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121
“그러니까 이게…….”
박수철은 자기 눈앞에 놓인 물건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손바닥만 한 정육면체 상자였다.
겉으로 보아서는 전혀 특별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색깔은 완전한 까만색.
표면은 반들반들하니 부드러워 보였다.
보기만 해서는 전혀 위험한 물건으로 보이지 않지만, 오늘 자신을 찾아온 우라라라는 여자의 말을 들으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 위험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손을 대고 싶지 않았다.
“이걸로 조철웅을…… 없앨 수 있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확실하게 그렇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하지만 이 기술은 아직 불완전합니다. 재료도 무척 희귀하죠. 지금까지 딱 한 개밖에 만들어내지 못했을 정도로요. 대량 생산할 수 있으면 아주 유용하게 쓰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한마디로 매우 귀한 물건이라는 거예요. 이것이 낭비되지 않게 잘 사용해 주시라고 믿습니다.”
박수철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자기 앞에 있는 여자는 자그마치 S급 헌터였다.
일본에서 건너온 헌터.
일본에서 곧 자신에게 접촉해 올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타이밍 좋게 찾아올 줄은 몰랐다.
마치 자신들이 김말중을 만난 다음 조철웅을 죽이는 것 말고 다른 길은 없다고 결의한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물론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조금 비약이겠지만 어쨌거나 기이하고도 절묘한 타이밍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뭐라고 할까?
이 일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 일일지 모르지만 우라라라는 여자는 무척 아름다웠다.
헌터라서 아름다운 건지, 아니면 원래 예뻤던 건지 모르겠다.
아마도 원래부터 아름다운 용모였고, 상당수 헌터들이 그런 것처럼 각성하고 나서는 그 미모가 더 빛을 발하게 된 것이리라.
게다가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S급 헌터 특유의 범접하기 힘든 아우라뿐 아니라 그녀는 왠지 속을 알 수 없는 인물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척 아름답지만 가까이했다가는 위험한 일을 겪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나저나 이런 방식으로 조철웅을 죽이려고 할 줄이야…….’
박수철은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 그림이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머릿속에 그렸던 장면은 일본에서 몇 명의 S급 헌터가 건너와서 조철웅을 죽이는 것이었다.
그는 모르고 있었다.
이미 쿠로 내에서 가장 유능한 자객 한 명이 한국으로 건너왔었고, 조철웅을 죽이려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실패하면 안 됩니다. 만약 실패하면…….”
우라라가 날카롭게 눈빛을 벼렸다.
시종 친절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녀였지만 한 번 인상을 쓰자 박수철은 오금이 저리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당신의 감각은 틀리지 않았다.
가시 돋은 장미.
우라라는 그런 여자였다.
게다가 그 가시에는 맹독이 묻어 있어서 자신과 같은 사람은 그 가시에 스치기만 해도 즉사하게 될 것이었다.
그는 침음을 삼킨 뒤 말했다.
“아,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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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조용히 흘러갔다.
그동안 나는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미미는 이것저것 알아보고 뭔가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고, 그녀가 딱히 요구를 해 오지 않는 이상-혹은 넌지시 눈치를 보내지 않는 이상- 나는 내 발로 훈련실에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확실히 하야시와 함께 훈련을 하는 것은 그냥 훈련실에서 혼자 훈련을 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뽑아낼 만한 기술들이 아직 아주 많아 보이고.
그 기술들 자체가 내게 큰 의미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부터 영감을 얻어서 내가 더 훌륭한 스킬을 장착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크게 도움이 되는 일이 분명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면 내가 하야시와 있는 것이 별로 즐겁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나와 성격이 맞지 않는 사람과 시간을 함께 보낸다는 것은 당연히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원래 훈련하는 것이 재밌지 않았지만 더 훈련을 재미없게 여기게 됐다고 할까?
물론 뭐라고 해도 다 핑계일 뿐이지만.
나는 미미가 무엇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아마 며칠 전에 있었던 그 일 때문이겠지.
겉으로 보면 아주 단순한 일처럼 보인다.
김말중과 손을 잡았던 박수철과 장오성이 한순간에 낙동강 오리 알 신세가 된 것을 따지려고 김말중을 찾아갔다가 오히려 그에게 큰소리를 듣고 쫓겨났다.
그들이 더 이상 소란을 내지 않고 얌전히 물러갔다는 점에서 미미는 그들이 다른 속내를 가졌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다른 속내라면 뭘까?
나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왜냐면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잘 나가는 A급 헌터를 화나게 할 경우 그들에게 보복을 당할 것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예외다.
아무리 화가 났기로서니 S급 헌터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아무도 없으니까.
차라리 그들이 복수할 대상은 김말중이 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랬다면 미미가 이렇게 진지하게 고민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노예 따위 있으면 편하지만, 없어진다고 해도 큰일은 아니니까.
더구나 한때 나를 해코지하려고 했던 자라면.
그런데 미미는 이 건을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박수철과 장오성이 이쪽을 향해 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대체 뭐가 단순하지 않은 걸까?
나로서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을 미미가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
아마 그녀는 더 큰 그림을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결국 그녀가 결심했다는 듯 말했다.
“회의를 열어 봐야겠어요.”
그녀가 말한 회의라는 것은 별것 없었다.
그냥 이 호텔에 묵고 있는 다나카와 하야시, 한마디로 귀찮은 두 사람을 불러서 같이 대화를 나누는 게 그녀가 말하는 회의였다.
이로써 내가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일본인 두 명을 불러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게 그들이 원래 속해 있던 조직, 쿠로에 대해 뭔가 물어볼 것이 있어서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과연 미미가 생각하고 있던 것은 박수철과 장오성에 대한 문제 따위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내게 있어서 더 큰 적은 쿠로니까.
그들이 다음에 어떻게 나올지 하는 것이 더 성가시고 중차대한 일이었다.
물론 미미는 호언장담했었다.
그들은 내 경험치가 될 뿐이라고.
하지만 그 경험치를 얻는 과정이 나는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지금 일본은 헌터 강대국으로 잘 나가고 있고, 그런 헌터 강대국을 만든 존재들이 바로 쿠로 안의 S급 헌터들이니까.
그들이 작정하고 내게 수작을 걸어온다면 그것이 호락호락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사도가 빙의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당연히 헌터 자신들이 아니라 사도들이 꿍꿍이를 부리는 거라면, 설령 사도들이 아직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S급 헌터들을 내면에서 조종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해도, 그리 쉽게 볼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미미의 말대로 다나카가 하야시가 내 방으로 와서 회의가 열리고 대화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내 생각이 조금 빗나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미는 박수철과 장오성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맞았다.
그리고 거기 더해 그들이 쿠로와 연결되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것은 이러했다.
박수철과 장오성이 먼저 쿠로에 손을 내밀지는 않았을 것이고-당연히 그들은 ‘쿠로’라는 조직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쿠로 쪽에서 그들을 이용할 목적으로 접근한 것 같다고.
물론 이 또한 설득력이 있는 발상이었다.
김말중과 박수철, 장오성이 손잡았던 때처럼 쿠로와 박수철, 장오성도 서로 이해가 일치하니까.
갑자기 왜 이렇게 적이 많아진 것인지.
따지고 보면 나는 가만히 있었고 쟤들끼리 나를 두고 지지고 볶고 하는 것일 뿐이었다.
귀찮다, 정말로.
‘일리 있네.’
나는 미미가 그렇게 고민하던 것이 그럴 가치가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소파에 앉아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귀만 열어둔 채로 세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이럴 경우 쿠로가 어떤 식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시나요?”
미미의 물음에 다나카가 대답했다.
“하야시를 보낸 일이 실패로 돌아갔으니 아마 이다음에 또 바로 무력을 사용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쪽으로는 하야시가 쿠로가 이용할 수 있는 최고의 자객이었으니까요. 아마도 이번에는 전혀 다른 방법을 쓸 것이 분명합니다.”
“전혀 다른 방법…….”
하야시가 진중하게 말했다.
뭐랄까?
그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그리 어울리는 그림이 아니었다.
쿠로 내에서 그의 역할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뒤에서 궂은일을 하는 것이었다.
궂은일이라고 해봤자 하야시 자신이 싸움을 좋아하니 즐겁게 그 일을 했다는 느낌이지만.
그런 그가 이렇게 머리를 쓰는 회의 자리에 앉아 있으니 굉장히 불편해 보였다.
나는 자의로 회의에서 벗어나 소파에서 게임을 하고 있을 수 있었지만 그는 그럴 수 없다.
뭔가 부럽다는 듯이 내 쪽을 흘긋대는 게 안쓰러워 보였다.
‘그러니까 더 강해지지 그랬어.’
역시 헌터는 힘이 깡패다.
미미의 물음에 다나카와 하야시는 쉽게 답을 내놓지 못했다.
쿠로가 어떻게 나올지 상상하기 어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너무 선택지가 많아서 그런 것 같다.
“이번에도 S급 헌터가 움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박수철과 장오성에게 쿠로가 접촉했을 거라는 것은 신빙성 높은 가설입니다. 그것은 쿠로가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니까요.”
“고작 A급 헌터 따위가 주군을 어쩌지는 못할 텐데요.”
하야시가 자랑스럽다는 투로 내 쪽을 보면서 말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굳이 뿌듯해하면서 말할 필요도 없을 만큼.
뭐랄까?
쓸데없는 말을 하면서 으스대는 것을 보면 하야시는 정말 회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다.
확실히 몸을 쓰는 일이 그에게 제격인 것 같다.
차라리 이 자리에 박혜진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녀는 항상 바쁘다.
“아!”
갑자기 다나카가 탄성을 뱉었다.
무언가가 생각난 모양이다.
“쿠로 내에서 비밀 병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비밀 병기요?”
“그것은 S급 헌터를 죽일 목적으로 만들고 있는 무기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개발을 맡은 사람이 바로 우라라죠.”
“우라라? 쿠로의 S급 헌터군요.”
“네. 그녀는 조금 특이한 여자입니다. 전투 능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주로 힘쓰는 분야는 연구를 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연금술처럼 독특한 것들을 만들어냈죠. 아니, 독특하다기보다는 위험하고 기분 나쁜 물건들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를테면 대량 살상 무기 같은 것들요. S급 헌터가 진지하게 만드는 것이니만큼 기능이 매우 뛰어나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걸 만드는 걸 행복해하는 여자이지요.”
“음, 확실히. 기분 나쁜 여자다. 우라라는.”
하야시도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나는 뭔가 찜찜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또 한 명 등장했구나.
우라라라니.
뭔가 이번에도 만화 캐릭터 같은 이름이었다.
그것은 내가 일본 만화를 너무 많이 봐서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