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차니즘 헌터-80화 (80/160)

▣ 80화

장비까지 드러냈음에도 하야시는 아직 자신의 마나를 발현하지 않았다.

아마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둘만 남겨져 대치하고 상황이지만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니까.

이것도 그가 지닌 무도가로서의 자세겠지.

나도 옷을 벗었다.

내가 장비 위에 걸치고 있는 옷은 추리닝이었다.

체형에 비해 사이즈가 한 단계 더 큰 헐렁한 추리닝.

내가 입고 있던 장비를 드러내자 그것을 보는 하야시의 눈이 가늘어졌다.

“상당히 좋은 것을 입고 계시는군요.”

그가 말이 많지 않은 타입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훈련실을 둘러볼 때와는 달리 적극적인 기색을 내보이며 말하는 것을 보니 내가 입고 있는 장비의 가치를 알아본 것 같았다.

장비에 대해서는 두말하면 입이 아프다.

왜냐면 내 장비는 지구, 아니, 우주 최고의 기술자가 만든 장비이니까.

그녀는 이 장비를 만드는 데 자신의 기술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말하자면 자기가 만든 장비를 입는 사람이 제대로 사용할지에 대한 의심이나 고민을 전혀 할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녀는 그냥 자신의 가진 모든 기술을 몽땅 이 장비에 쏟아 넣으면 충분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부족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장비에 성장하는 기능을, 착용자가 레벨 업함에 따라 장비가 계속 업그레이드되는 기능을 넣었다.

또한 더 새롭고 좋은 재료가 생기면, 그것을 이용해 장비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기도 했다.

괜히 이 장비가 보구(寶具)라고 불리는 게 아닌 것이다.

이런 대단한 장비를 입고 있다는 것이 약간 정당하지 않다는 기분도 없지 않았다.

나는 이 싸움에서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엄청난 고성능 장비까지 입고 있다는 것이 약간 반칙을 한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도 그럴 필요 없지.’

상대도 장비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사정을 전혀 두지 않았을 거니까.

오히려 하야시는 자신이 현존하는 장비 중 최고라고 여기는 것을 입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 그의 오만함이 여기서 조금 깨어졌다는 것이 통쾌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통쾌함은 장비 문제에서만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욕심나면 드릴까요?”

나는 싸움에 약간의 재미를 주기 위해서 그렇게 말했다.

하야시가 그게 무슨 뜻이냐는 표정을 짓기에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기는 사람이 상대의 장비를 갖는 것입니다. 이왕이면 무기도 걸죠.”

“아…….”

하야시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역시 이 싸움 마니아는 장비와 무기도 좋아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둘은 떼려야 떼어놓을 수가 없으니까.

“보통 저는 신성한 결투를 앞두고 내기 같은 것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들어 보니 재밌을 것 같군요. 입고 계신 장비는…… 외람되지만 굉장히 좋아 보입니다. 좋은 장비를 주인을 잘 만나야 그 쓰임이 올바른 법이죠.”

얼마나 탐이 난 것인지 그가 최초로 도발하는 듯한 멘트를 했다.

치잉-

하야시가 인벤토리에 손을 뻗어서 무기를 꺼냈다.

그가 꺼낸 것은 일본도였다.

뭔가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그와 굉장히 잘 어울리는 무기이기도 했다.

검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그림처럼 잘 어울린다.

아마도 뭐시기 검술 정도 되는 모양이지.

그 일본도가 하야시에게 맞추어 제작된 것은 물론일 것이고, 그가 가장 잘 이용하는 무기이기도 할 것이다.

그는 검술을 대대로 연마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하니까.

각성하기 전에 이미 천재 소리를 들으며 달인의 경지에 올랐다고 한다.

아직 딱히 마나를 개방한 것도 아닌데 주인의 손에 들린 일본도가 예리한 빛을 뿜어내며 번쩍번쩍 빛났다.

나도 내 무기를 꺼냈다.

내가 꺼낸 것은 겉으로 보아서는 결코 무기로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오히려 장비의 일부처럼 보인다.

한 쌍의 장갑.

나는 ‘지배자의 손아귀’를 양손에 끼웠다.

우웅-

주인을 제대로 만난 보구 ‘지배자의 손아귀’가 내 손에서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지배자의 손아귀’ 또한 내가 성장하는 데 영향을 받아 함께 능력이 성장하는 무기였다.

“그게 답니까?”

아무리 하야시라도 ‘지배자의 손아귀’가 특별한 물건이라는 데까지는 간파하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스킬을 사용했다.

‘노력!’

부와악-

애매하던 생각이 더 확실해진다.

‘재미있네.’

그리고 흥분된다.

하야시와의 싸움이.

이것은 S급 헌터와 싸우기 전에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스킬을 발동하기 위해 마나를 사용한 게 신호가 되었다.

하야시 역시 자기 검에 마나를 흘려 넣었다.

치이잉-

그의 일본도가 더욱더 예리한 빛을 띠며 강기(剛氣)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노력’ 스킬을 사용했기 때문일까?

나는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야시는 지금 손에 검을 들고 있었다.

그의 검술이 그렇게 뛰어나다고 하니, 그리고 그가 일본 쿠로의 지령을 받고 그간 지하에서 거둔 실적이 많다고 하니 그의 실력을 확인해 보고 싶어졌다.

내게는 ‘분석’ 스킬이 있다.

람바스가 각성 초기부터 장착하도록 설정해 둔 스킬.

이것만 있으면 전투를 할 때 상대 움직임을 분석하여 그것으로부터 영감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영감을 바탕으로 높은 확률로 스킬이 생기기도 하고.

영감이라고 해봤자 태반은 람바스가 가지고 있던 원래 능력을 각성하는 것에 불과했다.

말하자면 싸움을 통해 그의 생전 기억을 떠올려서 그가 가졌던 기술들을 하나씩 꺼내는 것이었다.

물론 람바스는 실시간으로 강해지는 천재 먼치킨이었던 만큼 내게 생기는 스킬이 백 퍼센트 그가 기존에 가졌던 스킬이었다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미세한 차이가 있다.

지구의 헌터가 싸우는 것과 그가 상대했던 적들은 백 퍼센트 같지가 않았으니까.

그 조그마한 차이로도 큰 깨달음을 끌어내 자신의 기술에 적용하는 람바스였다.

그게 그의 무서운 점이다.

게으름만 아니었다면 악마 따위는 상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하야시와 대치한 상황에서 이전의 싸움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흥미가 돋는 것을 느꼈다.

이 흥미는 ‘조철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살았던 삶은 그냥 목표를 설정해두고 그것에만 아등바등 열심히 매달린 평범한 것에 불과했으니까.

내가 검술의 달인을 만났다고 해서 그의 기술을 보는 것에 흥미를 가질 리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이 느낌은 람바스의 성정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보아야 했다.

그가 궁금해하고 있었다.

하야시가 싸우는 모습이 어떠할지.

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고 싶어 한다.

여기 조철웅의 성정이 영향을 끼친 것이 있다면 ‘노력’ 스킬을 통해 귀찮은 감정을 억눌렀다는 점일 것이다.

람바스와 내가 시너지를 일으키고 있었다.

생산적인 방향으로.

이게 애초에 람바스가 새 인물에 빙의했을 때 추구하고자 했던 일이며 이것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구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냥 흐름대로 왔을 뿐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그것을 확실하게 자각할 수 있었다.

람바스가 천재 먼치킨이었다고 해도 ‘조철웅’이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조철웅’이라서 람바스에게 시너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이 효과는 시간이 갈수록 더 커질 것이었다.

이런 사고의 끝에 나는 두 손에 낀 ‘지배자의 손아귀’ 최초의 도구를 만들어냈다.

싸움이 시작되었지만 내가 만든 것은 무기가 아니었다.

양손에 모두 방패를 만들어냈다.

키잉-

반원형의 조그만 방패 한 쌍이 내 양손에 장착된 것을 보고 하야시가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야 내 몸에 둘러진 장비뿐만 아니라 손에 낀 장갑도 범상치 않은 물건임을 알아본 것 같다.

“정말 신기한 것을 많이 가지고 있군요. 그것도 내기에 포함되는 겁니까?”

자신은 신성한 싸움에 내기 따위는 걸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장비에 이어 ‘지배자의 손아귀’까지 탐내고 있었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으므로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이 없다.

질 자신이.

“그러든지요.”

“좋습니다.”

치이잉-

하야시가 동작을 바꾸자 또다시 검이 울리면서 검기가 춤을 추었다.

하야시가 가진 검 자체는 그렇게 뛰어난 무기가 아니었다.

아니, 충분히 1티어를 상회할 만큼 좋은 무기이겠지만, 나는 그의 장비는 물론이고 그가 손에 든 검도 전혀 탐이 나지 않았다.

그저 싸움의 여흥을 돋군다는 의미에서 내기를 제안했을 뿐이다.

그렇게 하면 하야시가 더 열심히 싸울 것 같아서.

변죽을 울리지 않고 전력으로 덤벼야 뽑아낼 것을 빨리 뽑아내고 싸움을 마무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의 장비나 무기를 가져다가 어디에 쓰겠는가?

지구에 존재하는 어떤 장비나 무기를 가져와도 내가 가지고 있는 보구들에 못 미친다.

10분의 일, 아니, 10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팔면 모를까?’

물론 하야시의 장비와 무기를 가져다 팔면 큰돈을 받을 수는 있겠다.

미미가 좋아하겠구나.

미미가 기뻐하면 나도 기쁘다.

그런 의미에서 전리품을 가져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거추장스러운 마스크를 벗었다.

내 썩은 얼굴을 보고 하야시가 입매를 비틀었다.

그처럼 진지한 인간에게 나처럼 게을러 죽을 것 같은 표정이나 짓는 사람은 무척 싫을 것이다.

더구나 자신과 싸우면서 이런 표정을 짓는 인간은.

그는 원래 무엇을 하든 조급하게 구는 스타일은 전혀 아닌 것으로 보였지만, 내가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로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칫.” 하고 입소리를 냈다.

이 거만한 놈은 약한 자가 먼저 덤비도록 기다려주는 게 싸움의 도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저를 너무 우습게 보시는군요.”

그렇게 읊조리더니 빠른 동작으로 검 끝을 세우고 달려들었다.

채앵!

번개 같은 동작이었다.

아마 대부분의 A급 헌터들은, 그리고 상당수의 S급 헌터는 이 공격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하품이 나오도록 단순한 동작이었다.

짜식이, 실망시키기는.

몸을 살짝 비틀고, 손을 한 번 쳐든 것만으로 그의 공격을 막아냈다.

“당신이야말로 나를 우습게 보고 있는 것 같은데?”

이런 한심한 공격이나 하는 놈에게는 존댓말을 해 줄 필요도 없다.

썩은 낯짝으로 상대를 도발하는 것은 언제나 효과가 좋다.

하야시의 표정이 굳어졌다.

“큰소리치기는!”

그가 또다시 공격을 해왔다.

챙! 챙! 챙!

그런데 뭐라고 할까?

실망스럽다.

검술의 달인은 무슨.

당연히 이것은 하야시의 백 퍼센트 실력이 아니었다.

아마도 이 정도 능력을 선보이는 것만으로 그동안 적들이 쉽게 쓰러져나갔기 때문이겠지.

나를 죽이라는 지령을 받았을 때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것이 분명하다.

S급 헌터와 싸우게 된다는 것은 좋았을지 몰라도 나는 검증되지 않은 헌터이니까.

자기가 쉽게 이길 거라고 자만했을 게 틀림없다.

나는 정신 차리라는 의미에서 놈의 마지막 공격을 오른손으로 막아내고, 왼손의 방패로는 그의 옆얼굴을 후려쳤다.

퍽!

약하게 때린 것이지만 그의 얼굴에 선이 그어지며 피가 흘렀다.

깜짝 놀란 그가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자신의 볼을 손으로 훔치며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래. 이제야 좀 진지하게 할 맘이 생긴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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