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차니즘 헌터-104화 (104/160)

▣ 104화

우라라를 치워둔 다음에 나는 미나에게 연락했다.

내가 방금 다녀온 그 차원에 대해서 할 얘기가 있어서.

물론 나 스스로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는 방법도 있었지만, 나 대신 머리를 써주는 사람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미나는 머리를 써서 연구한 것을 굉장히 좋아했다.

역시나 연락했더니 쏜살같이 달려왔다.

불과 2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녀가 살고 있는 곳과 호텔과의 거리를 생각하면 정말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그녀의 얼굴색은 많이 좋아져 있었다.

아마도 미미가 그녀를 위해 만들어 준 보양식이 효과를 발휘한 게 아닐까 싶다.

“어떻게 생각해?”

나는 현상을 설명한 다음 미나에게 의견을 물어보았다.

“주군이 짐작하신 그대로예요. 그렇게밖에 해석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짐작 가는 부분이 있다면 그 상자를 만들 때 주군이 사용하기 쉽도록, 즉 주군의 마나와 상자가 공명하게끔 제작했다는 것이에요.”

“그게 무슨 뜻이지?”

“저는 주군의 보구를 만든 사람이잖아요. 저는 주군의 마나가 작용하는 방식에 대해서 나름대로 잘 이해하고 있거든요. 그것을 이 상자를 만들 때도 응용했던 거죠. 하지만 제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반성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이 기술의 많은 부분이 아직 미지의 영역에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주군을 위험에 빠뜨릴 뻔했어요. 죄송합니다…….”

“아니, 전혀.”

나는 시원하게 대답했다.

물론 미나가 이것을 만들었을 때 어느 차원으로 통할지 모르고, 또 어떤 작용이 일어날지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리 안전하다고 볼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녀가 만든 물건에 실수가 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번 경우만 두고 보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봐야겠지.

이를테면 발명가가 이것저것 많은 시도를 한 끝에 실수로 뭔가 대단한 것을 발명해낸 것과 같다.

‘그래서 그런 건가.’

미나의 말을 듣고 보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나와 잘 공명하게끔 만든 장치라면 내가 막연하게 한 번은 만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인물을 만날 수 있게 통로가 연결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것은 ‘게이트 생성’ 스킬과도 연관이 있을 터였다.

이 스킬은 나만의 오리지널리티 스킬이니까.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업그레이드되고 있다.

내가 스킬을 발동할 때 특정한 의지가 작용했고, 또 미나가 내 맞춤형 도구를 만들었다고 한다면, 두 가지가 시너지를 일으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보는 것도 틀린 추측이 아니리라.

“그래서 그곳에 갈림길이 있었다는 거네요…….”

미나가 중얼거렸다.

“꽤 많이 있었어. 그리고 그중에서 반응이 나타난 것은 일본으로 통하는 길밖에 없었고.”

“그렇다면 빈 통로들은 아직 개발이 덜 되었다는 거네요. 앞으로 다른 통로가 얼마든지 열릴 가능성이 있다는 뜻일 거예요.”

과연, 이런 방법도 있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전에는 수많은 상자를 만들면 그것을 통해서 각자의 차원으로 갈 수 있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만약 하나의 상자를 통해서 여러 차원으로 갈 수 있다면 그것은 굉장히 간편한 일이 될 터였다.

하지만 미나는 나와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이 상자는 ‘지구’의 여러 곳과 통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봐야 할 것 같아요.”

아, 그렇단 말이지?

지구의 여러 장소와 통한다고 한다면 그 갈림길 각각이 다른 차원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약간 아쉽지만 그래도 지구의 여러 장소를 한 번에 워프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꽤 유용할 것 같다.

“말하자면 주군은 자연스럽게 악마가 발휘하는 능력의 원리를 깨우치신 거예요. 악마는 자기가 먹어치운 행성들을 게이트를 통해 연결할 수 있잖아요. 하지만 주군은 악마와 달리 행성을 포식한 적이 없어서 그 정도까지는 아닌 거예요. 다만 주군이 살고 계신 지구 곳곳으로 연결할 수 있는 문을 열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신 거죠.”

“그렇군.”

미나의 말을 들으니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전율이 인다.

정말 대단하구나, 람바스.

수 시간 동안 명상을 했고, ‘게이트 생성’ 스킬이 어느 정도 업그레이드되었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이 정도로 개발되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미나는 다른 행성과 연결되는 차원의 문을 만들지 못하는 이유가 내가 행성을 포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행성을 먹어치운다는 것 자체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스케일일 뿐 아니라 이 작용이 일어나도록 하려면 막대한 양의 마나가 소모될 터였다.

그 정도로 어마어마한 존재라는 뜻이다, 악마는.

놈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면 막연하고 답답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쨌든 나는 지금 작게나마.

놈과 같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하면 진짜 악마와 동등한 레벨이 되는 것도 아예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람바스를 아는 사람들이 그를 세상을 구할 유일한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 있었다.

“그렇다면 레몬색 상자는 사도를 상대할 때 사용하면 되겠구나.”

나는 그렇게 정리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어느새 미나 옆에 와서 앉아 있던 미미가 말했다.

“일본으로 가는 문이 열린 김에 이것을 이용하는 거예요. 저는 놈들을 크게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데 주군에게 하는 짓을 보니 가만두면 안 될 것 같아요. 좀 놀래켜 줄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놀라게 한다고?”

“네. 하지만 그러려면 주군이 좀 나서 주셔야 해요. 이 일은 오로지 주군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음.”

나는 일단 미미의 얘기를 들어나 보자고 생각했다.

그녀가 생각해 낸 일이니까 뭔가 그럴듯한 계획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리고 그녀가 하는 말을 다 들었을 때, 성공만 한다면 대단히 효과적인 한 수가 될 것 같았다.

“괜찮네.”

이것이 성공한다면 쿠로는 앞으로는 결코 나를 우습게 보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가장 좋은 것은 이 일을 내가 했다고 티 내지 않는 것이지만.

일본 내부 사정을 함부로 타국 헌터를 건드리겠다는 생각을 못 할 정도로 바쁘게 만들어 버린다면.

그것은 잠재적으로 귀찮은 일을 줄이는 결과가 될 것이다.

“우리도 할 일이 많은데 말이죠.”

미미가 팔짱을 끼고 그렇게 말했다.

하기야 그녀는 본래부터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쿠로가 지금처럼 계속 나를 집적거리면 당연히 그녀의 계획에도 차질이 있을 것이었다.

미미는 당연히 그것을 바라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미미가 바라지 않는다면 나도 바라지 않는다.

138

나는 우라라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마음을 정했다.

그녀는 현재 미미가 복용시킨 약을 먹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는데, 나는 그녀를 데리고 어딘가로 갈 생각이었다.

그곳은 바로 우라라가 나를 없애기 위해서 제작했던 까만색 상자, 그것을 이용해 갈 수 있는 차원이었다.

박수철과 장오성을 혼내 줄 때도 그들을 그곳에 가두었지만, 나는 우라라는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박수철과 장오성과 같은 방법으로는 효과가 덜할 테니까.

S급 헌터인 그녀는 하야시만큼 무력이 뛰어나지 않더라도 몬스터와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는 방식으로 이곳에서 연명할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박수철과 장오성처럼 먹을 게 없어서 몬스터 사체를 먹어야 한다거나 하는 불편을 겪겠지만 적어도 그들처럼 그것을 먹고 피부에 발진이 생긴다거나 하는 일을 없을 터.

한마디로 별로 효과가 없는 방법이라는 뜻이다.

그녀를 상자에 넣어두면 내가 필요할 때 그것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도 불편한 점이다.

나는 우라라를 직접 상대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녀를 묶어둔 채로 ‘게이트 생성’ 스킬을 사용했다.

팟-

역시나 다른 차원으로 진입할 때 속도는 스킬을 사용할수록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장면 전환을 한 것처럼 순식간에 배경이 바뀌었다.

이 정도면 나중에 가서 ‘상자’라는 매개체 없이도 차원 이동이 가능한 수준이 되지 않을까?

나는 그것이 불가능한 발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직 이 스킬은 개발될 여지가 많이 있으니까.

내가 그 이론을 더욱 깊이 체득하고 나면 상자라는 매개체 없이 다른 차원을 쉽게 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능력이었다.

더불어 지금 단계에서 바라면 욕심일 거라는 생각도 든다.

‘차근차근하면 되겠지.’

상자를 이용하는 것도 결코 불편한 방법이 아니다.

이 상자는 부피가 작은 만큼 평소에 인벤토리에 넣어 두면 되니까.

꺼내는 것 정도의 수고는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었다.

“음…….”

다만 나는 여기에서 다른 발상을 한 번 해보았다.

왜 일일이 인벤토리에서 물건을 직접 꺼내야만 하는 거지?

불쑥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인벤토리 안에 있는 물건을 꺼낼 때 굳이 그 안에 손을 넣는다는 행위를 하지 않고도 더 쉽게 꺼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 의구심에 빠진 지 불과 몇 초 만에 스킬이 생겼다.

‘뭔가 허무하네.’

이렇게 빨리 스킬을 얻었다는 것은 그 원리 자체가 복잡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즉, 본래 할 수 있었는데 단지 발상의 전환을 하지 않았다는 뜻.

하지만 인벤토리에서 뭔가를 꺼낼 때 직접 손을 움직인다는 것이 불편하다고 여기지 않는다면, 즉 나처럼 엄청난 귀차니스트가 아니라면 이런 발상을 떠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도움이 되네, 귀차니즘.

역시 발명이라는 것은 ‘더 편하게 하고 싶다.’라는 생각에서 출발하는 걸까?

나는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레몬색 상자를 꺼내고 싶다고.

그러자 팟 하고 내 손에 상자가 쥐어졌다.

이것을 다시 넣는다고 생각해 보았다.

즉시 손에 있던 상자가 사라졌다.

그것이 향한 장소가 인벤토리라는 것은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될 터였다.

나는 이제 전보다 쉽게 인벤토리에서 물건을 놓고 꺼내는 걸 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스킬을 더 발전시킨다면 최초에 사물을 인벤토리에 넣을 때도 같은 방식으로 시간과 노동을 단축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생각해 봐야지.

조금 응용을 해야 하는 만큼 몇 초 만에 스킬이 생길 것 같지 않았다.

다른 차원에 도착했을 때도 우라라는 여전히 잠에 취해서 쿨쿨 자고 있었다.

어찌나 깊이 잠들었는지 숙녀의 코에서 쌕쌕 바람 소리가 크게 났다.

S급 헌터를 이렇게 깊이 재울 정도라면 미미가 사용한 약은 아마 코끼리 수십 마리는 한꺼번에 잠재울 수 있는 효과가 있을 터였다.

일반인이 먹었다가는 당연히 영영 꿈나라로 가 버릴 것.

나는 우라라가 깨어나길 기다릴 만큼 여유가 있지 않았으므로 그녀를 툭 찼다.

우라라는 나쁜 꿈을 꾸고 있었는지 미간을 강하게 찡그렸다.

툭, 한 번 더 발로 찾더니 그제야 천천히 눈을 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