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차니즘 헌터-79화 (79/160)

▣ 79화

하야시의 물음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왜냐면 아무리 좋은 훈련 시설이라 하더라도 S급 헌터 두 명이 전력으로 방출하는 에너지를 감당할 수는 없을 거니까.

“새로 만들어진 시설이 있거든요. 아주 좋습니다. S급 전용이에요.”

“아, 한국에 그런 것도 있었군요.”

하야시는 S급 전용 훈련 시설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다는 투로 말했다.

하기야 일본은 S급 헌터의 숫자가 한국보다 훨씬 많다.

그리고 놈들은 조직을 결정하고 자신들의 원대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당연히 헌터의 숫자가 많다는 것만으로 만족할 리가 없었다.

S급 헌터들은 각자 자신의 능력을 더욱 키우고자 하겠지.

그것이 가장 빨리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수단이 될 것이다.

A급 이하의 헌터들을 아무리 성장시킨다고 해도 결국은 S급 헌터 몇 명에 비하지 못할 테니까.

“좋은 생각이군요. 저도 사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습니다. 조철웅 님을 빨리 만나고 싶었는데 그 장소가 마땅치 않더군요.”

역시 나는 하야시를 직접 찾아온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미의 말이 맞았다.

하야시처럼 싸움을 좋아하는 자는 인내심이 없을 테니까.

복잡한 사정을 따지지 않고 목적만 빨리 달성하려고 했다면 다른 사람들이나 시설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다만 그 뒤처리를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는 생각보다 쉬울 수 있었다.

지금 일본은 그만큼 힘이 강하니까.

S급 헌터가 한 명 줄어든 시점에서 한국은 더 일본의 말에 종속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제게 시간을 좀 주시겠습니까?”

“네. 천천히 하세요.”

나는 하야시 쪽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오렌지 주스를 마저 마셨다.

하야시가 시간을 달라고 한 이유는 단순했다.

싸울 준비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무기야 인벤토리에 있을 테니 상관없을 테고 그가 하려고 하는 일은 장비를 착용하는 일이었다.

남자가 옷을 갈아입는 것에 내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나저나 나도 마음이 참 넓단 말이야.

적에게 장비를 착용할 시간까지 허락하고 말이지.

하야시는 거실에 있는 나를 두고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몇 분 뒤에 다시 나왔다.

예상대로 그는 장비를 입고 있었다.

몸에 긴 코트를 걸치고 있었지만. 나는 그의 달라진 분위기를 금세 느낄 수 있었다.

언뜻언뜻 보이는 코트 아래의 복장이 내 예상이 맞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나도 내 S급 장비를 겉옷 안에 입고 있었다.

디자인적으로 위화감이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헌터 장비는 다른 사람들의 눈을 잡아끌기 마련이다.

더구나 S급 헌터의 장비라면.

일반인들이야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헌터들이라면 웬만큼 다 알고 있었다.

패션에 관심이 많고 명품 브랜드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착용한 브랜드 신상품을 금방 알아보는 것처럼.

S급 헌터의 장비는 그 자체로 명품 브랜드나 마찬가지였다.

가격도 비싸지만, 그것을 입은 사람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대번에 드러낸다.

말하자면 안과 겉, 모두 명품임을 인증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S급 헌터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하고 싶지 않았고, 그것은 하야시 쪽도 마찬가지였다.

정체를 숨기고자 하는 욕구는, 그리고 그 필요성은 나보다 하야시 쪽이 더 높다고 할까?

내가 정체를 숨기려고 하는 것은 단순히 귀찮기 때문이었다.

지금이라면 이미지도 좋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말아야 할 이유가 딱히 없었다.

“갈까요?”

준비가 끝난 하야시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방 밖으로 나가서 둘이서 엘리베이터에 탔다.

좁은 공간에 남자 둘만 있자니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사실 내게 있어 성별 자체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친하지 않은 누군가와 단둘이만 놓인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정도 데면데면함이야 일반인일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지만 람바스의 귀차니즘을 이어받고 난 뒤에는 그 어색함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하기야 이런 성격으로는 무엇을 참을 수 있겠느냐마는.

하야시와 빨리 싸우고 나서 관계를 정리하고 싶었다.

그 정리란 과연 어느 정도 수준에서 마무리될까?

한쪽이 죽어야만 끝나게 된다면 위험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다나카를 귀화시킨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귀한 S급 헌터를 죽이면, 일본도 진지하게 나설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하야시는 겉으로 드러나는 신분이 없는 자이지만, 어떤 핑계를 대서든 일본은 나를 공격할 수 있었다.

뭐, 지금 그런 상황이 되어도 근본적으로 다를 것은 없는 것 같지만.

‘죽일 필요까지는 없겠지.’

하야시도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내게 덤비지는 않을 것이었다.

순진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믿고 싶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훈련실에 도착했다.

그러자 요즘 훈련실에 올 때마다 늘 그런 것처럼 익숙한 얼굴이 먼저 나를 반겼다.

원래 이곳에서 일하는 박거한이지만 요즘 들어 얼굴이 보이는 횟수가 더 많아졌다.

내 예상일 뿐이기는 하지만 내가 훈련실을 자주 찾다 보니-그리고 같은 S급 헌터인 다나카는 나보다 더 많이 훈련실에 오다 보니- 그가 일부러 근무시간을 늘리거나 조정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S급 헌터와 접촉할 기회는 그 자체로 일반인에게는 의미가 있는 일이니까.

박거한은 겉모습과는 달리 그런 종류의 기회 포착 능력은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

역시나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커다란 마스크를 얼굴에 쓰고 있어도, 아무리 먼 곳에 있어도 그는 항상 나를 재빨리 알아보았다.

“오셨습니까?”

눈빛을 반짝반짝 빛내는 것에 비해 지나치게 과장된 표정이나 몸짓을 하지는 않았다.

‘연습한 보람이 있군.’

나름대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자이다.

내가 큰 소리로 나를 반기거나 과장된 몸짓으로 친절을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조금씩 태도를 교정한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도 알고 있다.

내가 별로 정체를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호텔 안에 있는 사람 중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고 해도-특히 다나카가 언론에 얼굴을 비친 뒤로도 마스크를 쓰는 일 없이 호텔 안을 돌아다니고부터는- 가능한 한 귀찮은 주목에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다른 객실에 비해서 훨씬 프라이빗한 스위트룸에 머물고 있다는 것.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훈련실과 다이렉트로 이어진다는 점이었다.

이런 점을 눈치채고 박거한은 최대한 내 프라이버시를 보호해 주고자 했다.

처음에는 그의 존재가 귀찮을 뿐이지만 지금은 도움이 되는 측면이 더 많았다.

“같이 오신 분은 누구신가요? 일행이십니까?”

박거한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늘 투숙한 손님이고, 나랑 같이 훈련실에 들어갈 거야.”

“아…… 그러십니까? 괜찮으신가요?”

박거한이 하야시를 향해 묻는 것은 S급 훈련실, 특히 내가 훈련을 할 때 옆에 있는 것이 괜찮겠냐는 물음이었다.

당연히 웬만한 헌터들은 그 특수한 환경을 감당할 수가 없다.

“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하야시가 특유의 정중한, 그러나 표정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박거한은 내 뒤를 바라보고 다시 물음을 던졌다.

“오늘 여자 일행분은 같이 안 오셨습니까?”

“응. 오늘은 이 사람과 둘만 훈련실에 들어갈 거야.”

“네, 알겠습니다. 음식은 어떻게 할까요?”

“평소처럼 넣어줘.”

“알겠습니다.”

박거한이 말한 음식이라는 것은 이 훈련실에서 내게 무료로 제공되는 음식들을 뜻한다.

훈련하는 헌터를 위해 만들어진 음식들이니만큼, 특히나 S급 훈련실을 이용하는 내게 제공되는 것이니만큼 더욱더 신경 써서 만들어진 음식들이었다.

스태미너와 마나 회복에 도움이 된다.

나는 하야시와 싸움을 하면서 그것을 먹게 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평소 늘 주문하던 것을 갑자기 안 한다는 것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까 싶었다.

음식은 어차피 문 앞에 두고 가니까 그것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싸우고 나면 피로감이 클 것이기 때문에 음식을 먹으면 바로 회복할 수 있을 것이고.

내게 패배할 예정인 하야시에게도 그런 식의 호의를 베풀면 그가 일본으로 돌아가는 데 마음이 좀 편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쁘지 않군요.”

훈련실을 둘러 보면서 하야시가 건조하게 말했다.

한국 오성급 호텔에 있는 최고급 헌터 훈련실이지만 그는 그렇게 큰 감동을 받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표현이 건조하다거나 말이 짧은 것은 그의 성격에 기인한 것일 것이다.

하지만 이유가 그것밖에 없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일본 쿠로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S급 헌터라고 하니까.

이 정도 훈련 시설은 그에게 대단찮게 보이지 않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의 입에서 ‘나쁘지 않다는’ 말이 나온 것만으로도 이 훈련실의 시설이 괜찮은 수준이라는 방증이 될 터였다.

애초에 S급 헌터가 두 명밖에 없는 한국의 호텔에 이런 시설이 있다는 것 자체가 사치이니까.

장래에는 외국의 S급 헌터들의 투숙을 적극적으로 유도할 것이라고는 해도 아무튼.

이 호텔에 한국에 하나밖에 없는 S급 헌터 훈련실이 있어서 하야시와 싸울 공간이 확보된 것은 좋은 일이었다.

만약 이곳이 있지 않았으면, 게이트에라도 들어가야 했겠지.

어쨌거나 일이 굉장히 귀찮고 복잡해졌을 것이다.

뭐, 헌터부 장관이 우리 노예이니 의외로 쉽게 문제가 해결됐을지도 모르겠지만.

하야시와 나는 나란히 훈련실로 들어갔다.

문득 먼 곳에서 질투심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미미와 함께 훈련실에 들어갈 때도 조금이었지만 같은 시선을 느꼈었다.

멀리서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는 것은 바로 박거한.

그의 입장에서는 나와 함께 훈련실에 들어가는 사람이 모두 부러울 것이다.

그 자체가 대단한 경험으로 비칠 테니까.

하지만 그가 앞으로 아무리 나와 친분을 쌓더라도 훈련을 같이하지는 못할 것이다.

S급 헌터가 훈련하는 데 옆에 있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한 일이니까.

훈련실에 나와 하야시 둘만 남겨졌다.

이러고 있으니까 더 실감이 났다.

그와 내가 싸움을 하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는 게.

하야시가 먼저 코트를 벗었다.

번쩍번쩍 그가 입고 있는 장비가 빛을 발했다.

내가 딱히 헌터 장비에 큰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 그것을 식별하는 눈이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가 입은 장비는 확실해 고급스러워 보였다.

일반 S급 장비보다도 훨씬 뛰어난 수준이라는 것을 알겠다.

내가 가진 지식을 대강 풀어놓자면 이런 식이었다.

사실 더 고성능 장비를 만들 기술은 이미 갖추어져 있다고 한다.

다만 높은 기술이 적용된 장비일수록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높은 능력도 요구되었다.

단순히 등급이 높다거나 마나 양이 많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다.

기술적인 정교한 컨트롤을 할 수 있어야 고급 장비를 문제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하야시가 이런 고급 장비를 떡 하니 입고 있는 것은 그의 능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방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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