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차니즘 헌터-84화 (84/160)

▣ 84화

하야시는 좋은 경험치가 되었다.

모두 미미가 말한 대로 된 것이다.

다나카와 박혜진은 어느 정도 걱정을 한 것 같지만 미미에게는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쿠로에서 먼저 보냈던 다나카와는 싸움을 하지 않았고, 그것을 통해 경험치를 얻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로 하여금 귀찮은 일에서 벗어났고, 또 든든한 동료 한 명을 얻게 되었으니 경험치를 얻지 못한 것을 제외하면 이득이었다.

또한 그는 눈치가 빠르고 사람 대하는 게 능숙해서 나를 귀찮게 하지도 않았다.

내 레벨을 올리는 직접적인 경험치가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 쪽 전력을 강화해 주었다는 점에서 확실히 그로 하여금 포인트를 얻었다고 할 수 있었다.

쿠로는 지금까지 따박따박 우리에게 경험치를 주어 성장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그 사실을 자각할 때까지-자각을 한다고 하더라도 멈출 수 없겠지만- 충분히 우려먹을 가치가 있었다.

“나는 이제 좀 쉴게.”

“네. 그러세요, 주군. 고생 많으셨어요. 푹 쉬세요. 혹시 배는 안 고프세요?”

“훈련실에서 먹고 왔어.”

“잘하셨어요.”

나는 조금 남은 인내심을 발휘해서 샤워를 한 뒤에 침실로 들어가 푹 잠을 잤다.

잠에서 깬 뒤에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로.

114

눈을 떴다.

커튼 안으로 햇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것을 보니 해가 진 것 같았다.

많이 잔 건지 적게 잔 건지 헷갈린다.

아마 서너 시간쯤 잔 것 같은데.

나는 핸드폰을 가져오려고 일어나려다가 생각을 바꿨다.

‘아, 그게 있었지?’

오늘 배운 스킬을 활용하기로 했다.

‘분신.’

즉시, 날 닮은-내가 지금 알몸이기 때문인지 놈도 알몸이었다. 몸매 자체는 근육질로 나쁘지 않았지만, 남자의 알몸을 본다는 것 자체가 별로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설령 그것이 내 것이라고 해도. 거울로 보는 것과 분신의 알몸을 보는 것은 느낌이 달랐다.- 분신이 만들어졌다.

“핸드폰 좀…….”

나는 명령을 내리려다가 분신의 얼굴을 보고 흠칫했다.

이렇게 귀찮아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무엇을 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최소한 그거라도 써야겠다, 그거.

‘표정 변화.’

분신의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속마음은 아닐지언정 표정만큼은 말 걸기가 훨씬 쉬워졌다.

“가져다줘.”

“…….”

입가가 웃고 있는데 뭔가 나를 저주하는 게 느껴진다.

그래도 신기한 사실은 내 명령을 그대로 이행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분신술이라는 스킬이 단순히 나와 똑 닮은 마나 덩어리를 만들어내는 기술이 아니라는 데 그 이유가 있다고 보았다.

분신술은 분신을 만들어내 그것을 컨트롤하는 것까지 포함한 개념의 능력이었다.

그래서 이 분신이 스스로 귀찮게 생각하든 말든 명령을 이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왠지 내가 누군가가 시키는 일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조금 불편했지만, 이것도 자꾸 하다 보면 익숙해질 것이다.

핸드폰을 받자마자 분신을 사라지게 했다.

분신 하나쯤 만들어낸 것쯤 내게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나도 조금밖에 사용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침대에서 일어나 직접 핸드폰을 가지고 오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라는 뜻.

핸드폰을 가져오라고 한 것은 당연히 게임을 하기 위해서였다.

지난번에 이희진과 함께 게임을 한 뒤로 이 게임에 대한 흥미가 부쩍 늘었다.

여전히 매크로만 돌리고 있지만 그래도 장비를 제대로 맞춘 덕분에 훨씬 전투 피드백이 좋아졌다.

이희진은 내게 언제 다시 게임 할 거냐고 계속 쪽지를 보내오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들을 무시했다.

그녀와 게임을 하면 재미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경험치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게임 캐릭터뿐 아니라 현실의 나까지 성장한다.

그것은 물론 좋은 일이었지만 뭔가 일을 하는 기분이 든단 말이지.

게임은 어디까지나 게임이어야 한다.

나는 그것을 편안하게 즐기고 싶었다.

경험치를 얻고 그것을 바탕으로 성장해서 악마와 싸운다고 하는 것에 연결해버리면, 어휴…….

내게 게임이란 즐거움과 휴식이 사라져버리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아직까지 어느 정도는 게임을 내 신성한 휴식의 영역으로 남겨 두고 싶었다.

게임에 막 접속했을 때 똑똑, 하고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주군, 일어나셨어요?”

우와, 타이밍 정확한 것 보소.

어떻게 미미는 내가 일어나는 시간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내가 언제 일어날지 확인하려고 십 분마다 찾아와 계속 노크하지도 않았을 텐데.

나보다도 나를 훨씬 더 잘 알고 있는 그녀다.

혹시 미미에게 어떤 스킬이 있는 게 아닐까?

‘람바스’ 혹은 ‘조철웅’을 관리하는.

그녀가 그 스킬로 내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과거, 현재, 미래까지 전부.

그러면 그녀가 진실로 내 머리 꼭대기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먼치킨 위의 먼치킨.

흔한 관용적 표현을 사용하자면 부처님 손바닥 위에 손오공이라고 할까?

손오공은 괜찮은 비유였다.

그도 엄청난 먼치킨이니까.

차이가 있다면 손오공은 문학적 상상력의 산물이라면 나는 현실의 존재라는 것이 다르다.

나는 미미의 물음을 무시할 수가 없어서-왠지 내가 깨어 있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대답했다.

“응.”

“손님이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시는데, 혹시 괜찮으면 만나보시겠어요?”

뭐라고?

나는 절로 미간을 찌푸렸다.

손님이라면 누구지?

아마 다나카나 박혜진, 미나는 아닐 것이었다.

그들이 찾아왔다고 하면 미미는 굳이 ‘손님’이라고 표현하지 않았을 테니까.

손님이라는 단어에는 뭔가 그리 친하지 않다는 뉘앙스가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셋 중 하나라면 내 성격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테니 굳이 찾아와서 귀찮게 하지도 않을 것이었다.

특히나 오늘처럼 적과 싸운 피곤한(?) 날에는.

웬만한 용건은 미미 선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누군데?”

“주군도 아시는 분이세요. 더 기다리게 해도 상관없으니까 주군 편하신 대로 하세요.”

개념 없이 김말중이 찾아온 것도 아니겠지.

그와 친한 클랜의 헌터들도 아닐 것이다.

만약 그들 중 하나라면 농담이 아니라 요절을 낼 테다.

나는 귀찮은 일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 몸을 일으켰다.

가족 같은 미미와 파프리카를 제외하고 늦은 시간까지 타인을 내 프라이빗한 공간에 두고 싶지도 않으니까.

나는 결국 분신술을 써서 핸드폰을 가져오게 하고 부질없게 몸을 일으켜 속옷과 추리닝을 입었다.

여담이지만 내 추리닝은 열 벌 정도로 늘어나 있었다.

미미가 똑같은 디자인의 똑같은 사이즈 추리닝을 여러 벌 준비해 주었다.

소재도 좋고 입었을 때 엄청 편하다는 점에서 자취할 때 입었던 추리닝과는 차원이 달랐다.

역시 미미는 내 취향을 잘 알고 있었다.

돈이야 넘쳐 나니 이 추리닝들은 싸구려가 아닐 것이다.

이런 좋은 추리닝을 넉넉하게 구비해 두고 있다는 것은 굉장히 마음 뿌듯한 일이었다.

부자가 된 기분이라고 할까?

실제로 부자지만.

침실 밖으로 나가서 기다리고 있다는 손님이 누구인지 확인했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누굴까 궁금한 생각은 있었지만, 그 손님은 내가 가장 예상할 수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왜 네가 여깄어?’ 였다.

그도 그럴 수밖에, 나는 그와의 문제를 다 해결했다고 생각했는데.

얼마간 좌절을 한 줄은 알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일본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내 방에 온 거야?’

나는 뒤처리가 너무 무르지 않았나 생각했다.

미미의 음성이나 태도는 딱히 걱정하거나 큰일이 일어났다는 기색은 전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하야시만큼 위험한 인물을 확실하게 처리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고 온 것은 내 실수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나는 그를 위해서 훈련실에서 제공하는 음식까지 남겨 두고 왔다.

그래도 뭐라고 할까?

지금 내 앞에 펼쳐지고 있는 그림은 전혀 위험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여러 번 보았던 만큼 익숙한 장면이기도 있다.

바로 하야시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

왜 이러는 거야? 너 자존심 상했던 거 아니야?

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에 눈살을 찌푸렸다.

“주군께 할 얘기가 있어서 왔대요.”

“……언제 왔는데?”

나는 슬쩍 걱정을 하면서 물어보았다.

“음…… 주군이 주무시러 들어간 뒤 한 30분 뒤에 왔으니까 세 시간쯤 됐네요.”

어이쿠.

예상대로다.

꿈자리가 뒤숭숭하지 않았던 게 신기할 정도였다.

내가 잠을 더 잤으면 어쩔 뻔했냐?

오늘 일어나지 않고 내일 아침까지 잤으면 어쩔 뻔했어?

자랑은 아니지만 종종 그럴 때가 있단 말이다.

잠에서 깼어도 눈을 뜨기가 귀찮아서 계속 자기 신공.

나는 겨울잠을 자는 곰과 내기를 할 자신도 있었다.

하야시가 무릎을 꿇고 오래 앉아 있어 피곤함을 느끼든 말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처럼 위험한 인물이 내 방에 들어와 오래도록 머물고 있다는 사실 자체였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전혀 모른 채로 잠을 자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어휴.

소름이 끼친다.

나는 소파에 앉았다.

그를 지그시 바라보면서 물어보았다.

“나한테 할 말이 뭔데?”

“헌터님 곁에 있게 해 주십시오!”

하야시가 단호하고 간절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잘못 들었나?

방금 얘가 내 옆에 있게 해 달라고 한 거야?

나는 귀를 후볐다.

하지만 S급 헌터의 좋은 청력으로 바로 코앞에서 한 말을 잘못 들었을 리가 없었다.

“왜?”

그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헌터님 곁에 머물며 헌터님께 무도를 배우고 싶습니다.”

하야시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은 마치 만화에 나오는 캐릭터처럼 이글대고 있었다.

훈련실에서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는데.

회복할 수는 있을지, 혹시 자살은 하는 건 아닐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간과하고 있었다.

헌터로 각성하기 전 하야시는 일본에서 수많은 달인에게 사사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마 그 과정에서 숱한 싸움을 했을 것이다.

패배를 하고 모욕도 당했겠지.

가르침을 받고 귀여움을 얻은 것은 그 뒤에 있었던 일일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 나와 싸운 것은 비록 그가 했던 모든 경험을 통틀어서 가장 충격적인 경험이었다고 하더라도 그에게는 이것을 극복할 만한 정신력이 있었던 것이다.

애초에 나는 내 성격이 게을러서 다른 사람의 회복력을 쉽게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하야시는 아마 다음에 사사할 존재로 나를 선택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나를 죽이러 왔던 주제에 이제는 내게 배우고 싶다니, 뻔뻔함이 도를 지나친 거 아닌가?

하야시가 고개를 푹 숙였다.

이마를 바닥에 댔다.

“납득하실 수 없는 게 당연합니다. 목숨을 걸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는 평생을 수련해도 헌터님을 결코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저 헌터님이 어떤 모습으로 싸우는지 곁에서 지켜보고 싶을 뿐입니다. 미천한 재주나마 조금이라도 능력이 닿는다면 헌터님께 조금은 배울 수 있겠지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