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나는 오늘도 훈련실에 내려갔다 왔다.
이 호텔의 S급 전용 훈련실은 내 전용이나 다름없이 되어 있었으므로, 내가 사용하지 않으면 누구도 사용할 일이 없다.
호텔 측에서도 가능한 한 내가 많이 이용해 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왜냐면 이 훈련 시설의 기능이 제대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초기 단계에서 S급 헌터가 안에 들어가 자주 마나를 써주는 것이 좋다고 하니까.
만들어두고 썩혀 두면 반영구적으로 기능이 저하된다고 한다.
말하자면 새로 산 구두를 잘 신어서 길을 들이는 것과 같다고 할까?
그런 면에서 이 호텔에 행운이라고 할 만한 일이 또 있었다.
S급 헌터가 한 명 더 투숙했으니까.
그 일본 헌터는 얼마 전 한국으로 귀화겠다고 선언했다.
그 자체로 큰 홍보가 될 텐데, 마침 설치한 S급 전용 훈련실을 그가 이용케 하여 길을 들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었으니 두 배로 좋은 일이었다.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다나카에게도 이 S급 전용 훈련실이 무료로 개방되었다.
그는 나보다도 더 자주, 열심히 훈련실을 이용했다.
그리고 감탄했다.
“이런 비슷한 시설은 일본에도 있습니다만, 사용 편의성이나 적용된 기술은 이쪽이 더 훌륭하군요. 한국은 참 기술력이 뛰어난 국가입니다.”
그에게 있어 한국의 평가가 귀화를 선언한 이후 많이 후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의 S급 헌터 숫자가 적어서 이 시설을 이용할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은 불행입니다.”
“뭐, 우리끼리만 느긋하게 사용할 수 있으면 좋은 거죠, 뭐.”
“하하. 그건 그렇지요. 저를 위해 훈련실을 사용할 시간을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철웅 님도 훈련을 하셔야 할 텐데.”
“괜찮아요.”
“네?”
내 즉답에 다나카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생각한 그는 하하하고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켂튜브 채널에 출연할 때는 ‘표정 변화’ 스킬을 썼지만 평소에 나는 그 스킬을 사용하지 않는다.
호텔 방에서 나갈 때는 마스크를 착용하지만, 다나카와 편하게 이야기할 때는 당연히 그것도 쓸 필요가 없었다.
다나카는 내 얼굴과 표정에 어느 정도 적응했다.
그런 경향은 샤로티의 기억을 각성한 이후로 더 강해졌다.
그래서 실수를 한 모양인데 방금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이 되었다.
‘아, 그렇지.’ 하고.
내 표정은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온 마음으로 ‘귀찮아!’ 하고 소리치고 있으니까.
“나는 괜찮으니까 편한 만큼 사용하세요.”
“하하…… 감사합니다.”
나는 자기 안에 빙의해 있던 영웅을 각성한 다나카와 대화를 나눠 보았다.
샤로티는 악마와 싸우는 데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으니까.
미미의 도움으로 다나카는 자기 안에 있던 샤로티의 기억을 빠르게 각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람바스의 기억을 각성한 방식이 그러하듯 그도 샤로티의 기억을 전부 각성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 정말입니까? 샤로티가 악마를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고요?”
“그렇다기보다 어떤 능력을 가진 멤버들의 뭉치면 악마와 더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는지 발견한 게 있었나 봐요.”
샤로티의 전투 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떠나 이런 식으로 전략을 짜고 연구하는 데에는 굉장히 유능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아마 다나카가 샤로티가 발견했던 것들을 기억해 낸다면 앞으로 크게 도움이 될 것이었다.
“안타깝군요. 저는 거기 대해서는 전혀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다.”
다나카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읊조렸다.
그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다.
샤로티가 남긴 메시지도 전부 사실일 것이다.
다만 다나카가 샤로티의 기억과 그 능력을 전부 각성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것이 그가 훈련실에 더 자주 들락거리게 된 이유였다.
그가 성장을 하면 더 많은 기억을 찾게 될 테니까.
같은 일을 겪고 있는 내가 거기 대해 알려주자 그가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루라도 빨리 기억을 찾아 반드시 조철웅 님께 도움이 되겠습니다!”
이렇게도 말했다.
“인류를 구할 영웅 옆에 있을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제 앞으로의 인생은 조철웅 님과 함께 하는 것 말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휴, 정말.
왜 내 옆에 오는 부하며 영웅이며 하는 사람들은 다 이렇게 스스로 자기를 낮추는 것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헌터끼리 만났을 때는 이른바 동물적인 본능이 앞서게 된다.
말하자면 호랑이와 토끼가 마주쳤을 때 먹이사슬의 우열은 말로 설명해야 아는 게 아닌 것이다.
한쪽은 자신이 상대보다 훨씬 미약한 존재라는 것을 자각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호랑이와 토끼가 동료가 되기로 했다고 하더라고 편한 친구 관계처럼은 도저히 되지 않는 것이었다.
당장 다나카가 샤로티의 기억을 다 꺼내지 못한다는 것은 아쉬웠지만 급할 것은 없었다.
악마와 싸우는 계획은 더 대국적으로, 천천히 진행해야 되는 모양이니까.
다나카가 한국의 헌터가 되기로 했고, 김말중도 노예가 되었으니.
모든 것이 다 순조롭게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이제야 좀 편안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왠지 이 평화가 오래가지 않을 것 같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 또 다른 위협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그냥 막연하게 그렇게 생각했다.
111
내 방에 박혜나가 찾아왔다.
그녀는 급한 일로 찾아뵙게 되었다면서 미리 연락을 해왔다.
그래서 다나카를 포함한 우리 편 일행은-아직 자기 안의 영웅을 각성하지 않은 이희진은 제외하고- 그녀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는 파투와 함께였다.
이른바 박상구라는 인간으로 변신해서 박혜나와 함께 활동하는 각성수 파투는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예의 불독 같은 외형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왈! 왈!”
파프리카가 다가가서 짖자 파투가 화들짝 놀라면서도 짧은 꼬리를 흔들면서 반가운 티를 냈다.
“월! 월!”
위계는 확실하게 잡혀 있는 모습이다.
당연히 내 파프리카가 위.
체구도 작고, 싸움 같은 것은 전혀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귀엽고 사랑스러운 외모이지만 파프리카의 정체는 각성수들의 왕이었다.
박혜나는 같은 편이 된 이유로 활동을 함께 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그녀는 아시아 전역에서 활동하면서 지하 경제의 왕이라고 불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지하 시장도 복잡하게 얽혀 있고, 아시아에만도 박혜나만 한 권력을 지닌 이들이 적지 않은 모양이니까, 왕이라는 호칭은 좀 제한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어쨌든 매우 바쁜 그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락한 후 하루 만에 한국으로 날아왔다.
그것은 바쁜 사업 활동 중에도 그녀의 최우선 사항이 바로 나라는 방증이기도 했다.
하긴, 사업을 하더라도 세상이라는 게 존재해야 가능할 테니까.
이 지구상에서 악마의 존재를 인지하고 진지하게 놈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은 우리 일행밖에 없을 것이었다.
아마도.
무슨 일일까.
웬만한 일이라면 그냥 전화로 얘기해도 됐을 텐데.
나는 그런 생각만 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박혜나는 내 귀찮아하는 듯한 표정이 섭섭했나 보다.
“람바스 님. 저는 람바스 님의 안위만을 24시간 내내 걱정하는데, 오랜만에 보고 좀 반가워해 주시면 안 되나요?”
박혜나는-메테르는- 그렇게 나를 겪어보고도 모르나?
내가 이런 표정인 것은 일상이다.
누군가를 굳이 반가워하거나 하는 것은 나와 람바스 사전에는 없는 일이었다.
“주군이 왜 그래야 하는데요? 왔으면 용건이나 말하세요. “
미미가 그녀답지 않은 가시 돋친 말투로 얘기했다.
그녀가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박혜나는 진짜 정체는 메테르.
그녀는 사도이다.
그녀가 자신의 본분을 버리고 람바스와 같은 편이 된 것에는 모종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언급하기 조심스럽지만 바로 남녀관계에 기인한 특별한 감정 때문이었다.
남녀가 함께 있으면 어디서나 생길 수 있는 것이 사랑의 감정이지만 그게 사도와 람바스 간의 관계에서 발생했으니 참 얄궂은 일이 아닐 수 있었다.
그런 감정이 발단되어서 메테르는 람바스 측에 붙게 되었고, 이른바 스파이로서의 활동을 하게 된다.
그야말로 사랑 때문에 목숨을 건 여자인 것이다.
어찌어찌 완전히 발 되는 것을 피해 람바스 측에 도움을 주었지만 그의 죽음을 막지는 못했고. 그 인연이 이 먼 행성이 지구에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람바스 입장에서는 헌신적인 그녀의 마음을 받아줄 여력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실제로 람바스가 살고 있는 행성에서는 그 정도 능력과 지위가 있는 남성이 여러 명의 여자를 거느리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것은 능력과 지위가 있는 여성이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그는 기본적으로 사랑의 감정을 처리하는 데 좀 서툴렀던 것 같다.
람바스의 성정이 빙의된 나는 그가 메테르에 대해 어떻게 느꼈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좋아하고 흠모하는 수많은 여자들에게도.
어떤 식이냐 하면, 나는 람바스의 기본 성정, 즉 압도적인 게으름에 사로잡힌 이후 성욕이라는 감정이 거의 사라진 것을 느꼈다.
이와 더불어 사랑, 연애 감정 이런 것은 거의 느끼지 않게 되었다.
물론 로봇이 아닌 이상 감정을 느끼기는 하지만 그것들을 심리적인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됐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내 일이고 내 감정이지만 내 것처럼 느끼지 않게 되었다고 할까?
그것은 귀찮은 일을 최대한 회피하려는 성향에서 발동된 것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람바스가 빙의하기 전부터 나는 연애를 꽤 오랫동안 하지 않았다.
기회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연애를 하려면 시간을 써야 하고 돈도 써야 하며 무엇보다 에너지가 소모가 많았다.
나는 내 나름대로 목표가 있었고, 남들이 보기에 바보 같다고 할 만큼 그것을 위해 무척 열심히 노력했었다.
그런 내게 사랑은 사치였었다.
하물며 람바스처럼 게으른 인간이 그 많고 많은 귀찮은 일이 수반되어야 할 연애 감정 같은 것을 허락할 리 있었겠는가?
설령 마음을 확인하고 데이트하고, 서로 거리가 부쩍 가까워지는 연애의 모든 과정이 생략되고 바로 결과로만 이어진다고 하더라고 람바스는 그것을 거부했을 것이다.
그 뒤로도 귀찮은 일들은 끊임없이 이어질 테니까.
그런 인간을 좋아한 메테르였으니까 당연히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을 꺾지 않았으니 사도도 순애보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인 것 같다.
그런 사연이 미래 먼 행성인 지구에서도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미미는 어떠냐 하면 당연히 메테르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같은 편을 배신하는 선택을 하고 아군이 된 박혜나에게 동료로서의 존중심을 가지고 있지만.
남녀 간의 감정은 그것과 별개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귀찮네, 귀찮아.’
나는 두 여자를 보면서 남의 일처럼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