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나는 싸우는 방식에 따라서 이 검을 얼마든지 변형시킬 수 있었다.
길이는 물론이고 넓이, 그리고 때에 따라 마음대로 구부러지게 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이미 상식적인 의미에서 검술이라고 하기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오늘만큼은 나도 평소보다 진지하게 하야시를 상대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주군.”
하야시도 내 마음을 알았는지 그렇게 말했다.
우우우웅-
하야시의 몸에서 은은한 마나가 발하기 시작했다.
특히 검 쪽에서 단순하게 보고 넘길 수 없는 예리한 마나가 맺히는 것이 보였다.
눈으로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헌터의 마나 감지력을 통해서도 맺힌 마나가 범상치 않은 수준임을 짐작하게 했다.
“가겠습니다, 주군.”
그렇게 말한 하야시가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그의 빠른 몸놀림은 전에도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 자체는 별로 놀랄 것이 없었지만, 뭐랄까?
날카로움의 정도가 지난번과 다르다.
처음에 그는 어느 정도 손에 사정을 두었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무척 쉬웠다.
아무리 세차게 공격을 해도 처음에는 좀 빠르고 예리한가 싶다가도, 조금만 지나면 빈틈이 보이곤 했다.
물론 웬만한 헌터들에게 그의 검술은 상대하기 무척 까다로운 것이겠지만.
나는 다르다.
챙!
오늘 나는 진지하게 그의 검을 받아내야 했다.
물론 검에 찔릴까 봐 겁이 나거나 진지하게 위협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야시의 능력이 이전보다 확실히 상승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는 전심을 다해서 검으로 내게 부딪쳐 본 적이 없다.
처음에는 분신술을 썼고 두 번째는 신체변형술를 썼으니까.
하지만 오늘 진지하게 자신의 주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검술을 사용하기 시작한 하야시는 확실히 아우라가 달랐다.
역시 싸움 실력으로는 일본의 쿠로 내에서도 적수가 없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기는 맞는 모양이었다.
챙! 챙! 챙!
하야시의 검을 놀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팟, 팟-
그의 옆으로 분신마저 생겨났다.
이미 보았던 능력이라 그리 놀랄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하야시가 딱히 의식적으로 사용한 분신술이 아니었다.
그리고 발 아래 분신 하나를 숨겨서 내 움직임을 멈추게 하려는 숨은 수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이미 한 번 사용한 적이 있는 방법이고, 나 또한 이제는 같은 기술을 쓸 수 있기 때문에 그 술수를 부리고자 했다면 나는 즉시 알았을 것이다.
지금의 분신술은 하야시가 검술의 일환으로써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만의 오리지널리티라고 할까?
말 그대로 혼자서 싸우면서도 세 명이 싸우는 것과 같은 전투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실제 물리적으로도 세 명으로 나누어져서 세 개의 칼날로 공격해 오니까 전혀 틀린 말이 아니었지만.
챙! 챙! 챙! 챙! 챙!
단순히 세 명이 한꺼번에 공격해 오는, 말하자면 숫자만 늘어난 공격이 아니었다.
일심삼체.
따로 나눌 것도 없이 분신들은 모두 하야시 자체니까.
하나의 검으로 공격할 때 부족한 점을 나머지 두 개의 분신이 완벽하게 배우고 있다.
그리고 셋이서만 구사할 수 있는 검술로 예리하게 찌르고 들어왔다.
하나가 됐다가 둘이 됐다가, 또 어떤 순간에는 셋이 되기도 한다.
챙! 챙! 챙! 챙!
나는 그와 싸우면서 점점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지금 나는 ‘노력’ 스킬을 발동 중이었다.
그리고 패시브인 ‘분석’ 스킬도 발동 중이다.
여기에 나는 한 가지 스킬을 더하기로 했다.
‘집중’.
왜냐면 지금 하야시의 검술에서는 집중해서 얻을 만한 무엇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괜히 그가 훈련 전에 진지한 말을 늘어놓았던 게 아니었다.
본인도 오늘 자신의 모습이 평소와 다른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챙! 챙! 챙! 챙!
나는 솔직히 시작할 때부터 여유를 두고 있었다.
20퍼센트에서 30퍼센트 정도의 실력밖에 발휘하지 않았다.
그만큼 하야시와 내 실력의 격차는 크다고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여유가 사라지고 말았다.
의식하지 못한 순간, 손이 뻗어서 하야시의 검을 날려버리고 그의 어깨에 생채기를 냈다.
팍!
하야시가 자신의 어깨를 잡고 무릎을 꿇었다.
훈련을 시작한 지 불과 5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5분이었지만 우리 두 사람에게는 그보다 훨씬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하야시는 검이 날아가고 무릎까지 꿇어야 했지만 전혀 부끄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뿌듯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칭찬을 바라는 눈빛.
그리고 그것은 절대 틀린 생각이 아니었다.
나는 오늘 그가 내게 보여준 모습이 충분히 칭찬받을 만한 것임을 인정했다.
“대단하네, 하야시.”
한마디 했더니 그가 바로 자세를 바꾸었다.
무릎을 모으고 바닥에 완전히 엎드린다.
“감사합니다, 주군! 모든 게 주군 덕분입니다!”
엎드린 상태에서 상체를 들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만큼 스스로 크게 감격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도 그렇겠지.
S급 헌터가 되면서 일종의 허무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인간으로서 그렇게 검술을 단련하기 위해서, 일정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수련을 했건만 각성하자마자 수십 단계를 단번에 뛰어넘은 거나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헌터들이 각성했다는 얘기를 듣고 그들이 몬스터를 사냥한다는 것을 얘기로만 들었을 때와 본인이 직접 각성했을 때는 완전히 감각이 달랐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엄청난 싸움 실력으로 지금까지 쿠로로부터 받은 지령을 어려움 없이 이행해 왔다.
그런 중에 자신의 성장이 만족할 만큼 이루어졌을 리 없었다.
그런 답답함이 나를 만난 후에 풀어진 것이니까.
자신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성장에도 한계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적절한 기회를 만나서 자신이 그동안 염원해 마지않았던 경지에 도달했다.
하야시의 엎드린 등을 통해 그런 감격이 물씬 전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를 상대한 내게도 유의미한 변화가 일어났다.
스킬 ‘하야시식 검술’이 생긴 것.
이전에 내가 훈련을 통해서 얻었던 것은 ‘람바스식 검술’이었다.
람바스가 고안해 내게 장착된 이 시스템이 ‘람바스식 검술’이 있는 것처럼 ‘하야시식 검술’도 따로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게 받은 인정이 아니라 람바스에게 받은 인정이었다.
이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역시 사람은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다고 할까?
물론 나는 하야시처럼 열심히 노력할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지만.
하야시에게나 나에게나 무척 유의미한 훈련이었다.
다소 충동적으로 훈련을 하러 가자고 한 것이었지만 나는 그것이 옳은 선택이었음을 알았다.
만약 지난번에 방해를 받지 않고 훈련을 계속했으면 오늘과는 달랐겠지.
하야시의 새로운 비기를 보았을지는 몰라만 오늘처럼 진지하고 강한 그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약간이지만 우라라와 장오성에게 고마워해도 될 만한 부분일지 모른다.
그래도 가만히 안 둘 거지만.
133
히로키는 충격을 받았다.
쿠로의 수장 격인 인물인 그는 이번에야말로 조철웅을 완전히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데 성공한 줄 알았다.
그가 하야시와 함께 있을 때 공격이 성공했다는 얘기를 들은 그는 두 배로 기뻤다.
왜냐면 그가 가장 없애고 있는 인물 1순위는 하야시였으니까.
대의를 따졌을 때 주적은 당연히 조철웅이다.
그는 공적으로서 가장 우선으로 죽여야 할 상대였지만 개인적인 원한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하야시는 다르다.
그는 직접 자신에게 메일로 말했다.
조철웅을 해하려 했다가는 자신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히로키로서는 그것이 굉장한 모욕이었다.
그는 하야시의 능력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가 자신에게 요구해 왔던 것, 언젠가 자신과 싸우게 해 달라고 한 일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진짜 하야시와 싸웠을 때 자신이 진짜 그를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지금까지 하야시가 쿠로에 지령을 수행한 솜씨는 거의 완벽에 가까웠기 때문에 실망감과 배신감이 훨씬 컸다.
그리고 그가 한 번 마음을 돌렸을 때는 절대 다시 쿠로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내심 그를 죽이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쿠로 안에서는 그런 생각을 대놓고 말할 수 없었지만.
아직은 하야시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그의 이용 가치가 무척 크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으니까.
자신이 수장 격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자신의 발언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S급 헌터들은 마음대로 다루기가 쉽지 않다.
그들은 각자 자신을 신이라고 믿고 있었다.
일본에서 그것은 거의 통용되는 사실이기도 하고.
어쨌든 조철웅과 하야시가 한꺼번에 날아가 버렸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굉장히 기뻤다.
이토록 가슴이 후련해지는 기분을 느꼈던 게 또 언제였을까 싶을 만큼.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온 소식을 그를 참담하게 만들었다.
어깨가 가벼웠던 것은 불과 만 하루밖에 되지 않았다.
조철웅과 하야시가 버젓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는 얘기를 들었으니까.
그는 그 사실을 즉석에서 알 수 있었다.
일본 쿠로의 첩자는 한국 곳곳에 있으니까.
조철웅과 하야시는 특별히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변동 사항을 보고받았다.
‘완전히 멀쩡하게 돌아왔다고 했지.’
그리고 뻔뻔하게 며칠 뒤 바로 훈련실에 들어갔다고 한다.
한마디로 또 습격하려면 해 봐라 하는 듯이.
그리고 그와 같은 시기에 박수철과 장오성이 감쪽같이 실종되었다.
이 두 개의 일이 서로 연관이 있을 거라는 것은 굳이 따져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대체 왜…….’
히로키는 고작 한국의 S급 헌터 하나를 처리하는 일이 이토록 어렵게 굴러가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쉽게 끝날 줄 알았던 일이 여기까지 오자 정말로 의심스러웠다.
조철웅이 어떤 인물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다나카와 하야시는 물론이거니와 우라라의 비장의 수도 어렵지 않게 넘겨 버렸다.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까지 쿠로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타국의 헌터를 빼 오거나 정치적, 경제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등의 일을 해왔다.
하지만 조철웅 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하야시를 보내자고 했던 것도, 우라라에게 그 수를 쓰자고 먼저 제안한 것도 자신이었다.
이렇게 계속 실패할 때마다 자신의 입지가 크게 흔들렸다.
‘어쩌지?’
그는 진지하고도 엄숙하게 고민에 빠졌다.
그때 비서가 자신이 호출했던 한 사람이 찾아왔다는 것을 알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