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10초쯤 지났을까?
달칵, 객실 문이 열렸다.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다이렉트였다.
문 앞에 남자가 서 있다.
키는 약 180㎝ 정도, 체격 또한 건장한 편이었다.
그럼에도 근육이 너무 많이 붙어 있지 않은 날렵한 인상이 풍겼다.
그는 나를 보고 미간을 찡그렸다.
나는 마나의 기척을 싹 감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조철웅임을 아는 눈치였다.
눈만 겨우 드러나는 마스크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마 내가 상대를 보자마자 하야시라고 확신한 것과 같은 이유겠지.
하야시는 약 3초간 경계심을 띠고 나를 스캔했다.
내가 모종의 스킬을 쓰지 않을까 경계하는 투였다.
모르긴 해도 나를 영입할 목적을 띠고 한국에 들어온 다나카가 역으로 한국 귀화를 선언한 것이 내가 가진 스킬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자신에게도 같은 기술을 발휘하지는 않을까 경계하는 것 같았다.
탐색을 끝낸 그가 조용히 말했다.
“들어오시오.”
하야시에게 방으로 들어오라는 말을 들었다.
서로 목적이 분명한 관계인데 이렇게 쉽게 입장을 허가해도 되는 것일까?
그래도 나는 거리낌이 없었다.
그가 그런 것처럼 나도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눈앞의 남자에게 어떤 방식으로도 당하지 않을 거라는.
싸움이 벌어진다고 하면 반드시 내가 이길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하야시가 잡은 객실은 평범했다.
그리고 사용한 흔적이 거의 없이 깨끗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 호텔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짐을 풀 시간조차도 없었겠지.
방 안에 가방이 있다거나 물건을 풀어놓은 흔적도 없었다.
당연하게도 헌터가 간소하게 움직이고자 할 때는 가방 같은 것이 필요 없는 것이다.
인벤토리가 있으니까.
“앉으시죠.”
하야시가 거실 중앙에 있는 테이블 앞에 내가 앉을 것을 권했다.
“마실 거라도 드릴까요?”
그리고 예의가 바른 멘트를 했다.
나는 음료수 따위를 대접받을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대답했다.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싶군요.”
사실 오렌지 주스가 당기기도 했지만, 그냥 너무나 일상적으로 구는 하야시가 재미있어서 분위기를 깨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네가 그렇게 나오면 나도 응해주겠다고.
딱히 기 싸움 같은 것은 귀찮으니까 하고 싶지 않지만.
그냥 자연스럽게 마음에 피어오르는 어린아이와 같은 딴죽이었다.
사실 내게는 ‘오렌지 주스’뿐만이 아니라 무언가가 마시고 싶다고 구체적으로 의지를 표명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굳이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밝히는 것보다 그냥 주는 대로 아무거나 먹는 게 덜 귀찮으니까.
람바스의 게으름에 사로잡히고 나서 거의 일 년을 그런 식으로 보냈다.
말 그대로 냉장고와 싱크대 수납장에 있는 음식들을 배가 고프지 않을 만큼만 잡히는 대로 먹었었다.
미미와 함께 지내면서도 이런 성향은 전혀 고쳐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졌다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나의 기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따로 묻지 않고 내 쪽에서 설명한 적도 없지만 그녀는 마치 사진으로 찍어서 본 것처럼 내 요구사항을 정확하게 읽고 그것에 맞춰주었다.
지금은 익숙해져서 덜하지만 초반에는 종종 소름이 돋곤 했다.
람바스라면 몰라도 조철웅으로서의 내 취향까지 알고 있지는 않을 텐데.
그렇다고 정말로 사람의 마음을 읽는 스킬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나 정도 되는 능력자는 상대가 스킬을 쓰기 전에 그것을 알아채기 마련이니까.
유능함을 넘어 초인의 경지에 오른 부하라고 할 수 있었다.
만약 어느 날 미미가 시집이라도 가겠다고 선언하면 몹시 섭섭할 것 같았다.
아마, 절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지만.
반대로 내가 결혼한다고 해도 당연하다는 듯이 한집에서 같이 살 것 같았다.
하야시는 표정을 전혀 변화시키지 않고 냉장고로 걸어가 오렌지 주스를 꺼내왔다.
5성급 호텔 냉장고에 있는 음료수는 쓸데없이 비싸서 건드리지 않는 게 상식이지만, 당연히 지금 문제 삼을 거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지내고 있는 스위트룸에서 아무거나 집히는 대로 먹고, 사용하고 있었다.
미미도 그걸 당연하게 여긴다.
미미처럼 똑똑한 여자가 호텔에서 뭔가를 이용하면 굉장히 비싸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고, 이유는 둘 중 하나였다.
그 정도로 우리 생활에 여유가 있든가, 아니면 호텔에서 제공받는 모든 것들이 무료이거나.
나는 높은 확률로 후자일 거라고 보았다.
지금은 S급 훈련 시설을 길들이기 위해서라도 호텔 측에서 최대한 나를 잡아두려고 하니까.
어쨌든 하야시 입장에서도 애초에 호텔의 일반 객실을 잡았다는 자체가 굉장히 검소한 행동이었다.
물론 그것은 검소해서가 아니라 정체를 노출하지 않고자 하는 이유였지만.
그것이 무색하게도 방을 잡자마자 내 쪽에서 먼저 그를 찾아왔다.
“컵은 필요하십니까?”
나는 고객이 조용히 고개만 저었다.
하야시는 김이 샐 만큼 예의가 몸에 밴 사람 같았다.
단순히 내 앞에서 세 보이려고 하는 말이나 행동이 아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는 S급 헌터로 각성하기 전에 오랫동안 무도를 수행한 모양이니까.
무도란 말 그대로 싸우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절도 함께 배우는 것이다.
그런 예절의 일환으로 그는, 페트병에 든 오렌지 주스를 그냥 전달하지 않았다.
뚜껑을 따서 내 앞에 정확하게 놓는다.
오른손잡이일 것을 감안해서 내 오른손 가까이에 둔 것이 지나칠 정도로 디테일한 예절이었다.
각이 확실하게 잡혀 있다.
일본의 무도 마스터들에게 두루 귀여움을 받을 만했다.
그는 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반갑습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저도요.”
평범하게 한 대답이지만, 하야시 입장에서는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경계심을 살짝 보이는 눈빛이 예리해진다.
그의 이런 태도는 십분 이해가 되는 일이다.
철저하게 지하에서 행동하고 있는 S급 헌터인 만큼 내 쪽에서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놀라울 테니까.
더불어 나는 호텔에서만 있지 않았는가?
내가 자신을 즉각 찾아왔다는 것부터가 계획이 어긋나는 일이었을 터다.
그의 입장에서는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을 것이며, 실제로 알고 있는 것이 맞았다.
나는 내 호텔 방에서 동료들과 모여 대책 회의를 했고, 그 결과가 바로 나 혼자 하야시의 방에 찾아오는 것이었다.
하야시가 드디어 반응다운 반응을 보였다.
긴 다리를 꼬면서 말한다.
“생각보다 정보력이 좋으시군요.”
“네. 그러니까 피차 귀찮게 긴 대화는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네요.”
“다행입니다. 저도 싫어하거든요. 복잡하고 긴 대화.”
하야시가 입가를 비틀었다.
딴에는 미소를 짓고자 한 것 같은데. 그것은 전혀 미소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나빠 보인다.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마나를 컨트롤해서 조금도 방출하고 있지 않았다.
철저하게 그것을 제어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알 수 없는 기운이 그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저절로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거리를 좁히고 싶지 않은.
그로 하여금 나를 공격할 만한 거리를 절대로 주고 싶지 않은.
이른바 무도가로서 몸에 밴 기운일 것이다.
‘대단하네.’
실제로 보니 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다나카가 박혜나가 입을 모아 그에게 대단한 싸움꾼이라고 했던 이유를.
얘기로만 들었을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지만 이렇게 마주하고 보니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헌터 능력을 발휘하지 않고서도 인간 자체가 지닌 아우라로 상대를 압박하는 것을 보면 그는 정말로 사도나 영웅이 빙의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사도의 선택을 받을 만큼 강한 잠재력을 지닌 인간이다.
그리고 성격 자체도 굉장히 심플했다.
싸움을 좋아하고, 싸울 수 있는 기회가 최대한 많이 있는 곳에 있고 싶어 한다.
자기 욕구에 대한 심플한 집착이 사도들로서는 그가 활용하기 좋은 인간이라고 여겼을 법했다.
아마 하야시 자신은 모르고 있겠지.
자신이 지금 사도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어쩌면 하야시를 이용하고 있는 자들도 자신들에게 사도가 빙의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조용히, 사도들의 뜻대로 움직여가고 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지만, 적어도 지금 상황에서는 그런 것을 떠올릴 필요가 없어 보였다.
적과 대치하고 있지만, 악마와 얽힌 대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단순한 공기가 하야시와 나 사이에 형성되어 있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좋은 점이다.
하야시가 내게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일본으로 오신다면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 용의가 있습니다. 조철웅 님의 존재 가치는 스스로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큽니다. 일본은 조철웅 님을 전심으로 환영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나는 대답 대신 뚜껑이 따인 오렌지 주스를 입가로 가져갔다.
한 모금 마시고 나서 고개를 저었다.
“그렇군요. 유감입니다.”
말로는 유감이라고 하면서, 하야시는 전혀 아쉬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기뻐하는 것 같다.
그의 미소 같지 않은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저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많이요.”
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나는 애초에 길게 말하는 성격이 아니다.
지금 이 상황도 점점 더 귀찮게 느껴졌다.
내 방으로 돌아가서 소파에 드러눕고 싶었다.
나는 나중 일에 대비해서 노근의인 스킬을 사용하고 있지 않았다.
그 스킬들의 발동 시간은 처음 스킬을 가졌을 때보다 많이 길어졌고, 쿨타임도 짧아졌지만, 하야시와의 싸움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모르기 때문에 이왕이면 그와 싸울 때 집중력을 최대한 유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미미의 견해였고 나도 동의했다.
“조철웅 씨는 말이 많지 않으신 분인가 봅니다.”
하야시가 말했다.
그것이 굉장히 마음에 든다는 투다.
마찬가지로 나도 하야시가 말이 많지 않고 심플한 타입이라서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면 피차 더 길게 이야기할 것이 있겠는가?
시간 낭비일 뿐이지.
내가 말했다.
“가시지요.”
“어디로 말입니까?”
“이 호텔에 훈련 시설이 있다는 거 알고 계십니까?”
“네, 알고 있습니다. 직원이 알려주더군요.”
하야시는 가짜 신분을 사용하겠지만 그것이 일반인 신분은 아닌 모양이었다.
직원이 그에게 헌터들만 이용할 수 있는 훈련 시설에 대해 알려줬다고 하는 것을 보니.
“그곳에 가서 어쩌려는 겁니까?”
하야시는 궁금해했다.
그는 내가 한 말을 이해했다.
내가 이곳에서 나가자고 한 것이 싸우러 가자는 의미라는 것을.
그런데도 그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훈련실에서 어떻게 싸울 수 있느냐 하는 물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