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117
김말중은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인간의 본질이야 바뀌지 않았지만 미미를 만나고 나서 이른바 그녀에게 속박을 당했다.
다른 생각을 품을 없게 되었고, 만약 그러려고 하면 심한 두통이 찾아왔다.
미미가 말했었다.
배신하면 죽게 된다고.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그 말을 했다는 것이 더 무서웠다.
김말중은 자신이 무시했던 여자, 아마도 조철웅의 애인일 거라고 생각했던 그 여자가 자신에게 심은 악몽을 생각하면 오금이 저렸다.
그래도 한편으로 그는 설명 못 할 편안함을 느끼기도 했다.
자신에게는 원대한 꿈이 있었다.
이제 와서 비밀로 할 것도 없는 그것은 바로 대통령이 되는 것이었다.
세상은 이른바 헌터들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리고 실제 헌터들이 권력을 잡은 나라들이 적지 않고, 그것이 일종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강대국들은 아직 드러내놓고 그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결국 다르지 않다.
권력을 표면에서 잡느냐 아니면 뒤에서 장악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강대국에서 드러내 놓고 헌터가 권력을 잡지 못한 이유는 당연히 높은 시민의식 때문이었다.
그리고 민주주의적인 시스템 때문에.
아무리 헌터가 세상의 중심이 되었고,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해도 사람들의 인식에는 어느 정도 헌터 하면 운 좋은 인간들이라는 인식이 있는 것이다.
정치는 전문가들이 해야 하는 일이고, 커리어가 중요하다.
하루아침에 능력을 얻고 인생 역전한 헌터들에게 맡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인식이 국민들 사이에 있었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국민들의 의식이 높고, 민주 시민으로서의 역량도 뛰어나다.
다만 최근의 박탈감, 말하자면 세상이 바뀌고 난 뒤 주변 강대국들이 빠르게 국력을 신장시킨 데 반해 대한민국은 그것을 따라잡지 못했다는 생각.
그것이 의식의 저변을 흔들고 있었다.
중국은 이미 까마득히 앞서갔고,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일본은 또 어떠한가?
자그마치 열 명이나 되는 S급 헌터를 보유하고 있고, 그 숫자를 귀화라는 형태로 계속 늘릴 기세였다.
한국은 S급 헌터의 숫자가 고정되어 있다.
세 명.
그것은 국가를 S급 몬스터로부터 지키는 데 겨우 알맞은 숫자일 뿐이었다.
타국으로 유출되지도 않았지만, 타국에서 S급 헌터를 데려올 역량도 없다.
그것이 국민들이 자각하는 한계고, 또 불안이기도 했다.
김말중은 그것을 노리고 있었다.
아마 그 불안감을 잘 이용하면 헌터가 대통령이 되는 일이 가능할 것이고, 그것이 자신이 될 수 있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진행 중이었다.
목표는 생각보다 빠르게 이루어졌다.
세상이 바뀐 뒤에 실권이 헌터들에게 넘어온 만큼 헌터부 장관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 자리에 오른 이상 선출직 국회의원들보다 훨씬 강력한 권한을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공무원의 신분은 언제 대통령에 의해 모가지가 날아갈지 모른다.
실제 권력은 강력하다고 하나 대통령에게 잘못 보인다면, 그리고 여당에 꼬투리가 잡힌다면 자신의 자리가 위험해질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손에 잡힐 듯하지만 아직은 시간이 필요한 것이 바로 대통령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뭐라고 할까?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이유는 바로 조철웅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아는 것은 극히 일부분이었다.
하지만 조철웅이 세계 어느 헌터와도 비빌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인식은 있었다.
이것이 자신이 미미에게 당한 주박 때문에 생긴 착각인지, 아니면 진짜인지 헷갈리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은 A급 헌터인 자신에게 이렇게 할 정도라면, 그리고 일본에서 온 헌터마저 같은 편으로 포획할 정도의 수완이라면 그것은 사실일 확률이 훨씬 높다고 생각했다.
그는 단순하게 말해 꿈을 버렸다.
한마디로 대통령이 되지 않기로 결심한 것.
그 꿈을 포기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력은 헌터부 장관으로 누리는 것보다 엄청 더 크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위계가 있을 뿐이지, 누리는 특권은 헌터부 장관이 훨씬 많다.
그리고 헌터부에는 무엇보다 돈이 꼬였다.
또한 국민들의 안전을 볼모로 삼을 수 있다는 점에서 행정부도 마음대로 하지 못할 특수한 힘을 휘두를 수 있었다.
일반인들은 헌터에 대한 이해도가 낮다.
전문가들도 연구 자료를 토대로 이해할 뿐이다.
경외심과 함께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행정 위계 상으로 찍어누르고 있다고는 해도 결국은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헌터부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에서 흘러나간 돈이 온갖 곳에 쓰이고 있으니까.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리고 진짜로 먼지가 안 나오는 사람이라면 소리소문없이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요즘 세상이었다.
무엇보다 대통령의 임기는 정해져 있다.
5년간 국가 정점에서 꿀을 빨면 나머지는 뒷방으로 건너가 과거의 영광을 운운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물론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자리까지 올랐다는 게 비할 데 없는 자부심을 주기야 하겠지만 그것은 자기만족일 뿐이다.
‘하지만…….’
그 욕심을 버리자 새로운 길이 열렸다.
조철웅.
그가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한다면, 그가 대한민국에서 각성하고, 그리고 자신과 연을 맺었다는 자체가 대단한 기회였다.
대통령도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
임기가 없는 권력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자신이 일인자가 되는 일은 없겠지만, 적어도 조철웅은 성향상 전면에 나서는 걸 싫어하니 자신이 전면에 나서서 마음껏 권력을 향유할 수 있었다.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지.’
미미에게 저주를 받았을 때는 그냥 죽고 싶었지만, 그걸 통과하자 새 길이 열렸다.
조철웅에게 충성을 바치기만 하면 자신은 흔들리지 않는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적어도 꿀 빠는 게 언제 끝날지 몰라 불안해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배신을 전혀 꿈꿀 수 없다는 사실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난생처음으로 평화를 느꼈다.
조철웅에게 복종하는 것은 조금의 굴욕감도 동반하지 않는 일이었다.
“후우~~”
미미가 자신에게 요구한 것은 간단했다.
바로 조철웅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권력 지도를 재편하는 것.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몰랐다.
대한민국에는 현재 S급 헌터가 둘-다나카의 귀화 작업이 마무리되면 세 명이다.-밖에 없고, 이희진은 권력욕이 조금도 없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둘은 이미 만난 적이 있고, 힘의 우열 관계는 명확하지는 않아도 정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희진 자신도 조철웅보다 자신이 더 강하다거나, 그의 위에 서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전에 자신이 조철웅을 흠집 내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을 거꾸로 쓴다면.
즉, 언론을 조정해 조철웅의 신격화를 이루어낸다면 여론을 형성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다음은 권력이지만.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은 선출직이니만큼 국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국민이 S급 헌터인 조철웅을 지지하는 한 행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문제는 헌터계를 장악하는 것인데…….’
이것은 조금 어려운 문제였다.
한국의 헌터계의 권력도는 조금 복잡하게 꼬여 있었으니까.
그리고 자신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부분은 그중 일부밖에 되지 않았다.
‘태양 클랜과 오성 클랜과 손잡은 건 좋았는데 말이지.’
둘은 명실상부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클랜에 속했고 또 자신들만의 세력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리고 서로 손잡지 않고 오랫동안 반목해 온 관계로도 유명했다.
그들이 손을 잡은 이유는 다른 클랜들의 위에 올라서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손을 잡으면 대적할 클랜이 따로 없었으니까.
그들을 세트로 포섭한다는 것은 적어도 대한민국 헌터계의 상당 부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 일이 가능했던 것은 자신이 조철웅을 꼭두각시로 만들 거라고 큰소리를 쳤기 때문이었다.
모든 힘 있는 클랜들이 답답하게 여기고 있는 부분이 바로 S급 헌터라는 존재였으니까.
아무리 뭔가를 해보려고 해도 그들에게 막혀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었다.
애써 밥상을 차려놓으면 에헴, 하고 나타나서 먹어치워 버리는 것이 S급 헌터였으니까.
이런 와중에 기존 두 명의 S급 헌터가 사라지고 이희진, 그리고 정체불명의 헌터 한 명만 남은 이 상황은 기회였다.
이희진은 무시해도 상관없는 존재였으므로 그렇다 치고, 조철웅만 꼭두각시로 만들면 대한민국 전체를 장악하는 일이었으니까.
그 계획은 예정대로 흘러갔고, 성공을 하리라고 보았었다.
그래서 박수철과 장오성은 조철웅을 찾아가 안면을 익히면서 환심을 사기도 했었다.
복심으로는 장차 헌터계의 실권을 자신들이 차지할 거라는 야심을 숨긴 채로.
하지만 갑자기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계획도 바뀌었다.
그래서 지금 태양 클랜과 오성 클랜과의 관계는 굉장히 애매해져 있었다.
그들은 갑자기 변한 상황에 황당해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조철웅에게 선물을 하기 위해 엄청난 비용을 치렀다는 것도 후회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김말중이 혼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비서에게 연락이 왔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예정에 없었잖아?”
“네…… 하지만 갑자기 찾아오셔서 장관님을 뵙겠다고…….”
언제부터 대한민국 헌터부 장관이 아무 때나 막 찾아오면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나?
김말중은 머리가 아팠다.
“저…… 어떡하죠?”
비서의 목소리는 대단히 조심스러웠다.
그것은 갑자기 찾아온 손님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아, 혹시?’
김말중은 갑자기 자신을 찾아올 만한 사람이 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바로 조철웅과 미미.
“조철웅 님이 오셨나? 아니면 미미 씨?”
반색하며 물었더니 비서는 달갑지 않은 대답을 내놓았다.
“아니요…… 태양클랜 박수철 님과 오성 클랜 장오성 님이 오셨습니다.”
“아…….”
안 그래도 녀석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김말중은 골치가 아팠다.
그들은 가능하면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는 게 좋을 것이다.
미미도 대한민국 헌터계가 가능한 한 서로 반목하지 않고 하나로 뭉쳐서 그 꼭대기에 조철웅이 올라서는 그림을 바라고 있었다.
문제는 그걸 어떻게 해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거지만.
“끄응.”
한 번은 겪어야 될 일이었므로, 그리고 자신은 이제 두려울 게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비서에게 말했다.
“들여보내.”
“알겠습니다.”
곧 박수철과 장오성이 걸어오는 발소리가 뚜벅뚜벅 났다.
그 소리가 그들의 심기가 매우 불편하다는 것을 드러냈다.
같은 A급이라도 그들은 바닥부터 클랜을 키워 대한민국 수위 클랜으로 성장시킨 인물들이었다.
그만큼 실력의 차이가 있다는 뜻.
한마디로 말해 싸우면 진다.
그런 그들이 성난 마나를 숨기지도 않고 씩씩대며 걸어오는 분위기가 전해지자, 김말중은 혼자 마른 침을 삼켰다.
물론 자신의 뒤에는 조철웅과 미미라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든든한 백이 있었지만, 그들을 자신이 마음대로 오라 가라 할 수 없는 것은 커다란 한계였다.
‘어쩔 수 없지.’
그는 영업용 표정을 꾸미고 마음을 다잡았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박수철과 장오성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