 던진 것이니만큼 조그만 상자는 금방 공간 안으로 흡수되어 사라져 버렸다.
어딘가에 부딪히는 소리 같은 것은 나지 않는다.
다만 잠시 후.
번쩍!
먼 곳으로부터 강력한 빛이 발산했다.
그리고 그것은 빠른 속도로 확장되어갔다.
빠르게 기존의 공간을 잠식해 들어간다.
배경이 차근차근 바뀌었다.
새로 나타난 배경은 내게 익숙한 것이었다.
왜냐면 이미 여러 번 가보았으니까.
바로 까만색 상자를 통해 갈 수 있는 차원.
그것이 이 공간을 완전히 채워놓았다.
상자는 사라졌다.
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그것을 끌어당겨 보았지만 마치 자기 역할은 다 끝났다는 듯이 존재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군.’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그곳에는 문이 있었다.
좀 전과 차이가 있다면 하얗던 문의 색깔이 까맣게 바뀌었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까만색 게이트 상자로 만들어진 차원이 이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전에 생각한 적이 있다.
상자를 여러 개 가지고 있는 것보다 모든 공간에 쉽게 접속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아마 그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미나의 천재적인 능력과 또…….
‘내 바람 때문인가?’
간절히 바라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것이 일어났다.
스킬 ‘게이트 생성’에 포함된 새 능력이라고 보아도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