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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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지고 나간 까만 상자를 두고 미미가 말했다.
“그것에 당하신 건가요?”
“응. 생각보다 위력이 셌지 뭐야.”
“신기한 물건이네요.”
“제법 잘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설픈 물건이야.”
“그래도 그쪽도 실력이 좀 늘기는 했나 봐요.”
미미의 말이 맞았다.
우라라라는 일본 헌터에게 빙의한 것이 람바스가 생전에 만난 그 사도가 맞다면 나름대로 실력 향상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왜냐면 그때는 이런 도구를 사용할지도 몰랐으니까.
어설프게 다른 차원으로 날려버리는 바람에 람바스가 돌아오느라 고생을 좀 했었다.
상대방이 자기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어설픈 물건을 무기로 사용했을 때, 그것을 해석하고 극복하기는 더 어려워지는 법이니까.
말하자면 실이 복잡하게 꼬여 있을수록 더 풀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람바스는 전생에 상대의 그런 어설픈 실력 때문에 효과적인 피드백을 얻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나는 더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그 사도의 실력이 향상된 만큼 좀 더 쉽게 그 구조를 파악할 수가 있었고, 결과적으로 스킬을 얻었으니까.
이 전리품을 얻은 것은 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직은 이 상자 없이 게이트를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술이 성숙하지 않았다고 할까?
이 매개체를 통해 익숙해지다 보면 스킬도 업그레이드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것을 통해서 게이트에 들어갈 수 있는 건가요?”
“응.”
가능한 한 같은 물건이 많이 있다면 좋겠지만 아무리 람바스가 천재라고 해도 이런 걸 뚝딱뚝딱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같은 상자가 수백, 수천 개 있다면 마찬가지로 수백 수천 개의 게이트와 통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자 문득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모든 걸 나 혼자 할 필요가 없다.
유능한 부하 미나가 있으니까.
“미나한테 연락해 볼까요?”
미미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그렇게 물었다.”
“응. 하지만 내일.”
“네~ 주군. 오늘은 고생하셨으니 푹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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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푹 잠을 잤다.
그리고 당연히 그 전에 많은 양의 식사를 했다.
게이트 안에 있을 때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지루함을 느끼지 않았지만, 그래도 배가 고프고 잠을 자지 못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물론 나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몇 끼 식사를 하지 않거나 잠을 며칠 자지 않는 것 정도는 전혀 상관이 없다.
하지만 이것은 심리적인 문제였다.
비록 적들은 소정의 목적, 즉 나를 완전히 게이트 안에 가두거나 죽이지 못했지만, 나는 내게 이런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 자체로 짜증이 났다.
나와 게이트 안에 함께 갇혔던 하야시은 그 일을 통해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는 태도였지만.
그는 오히려 한 무리의 몬스터와 신나게 싸움을 했고 그것을 만끽했다.
게이트에서 나갈 수 있을지 여부에 대해서는 아예 고민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번 사람을 믿으면 완벽하게 믿는다고 할까?
내가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모양이다.
보통 인간이라면 게이트 안에 갇혔을 때 패닉에 빠지기 십상인데, 여러모로 사고 구조가 독특한 인물이 아닐 수 없었다
푹 자고 일어났을 때, 미나가 와 있었다.
최근 별로 할 일이 없던 그녀는 미미의 연락을 받고 무척 고무되었던 모양이다.
표정이 무척 밝다.
그러니까 흥분상태라는 것은 알겠는데 왜 내 침실에 들어와 있는 거야?
이거 너무 거리감이 없는 거 아니야?
미미도 내 침실에는 함부로 들어오지 않는데.
“미나! 언제 거기 들어갔어?”
침실 문이 열리면서 미미가 말했다.
아마도 미나는 미미가 모르는 사이 이곳에 슬쩍 들어왔었던 모양이다.
그사이에 내가 잠을 깬 모양이고.
내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깰 때까지 나를 보고 있었겠지.
밖에서 기다리든, 안에서 기다리든 상관이 없을 텐데, 열정이 참 대단하다.
하기야 그것은 그녀가 내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나는 잠에서 깨어 별일이 없으면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고 뒹굴거릴 때가 많으니까.
핸드폰 게임을 좀 하고, 졸리면 다시 잔다.
내가 의지를 갖고 침실에서 빠져나갈 때는 배가 고플 때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켜보는 사람이 있으면 일어날 수밖에 없지.
역시 머리가 좋구나, 미나.
“왔니?”
“네, 주군! 전보다 훨씬 강해 보이시네요!”
미나의 눈빛이 반짝였다.
“보구는 어때요? 사용하는 데 불편함이 없으신가요?”
“응, 좋아. 문제없어.”
“주군이 주무시면 사이에 제가 장비를 좀 손봤어요. 주군 손을 타더니 보구들 상태가 더 좋아졌더라고요. 주군이 더 사용하기 편하시게끔 미세 조정을 좀 했답니다. 헤헤헤.”
‘아, 그랬니?’
이는 내가 시키지 않은 일이고 미미도 부탁하지 않은 일일 게 분명했다.
본인이 100퍼센트 좋아서 한 일이다.
역시 같은 일을 하더라도 공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때와 지금의 모습이 확연히 다르구나.
역시 사람에게는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이 따로 있다는 건가?
“저한테 보여주실 게 있다고 들었어요.”
“응. 밖에 나가서 기다려줄래?”
“네, 주군!”
지금 나는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평소에는 추리닝을 입고 잘 때가 많은데 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고 할까?
열다섯 시간이나 자지 않았다는 억울함을 풀기 위해 나는 완전히 자유롭고 편한 상태에서 수면을 만끽하고 싶었다.
내가 추리닝을 입고 밖으로 나가자 미미와 미나가 나란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 대각선에 앉았다.
잠을 푹 잔 뒤의 여유를 상실한 지금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안건이 안건이니만큼 불평할 수 없었다.
나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 미나 앞에서 까만 상자를 꺼내 보였다.
“아!”
미나가 눈을 빛냈다.
그녀도 이것이 위험한 물건인지 알기에 함부로 손을 대지 않았다.
“사정은 들었습니다, 주군. 고생 많으셨어요.”
지금 그녀의 말투는 내가 게이트에 갇혀서 고생한 것이 안타깝다기보다는 그 일을 통해 이런 물건을 가지고 나왔다는 것이 반갑다는 투였다.
물론 내가 오해한 것일수록 있지만.
뭐 결과적으로 잘 빠져나왔으니 됐다.
미나가 그런 식으로 생각을 했다면 그것도 틀린 생각이 아닌 것이다.
‘이 상자, 꽤 쓸 만한 물건이란 말이지?’
잠을 자고 머리가 밝은 상태에서 보니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무궁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지금까지는 람바스의 과거 행적을 쫓아가기만 했다면 이제는 그것과 연결되어, 그리고 어쩌면 그것을 뛰어넘은 행보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미나는 전문가다운 표정을 지으면서 손에 장갑을 끼었다.
평범한 장갑은 아닐 터.
그녀가 망설임 없이 상자를 만지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아, 이건…….”
미나가 눈을 가늘게 하고 상자를 이모저모 뜯어보았다.
“이것이 변형해서 공간을 게이트와 연결시켰다는 말씀이시죠?”
“응.”
“이렇게만 보아서는 잘 모르겠네요. 연구를 해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미나가 물끄러미 나를 보았다.
뭔가 부탁할 것이 있다는 표정.
어려운 부탁은 아닌 것 같은데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망설이는 얼굴이다.
“혼자서 하기는 조금…… 힘들 것 같은데…….”
역시 그렇겠지.
나는 미나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평범한 능력으로는 이 장치를 작동시킬 수가 없으니까.
장오성이 상자를 던져 게이트가 열린 것은 이미 그럴 수 있게 장치가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라가가 던지기만 해도 장치가 발동되게끔 미리 세팅해 둔 것.
물론 미세한 조건 같은 것들도 설정했을 것이다.
장오성이 호텔에 들어와서 한 일은 직원들을 기절시키고, 훈련실에 상자를 던진 것뿐이었다.
“알았어.”
생각보다 내가 쉽게 대답했다고 여기는지 미나의 표정이 밝아졌다.
“제가 요즘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서 공방을 넓혔거든요. 시설을 보강했으니 그곳이라면 이 장치를 발동해도 문제가 없을 거예요. 함께 가시죠, 주군!”
신난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는 미나를 보면서 내가 물었다.
“뭐 하러? 여기서 하면 되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게이트와 연결되는 장치 같은 것을 함부로 작동시켰다가는 큰일이 날 수 있다.
말하자면 이 호텔이 통째로 날아가 버린다든가, 아니면 오작동을 일으켜서 몬스터들이 튀어나와 아비규환이 되어버린다든가.
내가 봉변을 당한 장소가 S급 전용 훈련실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괜찮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그 정도 제어하는 것은 내게 어렵지 않다.
괜히 ‘게이트 생성’ 스킬이 생긴 게 아니니까.
불완전한 기술로 이런 도구를 만들어낸 우라라와 다르다, 나는.
“시작할까?”
이 호텔 방 안에는 미미와 미나, 그리고 파프리카가 있었다.
두 사람과 한 마리의 각성수 모두 내가 하려는 무모한 행동을 말리려 하지 않았다.
신뢰도가 그만큼 높다는 거겠지.
“네! 보여 주세요, 주군!”
이미 높아져 있던 미나의 텐션이 더 올라갔다.
너는 겁이라는 게 전혀 없구나.
그녀의 머릿속에는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그것을 연구하여 뭔가를 개발하는 것밖에 없다는 느낌이었다.
미미와는 다른 의미로 유능한 부하다.
“예이!”
환호성을 지르기까지 했다.
미미도 말했다.
“저도 가보고 싶어요. 주군이 계셨던 곳.”
“왈! 왈!”
모두의 동의를 얻어, 나는 소파에 앉은 상태로 그리고 딱히 장비도 착용하지 않고 추리닝만 입은 채로 스킬을 발동했다.
‘게이트 생성.’
우수수수-
장오성이 훈련실에 상자를 던졌을 때와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즉 호텔 방 풍경이 산산이 부서진 뒤 암흑이 찾아온 것.
오래지 않아 완전히 다른 세상이 우리 앞에 펼쳐졌다.
그 과정이 굉장히 짧아진 느낌이었다.
비유하자면 PC를 업그레이드했을 때와 같다고 할까?
부팅 속도가 그만큼 빨라진 것이다.
이것은 내가 컨디션이 좋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루 치만큼 이 스킬에 익숙해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렇게 나는 미미, 미나 그리고 파프리카와 함께 다른 차원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내 능력이 제대로 먹히고 있다는 사실을.
왜냐면 지금 우리 주위에 펼쳐진 배경이 정확하게 내가 하야시와 함께 훈련실에 있다가 날아간 그 장소가 맞았기 때문이다.
만약 ‘게이트 생성’ 스킬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동한 장소는 여기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랜덤으로 모르는 곳과 연결이 되었을지 모른다는 뜻.
물론 나는 그런 상황이 되어도 그것을 바로잡을 자신이 있었지만, 그리고 이 능력이 제대로 발동하리라는 자신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내 스킬이 제대로 작동하는 것을 눈으로 본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이 스킬의 원리는 말하자면 우주의 근원적인 물리법칙에 닿아 있다.
한마디로 엄청 복잡하면 뜻.
말로 설명하기는 거의 어렵다.
왜냐면 이론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토대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간단하게 설명하면 설명할수록 좋은 것이 과학이론이겠으나 과거에 적어도 비슷한 이론이라도 있어야 말이든 글로든 옮길 수 있는 것이었다.
람바스가 살았던 행성에서, 그리고 지구에서도 이 현상을 설명할 용어는 전혀 없었다.
한마디로 내가 그 이론이며 용어이며 하는 것들을 다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인데, 당연하게도 그것은 엄청 귀찮은 일이다.
안 할 것이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지구의 숱한 천재 과학자들이 이런 법칙이 있다는 것을 알면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들조차도 엉터리 SF영화에서나 나올 거라고 생각했을 일이 실제로 일어난 거니까.
정말 람바스의 재능이라는 것은 어디까지 뻗어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이것은 감각에 가깝다.
지능으로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뭐라고 할까?
그 감각이 너무도 발달한 나머지 뇌를 개조해서 머리까지 좋아지게 만들어버린 경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