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반가워!
이희진이 내가 보낸 쪽지에 즉시 답장을 했다.
그녀의 캐릭터 정보가 내 핸드폰에 표시되었다.
별생각 없이 그것을 쭉 스캔한 나는 놀랐다.
‘와.’
뭐라고 해야 될까?
나한테 돈 먹는 하마 게임을 한다며 핀잔 아닌 핀잔을 준 그녀는 엄청 화려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게임 속 캐릭터 클래스는 마법사.
레벨이 만렙인 데다가 무엇보다 장비가 화려했다.
나처럼 비싼 걸로만 덕지덕지 치장했다는 느낌이 아니라 정말로 신경 써서 입힌 캐릭터 장비다.
거기다 디자인적인 밸런스도 갖추고 있어서 꽤 봐줄 만했다.
‘비교되네.’
성의 없이 키운 내 캐릭터와 비교가 된다.
이희진의 캐릭터가 이 정도 레벨과 장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단순한 사실로 귀결된다.
바로 그녀도 이 게임을 많이 했다는 것.
현질도 엄청 한 것 같다.
아~ 그 게임? 하고 반응이 돌아온 걸 보면 그녀는 게임 마니아일지도 모른다.
아니, 높은 확률로 그럴 것이다.
-와 너 진짜 대단하다.
이희진이 내게 계속 쪽지를 보냈다.
나는 일일이 답을 하지 않았다.
말하는 것도 귀찮은데 핸드폰으로 텍스트 입력하는 것은 더 귀찮다.
음성입력 시스템이 있는 모양이지만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
-와 진짜 대단하다! 대단해!
이희진이 계속 똑같은 말을 했다.
이쯤 되면 거기에 진짜로 대단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숨은 뜻이 있다고 봐야 했다.
-현질 진짜 많이 했네
-근데 이렇게 캐릭터를 성의 없이 키우냐?
-레벨만 높고 하나도 실속이 없잖아!
-어휴, 내 돈이 다 아깝네.
뭔데 이렇게 훈수를 두는 거지?
그냥 게임은 재밌으라고, 시간 때우기로 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이희진의 캐릭터를 이미 본 터라 뭐라고 대꾸하기 어려웠다.
그녀 말대로 나는 돈지랄만 했을지도 모른다.
-야! 너 직접 사냥 한 번도 안 해 본 거 아니야?
-진짜 매크로만 돌린 사람 처음 봤네!
-그렇게 하면 성장이 제대로 안 돼. 들어갈 수 있는 사냥터나 받을 수 있는 퀘스트도 제한적이야. 적어도 처음 한 번은 네 손가락으로 움직여야지!
-진짜 답답하네. 따라와! 내가 보여 줄 테니까!
결국 게임은 이희진이 전부 리드하게 되었다.
뭐, 손가락 좀 놀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그녀가 생성한 방에 들어가서 그녀가 고른 퀘스트에 합류해 그녀와 같이 사냥터에 나갔다.
단 두 명으로 이루어진 파티는 그리 흔하지 않다.
적어도 포지션 별로 한 명씩은 섞여 있는 4인 파티 이상이 보통이고, 대형 몬스터 레이드 때는 수십 명씩 떼로 몰려가 사냥을 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현실에서 헌터가 몬스터 잡는 것과 구조가 비슷했다.
현실에서는 S급 몬스터를 잡을 수 있는 게 S급 헌터로 한정되어 있고, 그 숫자가 아주 적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둘 다 만렙이니까 상관없겠지.’
게임 내에서 만렙은 비교적 흔하지만 온몸을 고가의 현질 장비로 두른 캐릭터는 많지 않다.
사람들은 우리가 실제 S급 헌터 파티라는 것을 절대 모르겠지.
이희진은 마법사 클래스였고 나는 전사였다.
원래라면 내가 전방에서 몸을 부딪쳐 몬스터들을 사냥하고, 이희진이 뒤에서 서포트를 해야 맞았다.
나는 이희진이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귀찮은 걸 싫어하는 성격인 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선택한 클래스가 마법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와 함께 사냥을 해서 훨씬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마법사임에도 전방으로 튀어나가 적극적으로 몬스터들을 죽인다.
펑! 펑! 펑!
화르르륵-
그녀의 화려한 마법에 몬스터들이 녹아내렸다.
-알겠지? 이렇게 하는 거야. 장비 맞출 때도 머리를 써야지, 머리를!
-매크로만 돌리는데 너 정도 장비는 완전히 배보다 배꼽이 큰 거라고.
-돈을 쓰려면 제대로 써야지. 호구 잡으려고 만들어 놓은 것들로 아주 전신을 도배했구나. 네가 산 것들은 가성비 빵점이라 상점에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한 아이템들이야.
이희진은 전투 중에 내게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냈다.
대부분이 내 쓸데없는 현질과 무식한 캐릭터 키우기를 질책하는 내용이었다.
귀찮다.
그런데 재밌다.
전투가 재미있었다.
이희진은 내게 적절한 지시를 내렸다.
-아, 그래! 거기서 스킬 써!
-야! 손가락 누르는 것도 귀찮냐? 딴 데 필요 없으니까 스킬만 쓰라고! 너 레벨 높잖아.
-뭐야? 너 스킬 장착도 아직 안 했어? 와, 매크로는 어떻게 돌린 거냐? 하기야 장비빨로만 밀어붙였겠지.
-당장 스킬 포인트부터 전부 다 써!
약 1시간 동안이 이희진과 게임을 했다.
같은 게임을 하는데 이전과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희진이 사냥을 이끄는 데 굉장히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S급 헌터가 어울리지 않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A급이 되어 클랜을 이끄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물론 무리를 이끌기를 좋아하는 성향을 지닌 몇몇 S급 헌터 중에는 자기 클랜을 가지고 경우가 적지 않지만
그런 경우 사장단을 거느린 회장 같은 입지가 된다.
그야말로 거대 무리의 왕이 되는 것이다.
뭐, 혼자서 활동해도 웬만한 클랜 찜 쪄 먹는 수입을 올리는 S급 헌터이니 사소한 일에 구애받지 않고자 솔로로 활동하는 S급 헌터가 더 많았다.
보통은 무리해서 사업 같은 것도 하지 않는다.
S급 헌터가 클랜을 굴리고 사업을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취미활동일 뿐이었다.
-아, 진짜 게임 할 줄 모르네.
이희진이 마지막으로 한탄 섞인 쪽지를 보내왔다.
-막판에는 그래도 스킬도 얻고 하니까 사냥이 할 만해지네. 오랜만에 하니까 이 게임도 나쁘지 않은데? 나중에 또 하자.
-ㅇㅇ
솔직히 다른 사람과 같이 게임 하는 것은 귀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매크로만 돌리는 것보다 가끔은 이렇게 다른 게이머와 파티를 맺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희진이 잘 이끌어주니 굉장히 편했다.
내가 한 현질이 그녀 덕분으로 자리를 잘 잡은 것 같다.
스킬이 그렇게 중요한 거였다니, 몰랐다.
아이템을 사고파는 중에 천만 원 단위의 손해를 본 것 같지만, 이 정도는 뭐, 괜찮겠지.
‘나쁘지 않았어.’
그런 생각이 드는 동시에 이상한 감각도 차올랐다.
가슴 속이 간질거리는.
약간은 그립기도 한 느낌.
‘아, 이 기분 뭐야, 귀찮네.’
오래된 기억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예를 들어 람바스가 어쩔 수 없이 파티를 맺어 사냥했던 일 같은 것.
나는 낮잠이나 잘까 하고 핸드폰을 소파 등받이 위에 올렸다.
게임을 한 시간이나 했더니 피곤하다.
더구나 매크로만 돌린 게 아니고 이희진을 졸졸 따라다녔으니까.
눈을 감으려는 찰나에 익숙한 반응이 나타났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뭘 했다고 레벨이 올라?’
게임 속에서의 전투 경험까지 실제 경험치로 치환되는 건가?
왜 지금까지는 안 그랬는데?
아마 그 이유는 지금까지는 머리를 텅 비운 채 매크로만 돌려서 그런가 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굳이 훈련실에 내려갈 필요도 없었는데.’
아니, 그거랑은 좀 다른가?
어쨌든 나는 이희진과 종종 어울려서 게임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08
“주군, 계약 문제가 다 해결됐습니다.”
“해결됐다고? 그게?”
나는 협상 내용을 들었기 때문에 그것이 거의 막무가내식의, 말도 안 되는 계약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몇 가지 더 불공정해 보이는 부분을 바로잡았어요. 김말중이 자기 입으로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답니다.”
김말중…… 제대로 덜미가 잡혔구나.
아무리 국가가 S급 헌터와 퍼주기 식의 계약을 하는 게 관례라고는 하지만, 이 정도의 계약이라면 한국은 물론이고, 비교적 헌터의 개인적 권리와 자유도가 높은 유럽에서도 없는 일일 터다.
물론 S급 헌터가 왕처럼 군림하는 일부 국가들은 예외로 해야겠지만.
일이 이렇게 간단하게 해결된 이유는 단순했다.
김말중을 포로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자연스럽게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는 대한민국 법률 체계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가 아닌가 싶은데.
의무가 적고 권리는 많다는 점에서 보기에 따라 대통령을 뛰어넘는 권한 행사를 할 수 있었다.
이 나라에서는 아무도 나를 막지 못한다고 보면 된다.
“생각보다 더 헌터부 장관의 권한이 세더라구요. 아직 S급 헌터 관련한 법률에 미비한 부분이 많아서 허점을 공략할 여지가 많았어요. 설마 하는 생각이 공백을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죠. 아마 주군이 계약을 맺고 나면 법률 정비에 들어갈 거예요. 다음 S급 헌터들에게는 같은 기회가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미미가 말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암, 법률을 고쳐야지.
그런 점에서 나는 시스템 보완에 일익을 한 것일 수 있었다.
장관이라는 놈이 이런 것들을 다 꿰고 있었던 걸 보면 다른 부분에서도 법률상의 미비한 점이 많을 것이다.
그것을 제멋대로 이용하려고 했겠지.
김말중이 그러지 못하도록 막은 것만 해도 내가 대한민국의 국익에 끼친 좋은 영향은 클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좀 마음이 편해졌다.
아무튼 해결되었다니 다행이다.
“김말중이 장관이라서 다행이에요. 앞으로 그를 이용해 이것저것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확실히 대통령보다 더 이용가치가 있어요.”
그 이것저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김말중이 장관이라는 점을 이용해서 미미가 자기 계획을 착착 진행시킬 계획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만족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다.
역으로 생각하면 그녀의 계획이 진행된다는 것은 내가 귀찮은 일을 더 많이 겪게 될 거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뭐.
지금은 좋은 것만 생각해야지.
김말중이 나를 이용하려고 한 것이나, 이미지에 흠집 내려 한 것은 엄청 짜증나는 일이었지만 이 정도 결과라면 그 정도는 감수할 만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말중에게는 악마가 빙의해서 평생 족쇄가 채워진 인생을 살아야 할 테니까 나름대로 속이 시원한 면도 있었다.
“그런데 김말중은 상당히 즐기는 것 같더라고요.”
미미가 역시 상종 못 할 놈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끔은 사도보다 더 못된 놈들이 있기 마련이죠. 하지만 못된 놈도 가끔은 이용할 가치가 있답니다. 특히 같은 편이 되었을 때는요.”
김말중은 본인에게 이득이 되면 뭐라도 상관이 없다는 주의의 인간이다.
개인적인 야심은 좌절되었지만 나라는 큰 권력에 붙어 상식 밖의 이런저런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의외로 의욕이 넘치는지도 몰랐다.
‘노예로서는 유능하군. 김말중.’