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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차니즘 헌터-83화 (83/160)

▣ 83화

절대로, 몇 번을 태어난다고 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만났으니 어쩌면 더 살아 있어 봐야 의미가 없다고 느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제까지 그가 살면서 패배를 한 번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성장을 위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을 것이다.

S급 헌터가 되고 나서는 더더욱, 어쩌면 세계의 1인자가 될 수 있다는 야망에 부풀었겠지.

그가 절망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자살을 하든 말든 내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냉정하게 보일지 몰라도 애초에 놈은 나를 죽이러 온 자객이니까.

내 손을 거치지 않고 세상에 사라진다면 이 에피소드의 완벽한 결말일 수 있다.

그리고 쿠로처럼 찜찜한 계획이나 세우고 있는 단체의 멤버 하나가 사라진다는 것은 이 세상 전체에도 좋은 일이었다.

훈련실에서 나가기 전에 나는 내가 시험하고자 했던 것을 계속해 보았다.

분신들에게 노근의인 스킬이 어느 정도까지 적용되는지 알아보기로 한 것.

“흠.”

확실히 스킬의 발동 시간은 분신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대폭 줄어들었다.

하지만 낮아지는 지점에도 한계가 있어서 본체인 내가 발휘할 수 있는 스킬 유지 시간 10분의 1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았다.

본체와 같은 수준의 노근의인 스킬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분신의 숫자를 줄여보았더니 세 개가 한계였다.

물론 앞으로 노근의인 스킬이 강해짐에 따라 이것의 발동 시간이 똑같이 적용되는 분신의 숫자가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내가 이 스킬들을 상당히 자주 사용하고 있는 만큼 스킬 레벨도 빨리 오르고 있으니까.

그에 맞추어 전체 분신들의 스킬 사용 시간도 비례하여 늘어날 것.

‘앞으로 귀찮은 일이 있으면 이 분신들을 이용하면 되겠구나.’

분신들을 본체인 나와 어느 정도 거리까지 떨어뜨려 놓을 수 있을지도 궁금했지만, 그것은 이 좁은 훈련실에서 시험해 볼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파프리카가 있으니 먼 곳에서 일을 보아야 할 때는 지금까지처럼 녀석의 도움을 받으면 될 것이었다.

‘사소한 일에는 분신들을 동원하고 말이지.’

예를 들어 잔챙이들하고의 싸움 같은 것.

애초에 내게는 큰 전투 건밖에 들어오지 않고 있지만.

파프리카는 단순히 나를 흉내 낸 대리인 역할을 시키기에는 아까운 존재이다.

세상에서 가장 귀엽고, 세상에서 가장 강한 각성수니까.

내 파프리카는.

“끄응~”

분신을 모두 되돌리자 갑자기 격한 피로감이 찾아왔다.

물론 이 피로감은 몸이 피로해서 느끼는 것이 아니다.

나름대로 나를 죽이러 왔다는 자 때문에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그게 해결되자 한꺼번에 허탈감이 찾아온 것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으로 돌아가는 것도 귀찮을 지경이다.

젠장. 싸움 따위 하려고 너무 멀리 와 버렸어.

뭐, 오늘분 훈련을 했다고 생각하면 그리 손해는 아니지만.

사실 평범한 훈련보다 많은 것을 얻기는 했다.

나는 하야시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예 내 존재 자체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깊은 충격에 빠진 사람을 가까이에서 지켜본다는 것은 대단히 귀찮은 일이다.

나는 그를 내버려 두고 바깥으로 나갔다.

역시나 이 호텔의 친절한 직원들은 내가 요구한 음식들을 문 앞까지 배달해 주었다.

나는 그것들을 안으로 들인 다음에 천천히 식사를 했다.

적당히 먹고 나머지는 손대지 않고 남겨 두었다.

실망을 안고 일본에 돌아가야 하는 하야시에게 소소한 선물이 될 것이다.

음식으로는 공복만 채우는 게 아니다.

가끔은 허한 마음을 달랠 수도 있었다.

하야시가 실제로 이걸 먹을지 말지는 역시 잘 모르겠지만.

아마 자존심 때문에, 그리고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먹지 않을 확률이 더 높아 보인다.

하야시가 충격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릴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는 관심 없는 일이었다.

나는 훈련실을 나왔다.

그러자 박거한이 멀리서 나를 발견하고 후다닥 다가왔다.

내 앞에서 호들갑을 떨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인정해 주어야 했지만, 가끔은 그것이 통제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적당히 나를 신경 썼으면 좋겠는데.

미안하지만 나는 그와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지 않을 것이었다.

미래의 일일지라도 그것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뭐, 훈련실에서 도움을 주는 것만으로도 내게 필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지만.

“훈련은 끝나셨습니까?”

나는 평소에 길게 훈련하지 않았다.

하야시와 함께 훈련실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내가 나왔지만-오히려 평소 훈련하던 것보다 시간이 짧았다.- 박거한은 그렇게 판단한 듯했다.

“네.”

“같이 들어가셨던 분은 함께 나오지 않는 겁니까?”

“네. 이 훈련실이 너무 마음에 든다면서 조금 더 있고 싶다고 하네요. 미안하지만 편의를 좀 봐줄 수 있을까요?”

“아, 네! 물론이죠! 다른 분도 아니고 헌터님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들어드려야지요! 일행분이 원하는 만큼 시설을 이용할 수 있게 하겠습니다.”

박거한은 내가 한 말을 ‘명령’이라고 했다.

나는 부탁을 한 건데.

대체 나를 너의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냐?

애초에 이 훈련실은 일반인에 공개하지도 않고 수익 목적으로도 사용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도 시설 운용에 비용이 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내 입장에서는 부탁하는 것이 맞았다.

박거한은 말하기 좀 껄끄럽다는 듯이 큰 손으로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다만 저기…… 헌터님이 길들여놓은 훈련실의 마나를 저분이 흩트려놓지는 않을까 조금 걱정이 되기는 하네요.”

그러니까 박거한이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지금껏 사용해서 채워놓은 S급 헌터의 순수한 마나를 A급에 불과한 다른 헌터가 사용함으로써 버려놓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만큼 그는 하야시를 무시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 호텔에 투숙할 때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A급 헌터라고 했으니 박거한은 하야시가 S급이라는 것을 모를 만했다.

하지만 박거한의 등급으로 A급에 대해서 쉽게 말하는 것은 아마도 개인적으로 나를 알고 있다는 자부심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물론 한국을 집어삼킬 음흉한 계획을 실행 중인 쿠로의 조직원인 하야시는 한국인 누구에게라도 무시 받을 자격이 있었다.

“괜찮아요. 별일 없을 거예요.”

“아! 헌터님이 그렇다고 하시면 그런 거지요. 알겠습니다.”

박거한이 활짝 웃으면서 나를 배웅했다.

나는 얼굴에 커다란 마스크를 쓴 채로 내 호텔 방으로 복귀하기 위해 엘리베이터로 갔다.

113

“수고하셨어요, 주군.”

방에 돌아오자 미미가 나를 반겼다.

어쩐지 내가 이 시간에 정확하게 돌아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던 같은 태도였다.

“그래서, 그는 어떻던가요?”

“음…….”

글쎄, 뭐라고 해야 할까?

나는 하야시가 기대했던 것만큼 강한 상대였고 또 예상대로 많은 잠재력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와의 싸움에서 좋은 스킬 하나를 얻기도 했고.

분신술은 앞으로 크게 요긴하게 쓰일 스킬이었다.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하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쉬웠다.

그리고 짧게 끝난 싸움이었다.

뭐 싸움 자체야 쉽게 끝날 줄 알았고, 백 퍼센트 내 승리를 짐작하기도 했지만 예상이 그리 틀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단지 하야시의 기술 한 가지를 보았을 뿐이다.

그것을 통해서 스킬을 얻었으니 손해는 아니었지만 나는 하야시 안에 훨씬 더 꺼낼 것이 많이 있을 거라고 보았다.

숨겨 놓은 비기도 단순히 분신술 하나만이 아니었으리라.

적어도 다섯 개나 열 개, 혹은 수십 개까지도 가능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 수밖에, 닌자술에 단지 분신술 기술밖에 없다고 볼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그는 일본의 유명한 무도가들을 두루 거치면서 사사했다고 하지 않는가?

그 기술들을 전부 끄집어낼 수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분신술 하나만으로 끝냈다는 것은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이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다.

딱 한 가지만 배웠다고 해도 결코 손해는 아니다.

그에게 분신술을 습득하고 바로 수많은 분신을 만들어 시험하는 동안 마나를 적지 않게 사용했기 때문에 탈력감이 꽤 있었다.

비록 싸우는 시간은 짧았다고 해도 내 정신적인 피로감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아무리 내가 조철웅의 기질을 찾아가면서 점점 더 부지런해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야시와 계속 싸우면서 그의 기술을 모조리 끄집어낼 만큼의 인내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하야시는 이미 전의를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그렇게 생각하면 좀 더 노련함을 발휘해서 그가 전의를 잃지 않을 정도로 놀라지 컨트롤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지만, 당시 나는 분신술에 대한 호기심이 너무 컸었다.

이것은 내 실수라고 생각한다.

경험치가 부족했던 것이다.

람바스의 경험치가 아니라 헌터 조철웅의 경험치가.

“나쁘지 않았어.”

나는 그렇게만 대답했다.

길게 브리핑해서 무엇하랴?

물론 미미는 그것을 바랄 수 있지만, 기쁜 얼굴로 들어주겠지만 내가 긴 설명을 싫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는 그녀였다.

“하야시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죽이지는 않으셨죠?”

솔직히 하야시를 죽여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그는 나를 죽이러 온 자객이니까.

어쩐지 싸울 때 그런 분위기는 거의 없었지만 실은 목숨이 걸린 싸움을 했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애초에 하야시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의 목숨을 소중히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라 호텔에서 사람이 죽었다가는 큰일이 나니까.

더구나 외국인이 죽으면 국제 문제로 비화한다.

어쩌면 그런 전개도 일본 쿠로 쪽에서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한 빌미를 줄 필요는 없지.

꼭 물리적으로 죽이지 않아도 하야시는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쿠로에 복귀나 할 수 있을까?

“많이 실망한 것 같아. 아직 훈련실에 있어.”

“아~ 네.”

미미의 말투에는 여유가 넘쳤다.

늘 그렇듯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투다.

아마도 이것은 람바스와 함께 지내면서 얻은 기술일지 몰랐다.

람바스는 시시콜콜 설명하는 것을 싫어하니까.

미미는 자연스럽게 스스로 생각해서 상황을 끼워 맞추는 법을 익힌 것이다.

람바스에 대해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그녀라면, 그리고 눈치 백 단의 그녀라면 그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을 터.

“잘됐네요.”

미미의 말이 맞다.

나를 죽이려고 온 자객을 처리했으므로 갑작스럽게 발생한 이 건은 이제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정말 이걸로 다 끝난 걸까?

쿠로는 다나카와 하야시 둘만으로 이루어진 조직이 아닐 텐데.

이렇게 된 이상 본전이 생각나서 계속 자객을 보내지는 않을까?

“진짜 괜찮을까? 하야시를 보낸 게 소용없게 됐다고 해도 쿠로가 이대로 포기할 것 같지 않은데.”

“네. 그렇겠죠.”

미미가 전혀 걱정되지 않는다는 투로, 마치 남의 일처럼 대답했다.

“하지만 그들은 주군에게 큰 위협이 되지 못할 거예요. 오히려 그거예요, 그거.”

미미는 귀엽게 턱을 찍으며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뭔데?”

나는 왠지 그녀가 말하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물어보았다.

“경험치요.”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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