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더구나 조철웅과 굉장히 사이가 좋아 보이는 일본인 S급 헌터 한 명도 한국에 들어온다고 했다.
조철웅 한 명도 쉽사리 건드리지 못할진대 거기에 그의 편이라고 할 수 있는 S급 헌터 한 명이 더 늘어난다면.
그리고 이희진과 조철웅의 사이도 들리는 말로는 나쁘지 않다고 했다.
이런 식이면 자신들이 세웠던 계획은 모두 나가리가 되고 마는 것이었다.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그들의 사고는 오랜만에 정말로 극단으로 치달았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김말중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고 싶었다고 할까?
하지만 김말중을 찾아가기 전 둘이서 만났을 때 박수철이 장오성에게 말했다.
“나한테 생각이 있어. 김말중 그 인간은 분명히 우리를 버리려고 할 거야. 그러면 나한테도 방법이 있다는 말이지.”
“방법이요? 그게 뭔데요?”
장오성이 묻자 박수철이 불편하다는 듯이 입매를 비틀었다.
“일본 말이야, 일본.”
“일본…… 이요?”
장오성의 미간도 찡그려졌다.
일본 헌터계와 한국 헌터계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역사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에 한국인이 일본인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일본인 또한 한국인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양국 헌터계 간의 관계도 굉장히 안 좋은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일본 헌터계는 승승장구하는 반면 대한민국 헌터계는 답보상태였으니까.
말하자면 꼭 드러내 놓고 말하지 않아도 확실한 상하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일본이 마음만 먹으면 한국 헌터계 정도는 쉽게 장악할 수 있었다.
그 보호막이 되고 있던 존재가 바로 S급 헌터들이었는데 솔직히 숫자 면에서나 실력 면에서나 뒤진다고밖에 볼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처음부터 일본과 협력하여 그들과 내통하는 헌터들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박수철과 장오성은 아니었다.
그들뿐 아니라 상당수 대한민국 헌터들이 굳이 머리를 숙이면서까지 일본 헌터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 않았다.
딱히 그럴 필요도 없고.
일본도 동남아시아의 나라들의 헌터계를 장악하는 것을 더 우선으로 두고 한국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모양새였다.
그런데 박수철의 입에서 ‘일본’이 언급되었다는 것은 좀 놀라운 일이었다.
“일본이 뭘 어쨌는데요?”
장오성이 재차 묻자 박수철이 겸연쩍게 얼굴을 긁었다.
“그쪽에서 나한테 접촉을 해왔어. 조철웅을 처리할 방법이 있다고.”
“처리한다고요? 조철웅을?”
처리한다는 말은 죽인다는 말보다는 덜 직접적이지만 그게 같은 뜻임을 두 사람은 모르지 않았다.
장오성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진짜 가능한 겁니까?”
그게 가능만 하다면 자신도 조철웅이 사라졌으면 했다.
그만 없으면 자신들에게도 여전히 기회가 있을 거니까.
대한민국 헌터계가 앞으로 일본 헌터계에 어떤 식으로 끌려갈지, 그리고 종속될 것인지는 솔직히 그것은 나중에 생각할 문제라고 보았다.
어차피 힘의 균형이 무너졌다.
그것을 뒤집을 방법도 없고.
이겨 먹을 수 없는 상대와 반목하는 것보다 차라리 대한민국 헌터계를 장악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전략이었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이용하는 것이 좋으리라.
장오성은 처음에 박수철의 입에서 일본 이야기가 나왔을 때 무척 놀랐지만 지금은 관심이 동했다.
아니, 그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할 것인지까지는 알려주지 않았어. 하지만 그쪽도 화가 많이 나 있는 모양이더라고. 이번 다나카 건 때문에 말이야.”
“다나카라…….”
그럴 만도 했다.
겉으로만 보면 다나카가 조철웅의 인품에 반해 한국 귀화 결정을 한 것으로 보이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일본 헌터계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그들은 철저히 조직화되어 있었다.
공통으로 작전을 세우고 그것을 함께 실행한다.
한국에서는, 그리고 다른 나라 헌터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아무리 S급 헌터라고는 해도 개인적으로 타국 귀화를 결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일어난 게 분명하다.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일본이 지금 조철웅에게 화가 나 있고 그래서 박수철에게 교섭을 해왔다고 한다.
조철웅을 죽이자고.
그만 없으면 일본도 다나카를 다시 데려갈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서로 이해가 일치하는 것이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위험하지. 그런데 이런 거 한두 번이냐? 이번에 일어서지 않으면 앞으로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이미 대한민국 최고 클랜들이라는 곳의 수장을 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그것이 원래 자신들의 성정인지 아니면 각성하고 나서 변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히 각성 전보다 지금이 더 탐욕스럽게 바뀐 것 같기는 했다.
무언가 자기 안에 다른 목소리가 있는 것처럼.
그런 대화 뒤에 김말중을 만났더니, 그는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자신들을 무시했다.
언제 손을 내밀었었냐는 듯이.
싹 안면을 바꾸었다.
“김말중 그 새끼, 조철웅 처리한 뒤에 우리가 같이 담가버립시다.”
“당연하지. 그 새끼가 살아 있으면 나는 밤에 잠도 안 올 것 같아.”
일본에서 어떤 식으로 조철웅을 죽일 것인지는 아직 구체적으로 알려 준 것이 없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박수철은 확실히 일본과 접촉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아니, 그전에 그쪽에서 먼저 접촉할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가보자!’
박수철과 장오성은 눈빛으로 서로 다짐했다.
119
하야시가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남은 뒤로 내가 훈련하는 방법이 바뀌었다.
나는 솔직히 하야시와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지만, 이것은 미미가 제안한 것이었다.
내가 왜 하야시와 엮이고 싶지 않냐 하면 그가 애초에 내 목숨을 노리고 한국에 들어왔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에게는 나와 상성이 맞지 않는 기운이 있으니까.
한마디로 성격이 맞지 않는다.
그는 성장을 염원하는 무도가이다.
머릿속에 무도밖에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물론 예전의 나였다면 그런 그와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나는 아니다.
그리고 각성하기 전의 나라면 애초에 그와 가까워질 기회 자체가 없었겠지.
말하자면 하야시는 람바스가 상상했던 이상적의 모델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노력파인 데다가 재능까지 뛰어나니까.
하지만 이렇게 그와 가까이하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 것을 보면, 그리고 그 기분이 람바스의 본성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확실히 아이러니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람바스는 최후에 후회를 했지만 그의 본성은 여전히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과 함께 있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걸 알기 때문에 지구 최고의 노력파에게 자신의 능력을 잇겠다고 결심한 거겠지만.
어쨌든 미미가 제안한 것은 이런 것이었다.
내가 하야시와 함께 훈련을 하면 그냥 훈련하는 것보다 더 얻을 것이 많으리라는.
그것은 일면 타당하기도 했다.
나는 아직 이곳 호텔 훈련실에 프로그래밍된 S급 몬스터 데이터들을 다 상대해 보지 못했다.
하지만 S급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하야시와 함께 훈련하는 것이 훨씬 더 큰 도움이 되리라는 것은 확실했다.
말하자면 S급 훈련실에서 불러낼 수 있는 몬스터들은 람바스가 이미 다 알고 있는 존재들이었다.
몬스터 백과에 다 그 존재가 실려 있기도 하고.
물론 람바스가 전부 그놈들을 직접 상대한 것은 아니겠지만, 존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몬스터를 상대로 훈련하는 것보다 람바스가 상대해 보지 못한 종류의 지구 무도가와 싸우는 것이 천재성을 자극한다는 측면에서 더 도움이 되리라.
그리고 실제로 그와 처음 싸우면서 분신술이라는 상식을 벗어난 기술을 얻기도 했다.
‘아, 별수 없구만.’
미미의 의견이니 거부할 수 없다.
강요하는 것은 아니지만 틀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가능하면 훈련을 하러 가는데 분신을 만들어서 보내고 싶었지만 그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하야시는 그처럼 만만한 상대가 아니니까.
미미의 원하는 것이고 나도 어차피 훈련은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수긍했다.
이미 통보를 받고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야시가 밖으로 나와 내게 말했다.
“함께 훈련을 해주신다고 들었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내게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런 걸 보면 사실은 너랑 훈련하고 싶지 않았다는 말 같은 건 하지 못하게 된다.
보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복도에서 고개를 숙이는 일은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나이는 확실히 그가 나보다 많을 것이다.
기껏해야 몇 살 차이는 안 날 테지만.
어쨌든 그런 그가, S급 헌터인 그가 내게 깍듯하게 군다는 것은 조금 불편한 일이었다.
그에게는 익숙할지 모른다.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것.
그리고 그는 나를 주군이라는 간지러운 용어로 부르고 있었다.
정말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사고관을 가진 그였다.
본인은 부정하겠지만, 그리고 좋아하지도 않겠지만 뭔가 그를 보고 있으면 일본 만화의 전형적인 캐릭터를 보는 것 같았다.
어쨌든 일이 이렇게 되었으므로 나는 그와 함께 훈련실로 내려갔다.
“오셨습니까!”
여느 때처럼 박거한이 나를 반겼다.
그리고 나와 함께 온 하야시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아, 오늘도 같이 오셨네요?”
왜 너는 하야시를 경계하는 거냐?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여느 때처럼 훈련실을 이용하시겠습니까?”
“네. 그런데 이 훈련실은 언제 일반에 공개로 전환되나요?”
“안 그래도 거기 대해서 호텔 측에서 드릴 말이 있었습니다.”
아, 곧 훈련실의 단독 사용이 불가능해지려는 모양이구나.
나는 살짝 아쉽다고 느꼈다.
뭐, 그 핑계로 훈련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 그 또한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하지만 박거한의 이어지는 말은 예상과 다른 것이었다.
“어차피 이 시설을 일반에 개방해도 S급 헌터만 사용할 수 있는 곳이니 다른 손님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헌터님이 계시고 다나카 씨가 계시니까 그나마 활용되고 있는 셈이지요. 헌터님께서 충분히 이용하시고 되었다 싶으면 저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말인즉슨 일반 공개 시기를 언제로 할지는 내게 맡기겠다는 것이었다.
진짜? 그래도 되나?
“제가 평생 개방을 하지 말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곤란할 법한 질문을 했는데도 박거한은 기다렸다는 듯 즉시 대답했다.
“그것도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환영입니다. 오래오래 저희 호텔에 계셔 주세요!”
그런 건가?
S급 헌터가 얼마나 존재감이 큰지 간접적으로 알게 되는 순간이다.
호텔 측에서는 S급 훈련 시설을 내게 완전히 내놓는 것을 감수하고라도 나를 오랫동안 호텔에 묵게 하게끔 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호텔에 있는 동안 이런저런 이벤트도 벌어지지 않았는가?
내 기자회견은 그렇다 치고 다나카도 이곳으로 와서 이 호텔에서 나와 만나 한국 귀화를 결정했다.
이것은 국가 차원의 대단한 이벤트이고 호텔 측에는 상징적인, 그리고 경제적인 의미가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