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차니즘 헌터-85화 (85/160)

▣ 85화

하야시의 말이 이어졌다.

“그저 곁에만 있게 해주십시오! 제가 가진 모든 것을 헌터님께 바치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제가 수련하고 터득한 모든 기술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저는 익히기 쉽지 않았지만 헌터님께는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쉬운 일이겠지요.”

이 대목에서 훈련실에서 내가 분신술을 흡수한 일이 생각났는지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저는 이제 다른 곳에서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습니다. 헌터님을 뵌 이상 다른 모든 것들이 의미 없어 졌습니다. 일본에는 더 이상 헌터님만큼 저를 감동시킬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니, 전 세계를 찾아봐도 마찬가지겠지요. 그것은 너무도 확실한 사실입니다. 그것을 안 이상 저는 달리 갈 곳이 없어졌습니다. 제발 저를 받아 주십시오. 아니면 차라리 저를 죽여주십시오.”

설마 훈련실에서 망연하게 있었던 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거였나?

그냥 기절시킨 다음 박혜진에게 부탁해 배에 실어 일본에 돌려보낼 걸 그랬다.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말한 하야시는 인벤토리에서 자신의 검을 꺼내었다.

그리고 그것을 두 손으로 내게 내밀었다.

이 검으로 나를 죽여 달라는 뜻인 것 같다.

최소한 여기서 그런 말은 하지 말아 줘.

여기서 그 칼로 너의 목을 베었다가는 피가 사방으로 튀잖아.

그리고 보기 싫은 시체가 남게 된다.

아무리 미미가 사체를 처리하는 데 달인이라고 해도 그런 일까지 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됐어.”

나는 무력하게 말을 했다.

생각하기 귀찮다.

한 번 나를 죽이러 온 위험한 존재를 곁에 두다니.

그것은 절대 하지 말아야 될 일처럼 느껴졌다.

현실은 소년 만화가 아니란 말이다.

이렇게 고민스러운 상황에 처했을 때는 내게는 치트키와 같은 해결책이 있었다.

바로 미미에게 떠미는 것.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미는 내 대각선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잔잔하고 평화로웠다.

이미 일이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마음의 결정은 진즉 내려놓았다는 듯이.

어쩌면 하야시가 한국에 왔다는 말을 들은 시점부터 이 모든 것을 예상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람바스에게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을지도.

미미에게 이런 상황에 대한 매뉴얼이 있다면 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정말로 마음이 든든하다.

미미가 입을 열었다.

“받아주시는 게 어때요, 주군?”

“뭐?”

나는 귀를 의심했다.

너만은 내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한편으로 이런 대답을 예상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미미는 최선을 다해 나를 서포트하고 있지만 그녀와 나에게는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공통의 목표가 있었다.

이번 생에서는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될 일.

람바스가 최후의 순간에 처절한 후회를 하며 눈을 감아야만 했던 일.

바로 악마를 죽이는 일이다.

그 일에 하야시를 쓸 수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미미가 한마디 덧붙였다.

“물론 주군이 괜찮다고 생각하신다면요.”

“음…….”

미미는 모든 것을 내게 맡긴다는 듯이 말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진심일 터였다.

‘반칙이잖아.’

동시에 미미는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세상에서 단 한 사람 거역할 수 없는 인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녀라는 것을.

미미에게는 람바스 때부터 그리고 지금의 나까지, 엄청나게 많은 마음의 빚이 있었다.

이런 사소한 문제로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나는 무력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미미가 원하는 데다 그게 대의를 생각한 이치에도 맞는 일인 터라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아! 정말이십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야시가 머리를 바닥에 찍었다.

쿵, 쿵, 쿵 바닥 울리는 소리가 난다.

오성급 호텔의 스위트 룸이니만큼 견고하게 지어졌겠지만 그래도 S급 헌터가 바닥을 찍으니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역사 시간에 배웠었다.

과거 고려의 왕이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다고.

하지만 하야시가 지금 하는 행동은 100퍼센트 타의가 섞이지 않은 그의 진심이었다.

쿵! 쿵! 울리는 소리가 그의 진심을 전한다.

‘그렇게 좋은 거냐? 무도가?”

성장하는 게 그렇게 좋은 거야?

나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그가 옆에 있다면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했다.

당연히 우리 편의 전력이 상승할 테고, 그것을 떠나 나 개인적으로도.

나의 진짜 본질인 노력과 근면함을 찾는데 그의 존재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역시 미미의 선택은 옳았다.

여러 가지 의미로.

전부.

‘배신하지 않을까?’

당연히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하야시를 보고 있자니 그럴 가능성은 0.0001%도 없어 보였다.

게다가 그 0.0001%의 가능성은 그가 악마의 실력에 감동하여 그의 쪽에 붙는 것이다.

왜냐면 세상에 나보다 강한 인간이, 그런 헌터가 있을 리가 없으니까.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금방 내게 따라잡힐 것이다.

그러니까 본인이 말한 대로 가장 강한 사람에게 배우고 싶다면 내 옆 말고 다른 장소는 없었다.

하야시는 죽을 각오로 그것을 요청해 온 것이다.

‘대단하구나, 진짜.’

배 째라는 말을 그대로 실천하네.

“일단 오늘은…….”

“네!”

하야시가 절도 있는 자세로 내게 말했다.

“휴식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오늘은 일단 제 방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곳에서 주군의 명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응? 얘 방금 나를 주군이라고 부른 거야?

혹시 미미가 나를 부르는 호칭을 들었던 걸까?

그렇다고 해도 따라 할 필요는 없는데.

점점 주위에 나를 주군이라고 부르는 존재가 늘어나는 기분이다.

너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인데 그런 말을 입에 담는 게 부끄럽지도 않은 거냐?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가 곧 포기했다.

하야시라면 절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야시가 몸을 일으킨 다음 다시 한번 절도 있게 허리를 숙였다.

세계 최상위 클래스인 S급 헌터가 아무리 자기보다 강한 상대라고 해도 이렇게 깍듯이 인사하다니.

역시 사람에게는 각자 중요한 가치가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하야시의 경우에 그것은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실력을 싸움에서 발휘하는 것이다.

하야시가 방 밖으로 사라지자 나는 미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제 게임 해도 되지?”

115

일본 쿠로의 수장 히로키는 큰 충격을 받았다.

다름 아닌 조철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에 보낸 하야시에게서 전언이 도착했기 때문에.

메일을 통해 하야시가 말했다.

-저는 한국에 남기로 했습니다. 저희가 했던 약속은 없던 것으로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어차피 저는 조직의 명령만 수행했지, 당신에게 받은 것은 전혀 없으니까요. 저는 그것에 대해 딱히 뭔가를 청구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당신도 다 잊어버리십시오. 저는 이제부터 일본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더 이상 쿠로의 일원이 아닙니다. 추후에 쿠로가 조철웅 님을 해하려 한다면 저는 그의 곁에서 전력을 다해 당신들과 싸울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저는 목숨을 걸고 싸울 것입니다.

“이런…….”

히로키는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메일이 띄워진 핸드폰을 던져서 부숴 버리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이렇게 성실하게 메일을 보내온 것 자체가 하야시답다고 할 수 있었다.

무도가로서 바른 태도였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하야시가 자신을 모욕한다고 느껴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다나카도 그랬지만, 하야시의 일도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던 것이다.

‘대체 조철웅은…….’

히로키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하야시가 그의 편에 붙었다는 것은 다나카가 한국으로 귀화한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손실이었다.

왜냐면 하야시는 일본에서도 대적할 자가 없을 정도의 실력을 지녔으니까.

게다가 그는 자기보다 실력이 있는 자가 아니면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보내온 메일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쿠로가 조철웅을 해하려 한다면 그의 곁에서 목숨을 바쳐 싸우겠다고.

이런 말은 쿠로에 속해 있을 때도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절대 이 정도의 복종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언젠가 싸우고 싶다고 했을 뿐.

내심 하야시는 싸우기만 하면 자기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햐야시가…….’

히로키는 전략을 수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런 식으로 간을 보듯 조철웅을 상대하려고 했다가는 지속적으로 피해를 받는 것은 일본, 그리고 쿠로일 터였다.

두 명의 S급 헌터를 잃은 것만으로도 이미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의 손실이었다.

아니, 복구는 가능하겠지.

타국에서 각성한 S급 헌터를 빼 오는 일은 생각만큼 어렵지 않으니까.

일본에서 두 명의 S급 헌터가 사라진 만큼 새 S급 헌터의 각성을 기대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 헌터들이 바로 이웃 나라 한국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죽은 것이 아니라 멀쩡히 살아 있다는 점에서 그 가능성은 아주 낮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더 가치가 있다.

일본 출신의 S급 헌터들은.

그들을 두 명이나 잃었다.

약소국이라고 무시했던 나라에게.

그리고 그 나라의 헌터 단 한 명에게.

당장은 답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결심했다.

조철웅을 영입하겠다는 생각은 이제부터 전혀 하지 않겠다고.

그는 일본에 위협이 되는 존재였다.

영입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죽여야 할 존재다.

쿠로의 모든 전력을 동원해서라도.

116

나는 하야시 건이 해결된 뒤에 며칠 동안 게임을 하면서 보냈다.

훈련을 하러 훈련실에 가지도 않았다.

이미 하야시와 싸우면서 큰 경험치를 얻었기 때문에-당연히 레벨도 많이 올랐다.- 당장은 훈련을 열심히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당분간 제대로 쉬어야지.

그런 것치고는 대부분 늘 쉬었다는 것 같지만 조금 더 적극적으로 쉬어주겠다고 다짐했다.

내게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게임 속에서 이희진의 집요한 쪽지에도 답하지 않고 조용히 휴식을 취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결심을 그대로 실천했다.

하야시는 내 명령을 기다리겠다고 했지만, 나는 딱히 그에게 시킬 것이 없었다.

뭐 그에 대한 문제는 지금까지 그랬듯 미미가 알아서 처리해 줄 테니까.

다만 신경이 쓰이는 게 한 가지 있었다.

다나카와 하야시를 잃은 쿠로가 다음에 어떻게 나올지.

당연히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건드리기 힘든 존재라는 것이 명명백백 밝혀진 이상 차라리 더 진지하게 나를 죽이려고 할지도 모르지.

‘뭐, 부담은 안 되네.’

이제까지 일어났던 많은 일들.

그것들은 나를 대단히 귀찮게 만들었지만 쿠로 문제는 생각만큼 그리 신경 쓰이거나 귀찮게 느껴지지 않았다.

미미가 말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 경험치일 뿐이라고.

미미가 말하면 그런 것이다.

조금도 더 고민해 볼 여지 같은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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