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내가 우라라에게 빙의한 사도의 수준을 이미 뛰어넘었다는 사실은 확실했다.
녀석이 떡밥을 주기는 했지만, 감히 놈이 상상도 못 할 수준으로 기술을 진척시켰다.
너무 대단한 이론인데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이런 답답함을 채워주기 위해서 미나가 있는 것이다.
“와…….”
미나는 입을 딱 벌린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냥 완전히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얼마만큼 내가 사용한 스킬이 잘 먹혔냐 하면 우리가 서 있는 주변에 많은 몬스터의 사체가 있었다.
이것은 당연히 하야시가 죽인 것들이었다.
일반적인 게이트와 달리 몬스터 사체는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사실을 암시했다.
지구에 숱하게 생긴 게이트들과 우리가 접속한 이 장소의 메커니즘이 완전히 같지 않다는 사실.
똑같은 메커니즘이 적용된다고 하면 이 몬스터 사체들은 지금쯤 전부 사라지고 없어야 맞았다.
“아, 이건…….”
미미는 다른 관점에서 이 현상을 바라보았다.
“아까운 것들이 버려져 있네요.”
미미가 예의 사체를 해부할 때 쓰는 큰 칼을 꺼냈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대더니 어느 정도 감을 잡았는지 칼질을 시작했다.
아마도 돈이 될 만한 부위만 골라서 빼내는 모양이었다.
“음.”
생각했던 대로 유능한 부하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잘 적응하고 있다.
그리고 파프리카는 어떻게 하고 있냐 하면 먼 곳을 보면서 으르렁대고 있다.
파프리카는 각성수라서 인간보다 훨씬 감각이 발달했다.
그것이 설령 헌터라고 해도 파프리카에 비빌 수는 없는 것이다.
파프리카가 먼 곳을 보면서 짖는 이유는 명백했다.
왜냐면 또 한 무리의 몬스터들이 우리의 출현을 감지하고 이쪽으로 몰려들고 있었기 때문에.
파프리카에 덩치가 확 커지더니 후다닥 내 앞을 막아섰다.
녀석은 충성심이 대단해서 적이 나타나면 몸을 던져 나를 보호하려 했다.
물론 녀석의 보호를 받을 만큼 내가 약하지는 않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지금의 상황은 파프리카에게 썩 나쁘지 않아 보였다.
왜냐면 파프리카는 저 몬스터들을 전부 학살할 만큼 출중한 능력이 있으니까.
게다가 파프리카는 그간 전투를 많이 할 기회가 없었다.
인간 헌터든 각성수든 싸우면 싸울수록 더 경험치가 늘고 성장하는 것이 상식 아니겠는가?
어떻게 보면 이것은 좋은 훈련 기회였다.
남들은 강아지를 키우면서 산책을 시키고 ‘먹지 마!’, ‘엎드려!’ 같은 것들을 가르치지만 나는 다르다.
우리 파프리카는 강하게 키워야 한다.
왜냐면 킹 오브 각성수 파프리카의 본능은 역시나 사냥에 있었으니까.
“멍! 멍!”
“캬아아악!”
거리가 가까워진 몬스터들을 파프리카가 사냥하기 시작했다.
각자가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다.
미미는 어떤 장비인가를 꺼내서 열심히 뭔가 측정하고, 적고 하는 것을 반복했다.
그리고 미미는 몬스터의 값나가는 부분을 도려내고 있었고.
그녀가 처리해야 할 사체는 점점 늘고 있었다.
파프리카가 몰려든 몬스터들을 물어 죽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뭐라고 할까?
인벤토리에서 초콜릿을 하나 꺼내 포장을 벗겼다.
그것을 입에 넣고 쫍쫍 맛있게 먹었다.
어제 게이트에 갇히고 나서 깨달았다.
비상식량은 언제나 구비하고 있어야 된다는 사실을.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까.
특히나 나처럼 적이 많은 사람은.
초콜릿을 먹고 난 뒤 가부좌를 틀었다.
가부좌라는 것을 정확히 알지는 모르지만 대충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는 것.
그리고 어제 ‘게이트 생성’과 함께 생겼던 새로운 스킬을 사용해 보았다.
집중.
‘아, 역시…….’
조철웅 특능 시리즈에 포함된 이 스킬은 깊은 명상 상태로 진입하는 데 큰 도움이 될 듯했다.
‘집중’ 스킬의 유지 시간이 길면 길수록 좋기야 하겠지만 필요 이상으로 그 시간이 길 필요도 없을 거라고 생각을 했다.
왜냐면 명상이라는 것은 깊은 집중 상태로 들어갈 때까지가 중요한 거니까.
막상 명상에 빠져들면 또 다른 영역으로 정신이 완전히 빠져들게 된다.
늘 할 수 있는 경험은 아니지만 적어도 어제는 그런 식으로 느꼈던 것 같다.
나는 명상 속에서 밀려드는 영감, 그리고 숱한 아이디어들을 받아들였다.
‘어제 어디까지 했더라?’
뭐랄까.
이것을 게으른 람바스적 관점에서 보면 굉장히 귀찮은 일이 분명하지만 이상하게 별로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재미있다.
훈련실에서 훈련하고 하야시와 싸우는 것보다 훨씬.
어떤 고차원의 영역에 접속된다는 감각 때문일 것이다.
람바스조차도 닿지 못한 우주의 근원.
이것을 풀어내면 악마의 비밀에 접근하게 될지도 몰랐다.
‘흥미롭군.’
이 숙제를 다 끝내고 나면 나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질지도 모른다.
악마가 사라지고 이른바 지구를 포함한 행성들의 위기를 끝내고 나면.
그것은 천국 같은 이미지였다.
귀찮은 거 없이 종일 뒹굴뒹굴뒹굴~~~
상상만 해도 좋구나!
나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명상에 집중했다.
130
다시 눈을 떴을 펼쳐진 장면은 하야시와 함께 게이트에 있을 때와 비슷했다.
모든 것이 정리되어 있다.
파프리카는 싸움을 끝내고 다시 귀엽고 조그만 강아지 상태로 돌아가 있었고, 미미는 사체들에서 필요한 부위를 모조리 도려내고 지금은 놀랍게도 돗자리를 깔고 먹을거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도 나처럼 이런 상황에 대비해 비상식량을 챙기기로 한 걸까?
꼭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그녀라면 어떤 상황에서든 준비가 잘 돼 있을 이런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리고 미미는 여전히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 주위에 장비들이 늘어났다.
대체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지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지구의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도구들과 달랐다.
아마도 그녀만의 연구 방법이 따로 존재하겠지.
그녀는 다른 의미로 먼치킨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상식의 영역에서 파악하기 힘든 인물이다.
“얼마나 지났어?”
나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궁금하여 미미에게 물어보았다.
“3시간 30분 정도 지났어요, 주군.”
나이스!
이번에는 제대로 조절할 수 있었다.
어제는 자그마치 열다섯 시간이나 명상에 빠져 있었으니까.
그것은 정말로 불쾌한 경험이었다.
이제는 내가 웬만큼 명상에 빠지는 시간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하고 생각을 접을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이 수수께끼 같은 막대한 이미지와 어느 정도 친숙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면 굉장히 간지러운 기분이 들지 않는가?
어제는 그것을 쫓아 명상에 빠졌더니 상상도 못 할 만큼 시간이 많이 흘러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얻은 것이 많지 않았다.
‘어쩔 수 없어. 시간이 걸리는 문제야.’
자그마치 우주의 근원에 닿을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인데 그렇게 쉽게 되겠는가?
그래도 미나 같은 천재가 옆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녀가 이 비밀을 푸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번 세 시간의 명상을 통해서는 물리적으로 새로 획득한 것은 없었다.
단지 어제 생겼던 ‘게이트 생성’ 스킬이 좀 더 다듬어졌다고 느낄 뿐이었다.
한 마디로 스킬 레벨이 오르고 세부적인 기능이 추가되었다는 뜻.
“미나, 밥 먹고 하자.”
미나는 내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계속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라면 며칠이든 몇 달이든 지치지 않고 집중 상태에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연구만 할까 봐 걱정될 지경이다.
내 부름에도 미나가 응답하지 않자 파프리카가 달려가서 그녀의 정면으로 갔다.
그리고 “왈! 왈!” 하고 짖었다.
그제야 미나가 정신을 차린다.
마치 방금 잠에서 깬 사람처럼.
다른 세상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물론 다른 세상에 온 것이 맞지만.
그녀가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나와 미미를 발견하고는 “핫.” 소리를 내며 정신을 차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나요?”
똑같구나.
그녀는 나와 비슷한 집중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얼마 안 지났어. 세 시간. 밥 먹고 하자.”
“아아, 네~”
그녀는 아쉬워하는 동작으로 자기가 늘어놓은 도구들을 정리했다.
“왜? 그만하게?”
“네, 나머지는 돌아가서 더 연구해 보려고요. 주군을 더 귀찮게 하면 안 되잖아요.”
역시 미나도 좀 어설프긴 해도 미미만큼 나를 챙겨주는 부하였다.
좋은 부하들이다, 정말로.
그런데 꼭 여기서 밥을 먹을 필요가 있나?
돌아가서 먹으면 더 편할 것 같은데.
거기에 대해서 미미가 한마디 했다.
“아~ 피크닉 온 기분이네요.”
하기야 주위에 몬스터 사체들 널렸다는 것을 빼면, 게다가 그것도 미미가 다 갈라놓아서 더욱 볼썽사나워졌다는 점을 빼면 피크닉을 나온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배경은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처음부터 많은 걸 바라면 안 되겠지.
‘게이트 생성’ 스킬이 좀 더 가다듬어지면 내가 원하는 대로 장소를 골라잡아 이동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미미가 만족할 만한, 그리고 우리 모두가 만족할 만한 피크닉 장소를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나쁘지 않네.’
그래도 세 시간은 아직 너무 길다.
다음번에는 더 줄여보아야지.
131
장오성과 박수철은 함께 만나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이것은 두 사람에게 몹시 드문 일이었다.
김말중을 통해서 최근 어느 정도 관계가 회복되기는 했지만 클랜의 성장 과정에서 두 사람은 경쟁 관계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한때 영영 회복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큰 골을 만들기도 했었고.
하지만 둘은 각성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이다.
다른 경쟁 관계에 있는 클랜들과는 경우가 좀 다르다고 할까?
한번 관계를 회복하자 과거의 앙금은 사라졌다.
물론 그것은 현 상황이 큰 몫을 한 덕분이었다.
지금 그들은 공동의 적을 두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적은 호락호락한 자가 절대 아니다.
자칫하다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헌터군에 속하는 자신들조차도 날아가 버릴 정도로 강력한 후폭풍을 만날지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최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무언가는 바로 조철웅, 그리고 그가 투숙해 있는 호텔로부터의 반응이었다.
“저것들은 왜 이렇게 조용히 있는 거죠?”
장오성의 소주잔을 들어 쭉 들이켰다.
한입에 털어 넣고 나서 만족스럽지 않는다는 듯 작은 소주잔을 치워버리고 물컵을 앞에 놓았다.
거기 소주를 가득 따라서 꿀꺽꿀꺽 원샷을 했다.
각성 전부터 말술이었던 터라 훨씬 체력이 좋아진 지금은 이 정도는 기별에도 차지 않았다.
사실 클랜장으로 잘 나가고 난 뒤에 두 사람은 소주를 마시는 일이 거의 없었다.
생활 수준이 그만큼 올라갔다고 할까?
비싼 위스키를 물 마시듯 마실 수 있는데 굳이 소주를 마실 필요는 없으니까.
그런데 두 사람은 오늘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만큼 현재의 상황에 여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술 마시는데 사치를 따지고 할 입장이 아닌 것이었다.
더구나 장오성은 직접 행동에 나서기까지 했다.
물론 자신의 정체가 들키리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른다.
상대는 상식선에서 이야기할 수 없는 S급 헌터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