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우웩!”
약효 때문인지 우라라는 눈을 뜨자마자 토를 했다.
밧줄에 꽁꽁 묶여 옆으로 눕혀진 상태였기 때문에 그녀가 토한 액체가 얼굴과 머리카락을 더럽혔다.
“끄으응~”
고통스러운 얼굴로 상황을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흐릿한 눈이 나를 발견했다.
“앗!”
깜짝 놀란 그녀가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지배자의 손아귀’가 강하게 억압하고 있었기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리 없었다.
용을 쓸수록 밧줄이 더욱 깊숙이 그녀 몸을 파고들었다.
몇 차례 효과 없는 시도를 한 끝에 결국 포기를 한 그녀가 몸을 늘어뜨렸다.
“하아…….”
눈알을 굴려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는 어디지?”
“그건 차차 말해 주기로 하고,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말이야.”
나는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사실 계속 궁금했던 일이다.
다나카는 그렇다 치더라도 하야시와 우리라마저 한국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한다는 것이 신기했다.
“어떻게 한국어를 알고 있는 거지?”
“우리에게는 원대한 계획이 있다. 아시아를 장악하고 세계로 뻗어 나간다는 것이지. 그걸 위해서 다른 나라의 언어를 익힌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음.”
그 정도로 노력한다는 건가?
S급 헌터들조차?
나는 어째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우라라라는 여자부터가 별로 성실해 보이지 않는 데다가 하야시를 예로 든다면 그는 무도를 연마하는 것 말고는 다른 데 크게 관심이 없는 인물이니까.
그런 인물들이 대의를 위해서 그렇게 많은 언어들을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게 공부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 스킬이 있는 건가?”
내 물음에 우라라가 픽 웃었다.
“스킬이 아니지. 도구야, 도구.”
“아, 도구.”
하기야 스킬은 가지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장착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나저나 그런 어학 도구가 있다니 정말 놀랄 노자네.
그런 게 있으면 이미 세상에 퍼지지 않았을까?
전 세계 수십억 인구가 더 이상 언어가 통하지 않아 고민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그야말로 세계인의 거리가 확 줄어들 것이었다.
그런 획기적인 물건이 있었는데 내가 모르고 있었다는 게 좀 억울했다.
‘그게 아니겠지.’
난 생각했다.
그런 어학 도구가 있다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것을 개발한 사람은 엄청나게 돈을 벌었을 테니까.
그런 기회를 놓칠 수가 있겠는가?
아마도 헌터들만 사용할 수 있는 어학 도구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쿠로 안에서 자체적으로 개발한 것이 아닐까?
놈들은 방금 우라라가 말한 대로 세계로 뻗어가겠다-혹은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자기네들끼리의 포부가 있으니까.
“혹시 그거 네가 만든 거야?”
나는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어서 우라라에게 물어보았다.
쿠로에서 머리를 굴리고 뭔가를 개발하는 것은 그녀의 역할이 아닌가 싶어서.
“당연하지 내가 아니면 누가 그런 걸 만들었겠어? 다들 돌대가리뿐인데.”
뭔가 자포자기한 얼굴로 우라라가 말했다.
그래도 자기가 속해 있던 조직인데 이런 식으로 금방 험담을 하는 것은 좀 아니지 않나?
일본 쿠로의 조직원들은 나름대로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똘똘 뭉쳐 있는 거 아니었어?
“필요하다면 너에게 주겠다. 대신 이것 좀 풀어 줘.”
퍽!
나는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
조금 아프라는 마음을 담아, 하지만 너무 세지는 않게.
“으아악!”
하지만 우라라는 괴성을 지르며 데굴데굴 굴러갔다.
데굴데굴, 데굴데굴,
“우웩! 우웨엑!”
구르면서 소리 지르고, 소리 지르면서 마구 토해댄다.
때문에 그녀의 윤기 있는 머리카락은 완전히 자신의 토로 더럽혀졌다.
나름대로 예쁜 얼굴에는 건더기가 덕지덕지 묻었다.
나는 한 짝을 우라라의 몸을 묶는 데 사용했기 때문에 오른쪽밖에 남지 않은 지배자의 손아귀를 까딱했다.
그러자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밧줄에서 자력이 발동해서 다시 내 쪽으로 데굴데굴 굴러왔다.
바닥에 흩어졌던 토가 그녀의 얼굴에 다시 한번 칠해졌다.
뭐라고 할까?
여러 가지 토핑을 잔뜩 묻힌 핫도그가 연상되는 모습이었다.
“거래가 되겠냐? 그걸로?”
얘는 나름대로 쿠로에서 머리를 쓰는 역할인 것 같은데, 따지고 보면 어설픈 구석이 많았다.
그 검은 상자마저도 오랫동안 연구한 것 같은데 허점이 많고 어설펐다.
“때리지 마라.”
우라라는 이런 상황이 되어서야 내게 애원했다.
걷어차인 배가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자신의 토가 머리카락과 얼굴에 온통 묻어 있다는 것이 무척 굴욕적인 모양이었다.
“상황 파악이 안 되지?”
나는 양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로 말했다.
“아니, 그게…….”
우라라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자신의 처지를 모르지는 않을 텐데, 적에게 그것을 인정하는 말을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
이 주변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서 몬스터가 청소되었다고 해도 이 행성에 있는 모든 몬스터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존재를 감지한 몬스터들이 먼 곳에서 오고 있었다는 얘기.
제법 많은 수의 몬스터 반응이 느껴졌다.
그것을 우라라도 분명히 느끼고 있을 터.
“여기서 잘살아 봐. 나는 갈 테니까.”
“자, 잠깐! 야 이 자식아! 돌아와! 이 잔인하고 무정한 자식!”
우라라가 발버둥을 쳤다.
“뭐라고?”
나는 우라라에게서 등을 돌린 상태에서 고개만 뒤로 돌렸다.
“아니, 내 말은…….”
내 눈빛을 본 우라라가 흠칫 몸을 굳혔다.
“네가 하려고 했던 짓 아니야. 내가 여기서 빠져나오지 못했으면 어떻게 됐겠어?”
“으음, 그건…….”
우라라가 우물쭈물하면서 눈알을 굴렸다.
“어쩔 수 없었다. 조직의 명령이라서…….”
“나도 어쩔 수 없어. 너한테 당한 게 있으니까 갚아주는 것뿐이야. 잘 있어라.”
“잠깐만!”
얼마나 다급했던 것인지 우라라의 모습이 확 변했다.
어떤 식으로 변했냐 하면 그녀의 몸 위로 유령 같은 것이 휙 솟아오른 것.
한마디로 그녀에게 빙의해 있던 사도가 나타난 것이었다.
‘들어가.’
나는 사도 도감이 펼쳐지기 전에 그것을 덮어버렸다.
S급 헌터에게 빙의한 사도인 만큼 서열이 꽤 높은 사도겠지 것이다.
방심한 사이 내 머릿속에 그 사도가 과거에 저지른 나쁜 짓들이 그려졌다.
역시나 끔찍하디끔찍한 장면들이었다.
사도들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자신들의 본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악마에게 행성을 바치기 전에 자신들의 온갖 욕구를 발산하고 충족한다.
그곳에서 자기들이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을 즐기는 것이었다.
그것이 나름대로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한 포상이라고 여기는 것.
‘아, 젠장.’
역시 나는 우라라를 용서할 운명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런 장면까지 보고 나서도 저 사도를 용서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람바스도 녀석 때문에 고생한 전적이 있고, 놈을 끝내 잡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 기억이 있었다.
물론 적극적으로 잡고자 했으면 잡았겠지만, 그때도 람바스의 게으름이 사도에게 살아남을 기회를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오랜만에 예전에 얻었던 스킬을 꺼내기로 했다.
오른손에 낀 지배자의 손아귀를 강력한 장갑 형태로 변화시켰다.
주먹 가득 강력한 마나를 담아 사도를 향해 휘둘렀다.
‘핵주먹!’
뻐어엉!
우라라와 연결된 사도가 고무줄처럼 쭉 늘어지면 멀리멀리 날아갔다.
하지만 본체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서 다시 이쪽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탄성이 더해져 되돌아오는 놈에게 나는 다시 한번 같은 스킬을 날렸다.
‘핵주먹!’
뻐어어엉!
어차피 살려둘 생각이 없었으므로 손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잔인하고 약삭빠른 사도가 과거에 저지른 짓들을 보아 버렸기 때문에.
세 번째 날린 주먹이 마지막이 되었다.
퍼엉!
내 핵주먹을 버티지 못한 사도가 산산조각이 나 터져 버렸다.
우라라에게 빙의했던 사도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
“아아…….”
우라라가 이상한 신음을 냈다.
그녀의 눈동자가 뒤집혔다.
빙의했던 사도가 사라지면서 그녀의 안에 있던 마나가 크게 요동치고 있는 것.
그것이 그녀에게 큰 고통을 선사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됐지만 꽤 쉽게 의식을 잃는 그녀였다.
이번에는 뚝 하고 동작이 정지되었다.
이렇게 보면 멘탈이 상당히 약한 타입 같은데.
나는 그녀의 몸을 묶는 데 사용했던 지배자의 손아귀를 벗겨냈다.
그것을 챙긴 뒤 그냥 돌아가려다가 기절한 여자를 홀로 두고 간다는 것이 좀 마음에 걸렸다.
이미 사도가 사라졌고, 이전만 한 능력을 구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몬스터들은 이미 수백 미터 거리까지 다가와 있었다.
놈들의 공격이 닿기까지 불과 수십 초밖에 남지 않았다.
“에잇.”
나는 우라라를 어깨에 들쳐멨다.
‘차라리 노예로 부리는 게 낫겠지.’
나는 그녀가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차원을 이동할 수 있는 상자를 만들고 외국어를 순식간에 익힐 수 있는 헌터 전용 어학 도구까지 만들어낸 여자였다.
앞으로 새로운 개발을 해내지 못할지라도 어느 정도 역량이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만 했다.
‘미나도 조수가 필요하겠지.’
연구에 미쳐서 해쓱해졌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름대로 고생을 했고, 이제 돌아갈 곳도 없어진 처지이니 온정을 베풀어 줄 만한 여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몬스터들의 공격이 닿기 직전에 그녀를 어깨에 메고 다시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내가 우라라를 다시 데리고 왔을 때 미미는 예상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주군은 마음이 무척 너그러우세요.”
그녀는 우라라에게 엄청 화가 나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어느 정도 해소된 모습이었다.
“사도는 사라진 거죠?”
미미도 그것을 느낀 것인지 자신의 토로 더럽혀진 우라라를 보면서 그렇게 물었다.
“응.”
“그러면 깨끗이 씻길 필요가 있겠네요.”
미미가 말하는 씻길 필요가 있다는 얘기에는 우라라를 목욕시켜야겠다는 의미만 담겨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내가 나름대로의 피로감을 풀기 위해서 소파에 누워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을 때, 미미는 호텔 방 한쪽에서 몸을 씻어 깨끗해진, 그런데 여전히 기절해서 축 늘어져 있는, 능력을 잃어가면서 시들시들해진 우라라에게 의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처음 들어보는 말들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그녀가 적들에게 주술을 걸어서 노예로 만들 때 사용했던 것과 같은 언어이다.
그 내용을 나는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세세한 내용까지 귀담아들을 필요는 없었지만 대충 내용을 들어보니 지금까지 미미가 주로 행했던 주술의 반대 작용을 일으키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말하자면 상대를 회복시키는 것.
얼핏 보아도 이것은 그녀가 그동안 해왔던, 즉 적들에게 나쁜 영혼을 뒤집어씌워서 복종시킨다거나 아니면 엄청난 공포를 맛보여서 배신할 수 없게 만든다거나 하는 것보다 훨씬 고차원의 작업임을 알 수 있었다.
사도가 빠져나가 시들해진 우라라의 몸에서는 빠른 속도로 능력과 마나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것을 되돌리는 작업이었다.
아니, 능력의 유출이 되는 것을 전부 막을 수 없겠지만, 그것을 최소화라고 궁극적으로는 멈추게 하는 작업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